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동안 세 명 남자 만나면서
'최악 상황' 빠져버린 주인공
내면에 숨은 보편적 감정 공감
지친 일상 속 담담한 위로 건네

주인공 '은희'를 보면서 마치 녹음된 내 목소리를 처음 듣던 때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은희가 길바닥에 주저 앉는 역경의 클라이맥스에서는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 나의 공감성 수치가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은희를 따라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쥐어뜯는 와중에, 그럼에도 그녀는 매력 있는 사람이었다.

사람의 민낯을 유독 잘 끄집어내는 감독들이 있다. 김종관 감독도 그중 한 명인데, 그는 사람들이 상대방에게 절대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밑바닥의 심리를 까발리는 재주가 있다. 그의 오래전 단편영화 <폴라로이드 작동법>(2004)도 그랬다. "좋아한다. 얼굴이 달아오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무력하다. 슬프다. 폴라로이드 작동법을 배운다"라는 시놉시스 그대로였다. 어린 날의 사랑은 늘 봄 햇살 같은 풋풋한 기운을 품기 마련이지만 실제로는 정신이 아득해지고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엔 수치스러워졌던 순간들로 가득하다. 김종관 감독은 그런 심리를 상황에 담아 보여준다.

주인공 은희와 그녀를 둘러싼 세 남자의 하루 동안 이야기를 다룬 영화 <최악의 하루> /갈무리

흔히 '김종관 유니버스'라고 부르는 작품 세계 안에서 <폴라로이드 작동법>의 소녀는 숱한 사랑을 겪은 후 은희가 되었을 것이다. 재채기 같던 사랑은 이미 옛말이 되어버린 사람, 사랑이 코로나바이러스라고 해도 기침 소리 한 번 드러내지 않고 버틸 수 있을 것만 같은 사람으로 말이다. 누구나 연애에 노련해지고 처세와 거짓말이 느는 시점은 오기 마련이니까.

배우 지망생이지만 거짓말이 직업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그녀는 실제로도 척하는 것에 매우 능한 듯하다. 연기 레슨에서는 연애를 하라는 조언을 들을 만큼 순진한 얼굴이지만 남자친구 '현오'에겐 싫은 소리도 잘하는 당찬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예전에 사귀었던 이혼남 '운철'에겐 어리숙하면서도 이따금 처연하기까지 하고, 우연히 길을 안내하게 된 일본 소설작가 '료헤이'에게는 친절하지만 어쩐지 미스터리한 느낌을 준다.

<최악의 하루> 속 한 장면. /갈무리

이런 은희의 '얼굴들'은 오전부터 해 질 녘 사이, 반나절 안에 모두 나타난다. 그리고 차례로 은희를 거쳐 간 이 사람들은 그녀에게 최악의 하루를 선사하는데, 한 명 한 명이 최악의 사람들이긴 하지만 은희가 최악에 다다르게 된 건 자승자박이었다.

일진이 사나운 날은 운을 탓하며 넘기면 그만이다. 고대하던 일이 실패하거나 엎어졌다면 수습하거나 대안을 찾을 수라도 있다. 하지만 관계가 파탄에 이르는 건 돌이킬 수 없다. 더군다나 연인 사이에 실수로 이름을 잘못 부르거나, 내가 사귀었던 사람들을 한 공간에서 같이 마주하는 상황이 얹어진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다.

영화 속 은희의 역경은 일생일대의 사건이나 실패가 아니라 복잡하고 수치스러운 실연의 경험이다. 보편적인 경험과 심리를 소재삼아 영화는 관객의 밑바닥을 손쉽게 끄집어 올려 까발린다. 그래서 우리는 역경의 클라이맥스에서 덩달아 괴롭다.

잘 모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지금 계절에는 길가에도 꽃집에도 마리골드가 한창이다. 마리골드는 완전히 상반된 두 가지 꽃말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이별의 슬픔', 다른 하나는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 최악의 하루 끝에서 허탈한 얼굴의 은희 앞에는 낮에 마리골드 차를 마시고 온 한 남자가 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은희와 함께 걷는 밤길에서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입니다. 주인공은 행복해질 거예요"라며,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을 남긴다. 훗날의 은희에게도 이 하루는 최악으로 남아 있을까?

<최악의 하루> 속 한 장면. /갈무리

처서를 두고 요즘은 처서 매직이라 부른다. 마법처럼 하루 만에 열기가 꺾이고 공기가 달라지면 사람들은 한 해의 마지막을 입에 올리기 시작한다. 월이 바뀌지도 않았고 단지 기온이 꺾였을 뿐임에도 벌써 송년회를 준비할 듯이 말이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최악이라 할 만한 하루들도 많았다. 이대로 땅이 꺼져버렸으면 싶은 날들, 이렇게까지 나를 몰아붙이나 싶어 원망스러운 날들이 있었다.

영화 속 서촌의 풍경은 빛과 그림자가 반복되거나 어지러이 엉켜 있다. 빛이 드는 날도 그림자가 지는 날도 있지만 멀리서 보면 아롱거리는 빛의 무리가 예쁘게 얼룩져 반짝이는 게 한 해라는 생각을 해봤다. 영화는 진작 다 보았지만 여전히 길을 걷는 듯한 기분이다. 영화를 본 뒤로는 쭉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입니다. 주인공은 행복해질 거예요."를 되뇌게 된다. 마치 누군가 내게 남긴 선물처럼 며칠을 내내 어루만지게 될 것만 같다.

/전이섬 작가 (마산영화구락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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