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지지 않은 경남 가야유적을 찾아서 (26) 양산 다방동패총
비지정문화재로 남아있는 다방동패총
1921~1922년 일제강점기에 최초 확인
양산시청과 차로 5분 거리 숲 속 유산
다방마을 둘러싼 야산에 유적 분포
양산 중심 성장 세력 방어적 성격 취락
지역 가야사 밝혀줄 단서 산속에 오롯이
지난 1일 오전 10시 30분께 김미영 경남연구원 역사문화센터 조사연구위원, 백진재 양산시 학예연구사와 함께 우산을 쓰고 양산 다방동에 있는 다방동패총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탔다. 세 사람이 한 줄로 산을 오르던 이날은 태풍 여파로 한 주 내내 비가 내려 주변이 축축히 젖어 있었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산행이 쉽지 않았다. 길이 없어 숲길을 헤집고 올라갔다.
곳곳이 밭이었다. 패총으로 가는 길목마다 일대 주민들이 일궈놓은 텃밭이 가득했다. 땅을 갈아놓은 다음 밭 경계선에 울타리와 철망을 쳐 길을 막아놓은 이도 있었고, 주인 없는 땅에서 농사를 짓던 주민도 있었다. 밭과 그 주변 길목에서 항아리 같은 생활 토기 조각들이 쉽게 눈에 띄었다. 땅에 박혀있거나 위로 드러나 있기도 했다. 조개껍데기도 보였다.
2020년 12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다방동패총에서 시굴·발굴조사(발굴 550㎡·시굴 7200㎡)를 했던 김 위원이 산을 오르다 가던 길을 멈추고 땅 위로 드러난 조개껍데기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여기 보면 하얀 것들이 다 조개껍데기예요. 발굴 전에는 어떤 성격인지 알 수 없는 건데, 눈에 보이는 게 조개니까 여기에 패총이라는 이름이 붙었어요. 고성 동외동패총이나 김해 회현리패총도 주거지인데 패총으로 돼 있죠. 다방동패총 역시 일반 패총이 아니거든요. 고지성 취락이에요.”
그가 언급한 고지성 취락은 조망과 방어에 유리하도록 산 정상부나 높은 지대에 만들어진 주거 집단을 뜻한다. 다방동패총은 해발 287m 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가지 능선 정상(해발 110m)에 조성돼 있다. 여기에는 패총(조개더미)과 주거지가 분포한다. 유적 규모는 20만㎡로 추정된다.
진해 웅천패총과 입지가 유사하다. 웅천패총은 봉동산(481.2m)에서 남쪽으로 뻗어 나온 자마산 정상 일대에 있다. 두 유적 모두 정상에 유적이 있고 산비탈 경사가 급하다. 웅천패총 등 같은 시기 패총 유적들도 비슷한 입지에 조성돼 있다. 이 시기 취락들은 방어나 조망을 목적으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평가된다. 김 위원은 이어 말했다.
“정상부가 취락이에요. 마을인 거죠. 그 주변으로는 환호(마을 주변을 둘러싼 도랑)가 삼중으로 만들어져 있어요. 테두리를 따라서 환호가 있는 건데, 주거지들은 산비탈에 있고 정상에 없어요. 가장자리에 주거지, 그 아래에 패총이 있죠. 먹던 걸 먼 곳에 버리지 않거든요. 그래서 밑에 패총이 있는 거예요. 정상 가운데는 비워두거나 공공장소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은데 패총 유적을 조사해보면 대부분 이래요. 삼한~삼국시대 고지성 취락은 중앙 내부를 비워두는 특징이 있어요. 경작 이후 깎여나갔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다방동패총을) 일부 조사했을 때는 정상부에 주거지가 없었어요.”
경남연구원 역사문화센터가 산 동쪽 경계 구간에서 진행한 발굴조사 결과를 보면, 주거지 5동, 고상 건물(강당) 1동, 환호 3기, 패총 1기 등 모두 10기가 확인됐다. 주거지는 환호 밖에서 드러났다. 환호는 삼중으로 만들어져 있었으며, 위치는 주거지와 패총 사이였다. 패총은 환호 안쪽에서 확인됐다. 패각층은 3개 층으로 퇴적된 형태였다. 여기에는 굴, 백합, 재첩 껍데기와 동물 뼈 등이 묻혀있었다.
다방동패총에서 첫 고고학적 조사가 진행된 건 1921~1922년이었다. 일본인이 첫 조사를 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고고학자 하마다 고사쿠와 후지다 료사쿠가 발굴했다. 조사 당시 각종 골각기(동물 뼈, 뿔, 이 등으로 만든 도구)와 토기 등이 확인됐다. 1922년 간행된 <대정11년도고적조사보고>에 약식 보고된 것 이외에 정식 보고는 되지 않았다.
실질적인 최초 발굴조사는 1967년 국립중앙박물관이 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구릉 정상부에 있는 다방동패총을 발굴 조사해 앞서 확인된 유물과 마을을 감싸는 환호를 확인했다. 또 다방동패총이 방어를 목적으로 하는 취락유적임을 밝혀냈다.
경남연구원 역사문화센터는 주거지 형태, 출토 유물을 볼 때 다방동 취락유적이 1~3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내다봤다. 연구원은 앞서 발간한 발굴조사 보고서에서 “양산지역 2~3세기 환호 취락인 양산 평산리와 비교했을 때 다방동 취락은 양산 평산리 유적보다 조금 이른 1세기대에 먼저 조성됐다”며 “적어도 3세기 이전에는 환호가 묻힌 것으로 보인다”고 썼다. 이어 “양산지역 내에서는 삼한시대 가장 이른 시기에 조성된 고지성 취락으로 볼 수 있다”고 적었다.
이날 산과 다방마을에서 만난 주민들은 다방동패총 존재를 알고 있다고 밝혔다. 패총 일대에서 농사를 짓는 한 주민(60)은 “땅 소유주는 아니지만, 노는 땅이라 일주일에 한 번씩 산에 올라와서 작게 농사를 짓고 있다”며 “문화재라는 건 들어서 알고 있지만, 나중에 발굴조사가 진행된다면 협조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다방마을이 고향이라고 밝힌 또 다른 주민(67)은 “내가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산 일대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다”면서 “패총이 있는 산은 예전에 돈이 없던 사람들이 올라가서 농사를 짓던 곳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최근에 조사가 진행된 이후로 이제 주민들도 어느 정도 유적이 있다는 건 알고 있다”며 “그 산을 깎아서 택지개발을 하려는 움직임이 있는데 자연마을 그대로 보존될 수 있으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다방동패총을 포함한 다방동 취락유적은 낙동강과 남해안에서 경주지역으로 진입하는 길목을 조망할 수 있는 산자락에 있어 전략적 요충지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해 봉황동패총과 같은 시기에 양산을 중심으로 성장했던 가야 세력의 주요 방어 취락으로 볼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백 학예사는 이 패총이 양산의 대표적인 고대 생활유적이라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고 설명했다. 양산지역에서 확실하게 가야라고 말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유적이 다방동패총이라 경남도에 문화재 지정 신청을 한 상태라고 했다. 백 학예사는 “주택조합이 만들어져서 패총이 있는 산에 아파트를 지으려는 움직임이 있다”며 “조합 관계자가 시청에 찾아와서 문화재로 지정하지 말라고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건 어렵다고 답변한 상태”라고 말했다. 이어 “정비가 안 되어 있는 데다 지형적으로 단절된 측면이 있지만, 양산의 대표성을 가지는 유적인 만큼 지속해서 조사할 수 있다면 한국 고대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끝>
/최석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