■알려지지 않은 경남 ‘밖’ 가야유적 (1) 부산 고촌리고분군

1960년 동래고 향토반 고촌리서 유적 첫 확인
4~6세기 사이 만들어진 대규모 고분군 결론

금관가야 대표 토기 출토...보물 환두대도도 확인
고촌유적 앞 야산 고분 1000여 기 이를 수도

잡목·수풀로 뒤덮인 유산서 도굴 흔적 확인
부산박물관 "내년 중 추가 발굴 진행 예정"

가야는 고구려·백제·신라와 달랐습니다.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가야사를 4세기 또는 5세기를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눠보면 가야에는 시기별로 여러 정치체제가 공존했습니다. 가야 전기 때는 남해안을 매개로 경남 김해시·창원시·함안군·고성군·사천시에서 가야 세력이 부상했습니다. 경북 고령군, 경남 거창군·함양군·합천군·산청군·창녕군, 전북 장수군·남원시, 전남 순천시·여수시·광양시에서는 후기에 가야 문화권이 확대됐습니다.

<삼국유사>에 북쪽 가야산, 남쪽 남해, 동쪽 낙동강, 서쪽 지리산이 가야 영역 경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까지 이뤄진 조사에서는 부산시를 비롯해 전북 장수군과 남원시, 전남 순천시·여수시·광양시 등 호남 동부지역 일부가 가야 영역이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사료가 적어 가야 전체 역사를 상세히 알기는 어렵지만, 가야를 보여주는 고고학적 자료가 한반도 남부 지역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그렇다면 영호남에 닿은 가야인의 발자취는 어떤 형태로 존재할까요? 부산과 경북, 전라지역에 흩어져 있는 가야유적을 중심으로 그들의 흔적을 여섯 차례에 걸쳐 쫓습니다.
 

부산지역 가야유적 중 하나인 고촌리고분군 일대. 고촌유적 앞 야산에 분포한다. 사진은 부산박물관 발굴조사 당시 현장 모습. /부산박물관

3세기 말 중국 역사가 진수(陣壽·233~297)가 지은 <삼국지> 위서동이전(魏書東夷傳)에는 당시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 많은 소국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마한(54개)·진한(12개)·변한(12개)으로 구분해 78개국 이름이 일일이 적혔다. 그중에는 독로국(瀆盧國)이라는 이름도 나온다. 변한 12개국 중 하나다. 어디에 있던 나라인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학계에서는 부산 동래와 경남 거제 두 곳을 손꼽는다.

나라 위치가 동래냐 거제냐를 두고 학계 견해가 엇갈린다. 이유를 요약하면 크게 2가지다. 하나는 독로의 음차를 풀면 모두 동래와 거제로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독로국이 왜와 경계를 접했다’는 위서동이전 기록과 ‘대마도를 바라봄에 가장 가깝다’는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 거제현조 기록이 두 지역 위치와 연관된다는 점이 꼽힌다. 이를 근거로 학계에서는 독로국 동래설과 거제설을 지속해서 제기하고 있다.

다른 문헌 기록에 의하면 독로국이 존재한 시기 부산에는 거칠산국(居漆山國)·내산국(萊山國)·장산국(長山國) 등이 존재했다. 다만 이 나라들이 독로국의 또 다른 이름인지, 아니면 별도 정치 세력인지는 알 수 없다. 부산지역 지리적 여건을 고려하면 같은 정치체제가 다른 이름으로 불린 것 아니냐는 시각도 존재하나, 자료가 부족해 어떤 이유로 다른 국명이 존재하고 사용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부산박물관 발굴조사 과정서 확인된 무덤 흔적. 무덤 구조물에서 금관가야 대표 토기 유물들이 나왔다. /부산박물관

도시화가 이뤄지면서 수많은 유적이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부산에는 가야인이 머물다간 흔적이 여럿 남아있다. 대표적인 가야유적으로는 복천동고분군과 연산동고분군이 꼽힌다. 그 밖에도 가야를 보여주는 유적이 도시 안에 다수 분포한다. 그중 하나가 기장군 철마면에 있는 고촌리고분군이다.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후반까지 연속적으로 만들어진 대규모 무덤 유적으로, 산 정상과 사면에 고분이 몰려있다. 정확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파악되지 않았지만, 앞서 이곳에서 발굴조사를 했던 부산박물관은 일대 무덤 수가 1000여 기에 이를 수 있다고 전망한다. 이 같은 무덤 밀집도는 이례적인 규모다.

고촌리고분군은 1960년대 동래고 향토반 학생들이 유물을 채집하면서 처음 알려졌다. 현재 비지정문화재로 남아있는 이 유적은 고촌 신도시 고촌휴먼시아 아파트 입구와 실로암 공원 진입로 사이 구릉 일대에 조성돼 있다. 정확히는 아파트가 새로 들어서면서 사라진 고촌유적(생산유적) 터 앞 야산에 위치한다. 부산박물관 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무덤은 덧널무덤(목곽묘) 6기, 구덩식 돌덧널무덤(수혈식 석곽묘) 1기, 독무덤(옹관묘) 2기 등 모두 10기다. 커다란 봉토분은 없다. 대부분 소형이라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덧널무덤에서는 주로 머리와 발치 쪽에서 유물이 확인됐다. 이 유적에서는 지난해 7월 20일부터 11일 5일까지 4개월 가까이 진행된 부산박물관 시굴(8000㎡)·발굴(120㎡) 조사에서 금관가야 대표 토기 유물이자 김해지역 가야 정체성을 보여주는 외절구연고배(입구가 밖으로 벌어진 굽다리접시) 10여 점 나왔다. 김해 대성동고분군 등 수장급 집단 고분에서 나오는 이 토기들은 소규모 발굴 과정에서 확인됐다. 복천동에서 신라 수도였던 경주 쪽으로 직선거리 9km 떨어진 고촌리에서 금관가야를 대표하는 유물이 발굴된 것이다. 또 보물급 유물인 손잡이 부분에 둥근 모양의 고리가 있는 칼(환두대도)도 이 유적에서 나왔다.

부산 고촌리고분군 덧널무덤서 확인된 토기 유물. /부산박물관
입이 바깥으로 벌어진 굽다리접시(외절구연고배). /부산박물관

지난 8일 오후 고촌리고분군 현장에 동행한 김은영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은 복천동고분군에서도 발굴되는 토기 세트가 고촌리에서도 나왔다는 점을 들어 과거 두 집단 간 밀접한 연관성을 띤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 팀장은 “금관가야 양대 수장급 무덤인 김해 대성동고분과 복천동고분군에서 나온 외절구연고배 세트가 고촌리고분군에서 그대로 나온다”면서 “독로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수장급 아래 지위에 있는 집단 무덤이 고촌리고분군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많은 고분이 이곳에 밀집해 있다는 건 과거 이 주변이 굉장히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걸 의미한다”며 “산비탈 쪽에 보면 중복된 유구 등이 많이 보이는데 지난해 조사 과정에서 파악된 고분은 10기 정도지만, 산을 전부 조사를 하게 된다면 1000기 넘는 무덤이 확인될 가능성도 있다”고 덧붙였다.

고촌리고분군 곳곳에 잡목이 무성하게 자라있다. /최석환 기자
현장에 동행한 김은영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이 바깥으로 드러난 가야시대 무덤 덮개돌을 가리키고 있다. /최석환 기자

이날 찾은 고촌리고분군은 잡목과 수풀이 무성했다. 민묘(민간인 무덤)도 조성돼 있었다. 일대에서는 땅속에 묻혀 있어야 할 무덤 덮개돌과 벽석 등이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도굴로 인해 땅이 움푹 파인 흔적도 눈에 띄었다. 발굴조사가 진행됐던 자리는 앞서 심겨있던 잡목이 잘려 나가 평평한 지형을 이루는 모습이었다.

고촌마을에서 만난 주민들은 고촌유적에 아파트가 들어서는 과정에서 토기가 발굴됐다는 것 말곤 고분군이 앞산에 분포한다는 걸 알지 못한다고 밝혔다. 김선주(75) 씨는 “기장에서 몇십 년을 살면서도 고분군이 산에 있다는 건 들어보지 못했다”며 “마을 주민들도 고분군이 있다는 건 잘 모른다”고 했다. 한 할머니(80)는 “그런 내용을 잘 아는 사람들은 토박이인데 알 만한 사람들은 이제 나이가 많아서 다들 요양병원에 가 있다”면서 “마을에 외지인이 많이 들어와서 고분군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라고 말했다.

고촌리고분군 발굴조사 현장서 촬영된 1호 석곽묘 모습. /부산박물관

부산박물관은 금관가야 최고 상위 지배계층 고분군인 복천동고분군 문화와 비교·분석할 수 있는 자료가 고촌리고분군에 남아 있어 의미가 크다고 보고 부산 가야사를 밝혀내기 위한 발굴조사를 추가 진행할 계획이다. 조사는 내년 중에 할 예정이다. 김 팀장은 “지난 조사 때 자문회의 과정에서 연차적인 학술조사가 필요하다는 얘기가 나왔었다”며 “발굴 이후 유적 성격이 더 명확해진다면 문화재 지정도 가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석환 기자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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