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지지 않은 경남 가야유적을 찾아서 (25) 창녕 퇴천리 토기 가마터

국립진주박물관 1992년 지표조사서 첫 확인
길이만 15.7m...보존 상태 온전한 상태로 발견

큰 항아리 최대 12개 동시 제작 가능 추정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후반 가마 사용된 듯

10여 회 보수하며 가마 고쳐 쓴 흔적 고스란히
가마 천정부 안 가야인 손바닥 자국도 남아

조사 후 훼손 막고자 흙으로 다시 덮인 유적
창녕군 추가 조사 진행 후 보존 방안 짜기로
주민들 "유적인 줄 몰랐다...문화재 보존을"

후기 가야 때 창녕지역에 있던 가야 세력은 대가야·소가야·다라국·기문국 등과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으로 대표되는 비화가야는 이들 세력 가운데서도 합천 다라국과 관계가 긴밀했다.

돈독한 사이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지리적 이점이 컸다. 로만글라스와 금동제 장신구 등 신라에서 다라국으로 건너간 많은 유물이 창녕을 거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당대 가야인들은 토평천과 창녕천 물길을 따라 낙동강 본류에 이른 다음 황강을 타고 교류했다.

창녕 퇴천리 토기 가마터 원경. 이 유적은 경남도 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창녕 퇴천리 토기 가마터 원경. 이 유적은 경남도 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창녕에서 만들어진 토기 등 비화가야 유물은 다라국을 포함해 그 밖의 나라에도 전해졌다. 그때 그 토기를 생산하던 시설이 지역에 있다. 창녕읍 퇴천리에 퇴천리 토기 가마터라는 이름이 붙은 국내 최대 규모 가야토기 생산시설이다. 일자 형태로 길게 조성돼있는 이 가마는 출토유물을 볼 때 주로 큰 항아리(대호)를 만들던 시설로 추정된다.

가마 전체 규모는 길이 15.7m, 너비 2.3m, 깊이 2.3m다.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에서 출토된 대호 크기인 가로 70㎝ 내외, 세로 70~80㎝ 내외 큰 항아리를 이 유적에서 만든다고 가정하면, 한 번에 최대 12개를 제작할 수 있는 규모다.

창녕 퇴천리 토기 가마터 내부 전경.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창녕 퇴천리 토기 가마터 내부 전경.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퇴천리 토기 가마터는 1992년 12월 국립진주박물관에 의해 최초 보고됐다. 박물관이 유적 지표조사를벌여 퇴천리 토기 가마터 존재를 발견하면서다.

시굴과 발굴이 이뤄진 건 한참 뒤다. 2000년대에 들어선 뒤에야 처음 진행됐다. 2019년 3~5월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이하 연구원)이 창녕군 의뢰를 받아 지표조사와 시·발굴조사를 했고, 그 과정에서 대형 토기가마 1기가 나왔다.

창녕 퇴천리 토기 가마터 발굴조사 과정에서 촬영된 전경.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창녕 퇴천리 토기 가마터 발굴조사 과정에서 촬영된 전경.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흙을 채취하는 데 쓰인 토취장, 토기를 만들면서 생긴 토기나 재 등 여러 폐기물을 쌓아두는 폐기장, 배수로로 쓰인 구덩이 등도 발견됐다. 토기 가마는 가마 내부 연기가 배출되는 공간(연도부)과 토기를 굽는 공간(소성부), 땔감을 넣고 불을 지피는 공간(연소부), 연소부 입구 부분으로 아궁이 역할을 하는 공간(화구)으로 구성된 상태로 확인됐다.

보존상태가 양호했다. 천장 두께는 국내 토기 가마 중 최대 수준인 130㎝였다. 앞서 조사됐던 토기 가마들의 두께(20㎝ 내외)와 비교하면 규모가 컸다. 다른 곳보다도 두께감이 있다는 건 퇴천리 토기 가마가 오랜 기간 지속해서 사용돼왔다는 뜻이다. 이 정도 두께를 가진 국내 토기 가마는 이곳이 유일하다.

퇴천리 토기 가마터 천정부 안쪽에는 보수 흔적이 다수 남아있다. 가야인들의 손자국도 찍혀있다.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퇴천리 토기 가마터 천정부 안쪽에는 보수 흔적이 다수 남아있다. 가야인들의 손자국도 찍혀있다.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유적에서는 가야인들이 지속해서 보수하며 연소부 규모를 축소·재사용한 사실도 파악된다. 실제로 가마 천장 내부에서는 10여 차례에 걸쳐 손으로 보수한 흔적이 있다. 가야인들이 가마를 고쳐 쓰면서 흙과 함께 첨가한 짚과, 당시 보수한 사람들의 손자국도 천장 곳곳에 남아있다.

창녕 퇴천리 토기 가마터 내부.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창녕 퇴천리 토기 가마터 내부.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창녕 퇴천리 토기 가마터 출토 유물.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창녕 퇴천리 토기 가마터 출토 유물.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가마와 폐기장 안에서는 조각난 큰 항아리, 목 짧은 항아리(단경호), 그릇받침(기대), 굽다리접시(고배) 등이 나왔다. 유물로 비춰볼 때 가마가 사용되던 시기는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창녕지역에서 확인된 삼국시대 토기 가마터 추정 유적은 퇴천리 토기 가마터를 비롯해 여초리 토기 가마터 가·나구간, 외부리 바깥가마실 토기 가마터, 외부리 평동토기 가마터, 퇴천리 거울내 토기 가마터 등 6곳이다. 이 유적들은 모두 창녕읍에 흐르는 용석천을 따라 반경 4㎞ 이내에 집중분포한다. 계성리 유적 토기 가마를 제외하면 모두 대규모 생산시설로 추정된다.

창녕 토기 가마터 분포도.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창녕 토기 가마터 분포도.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보수로 생긴 가마 구조변화를 함께 파악할 수 있는 유적이라 가치가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3년 전 토기 가마터를 조사했던 김정호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조사과장은 “창녕지역 가야의 공인 집단이 하천 일대에 분포했다는 걸 보여주는 유적이 퇴천리 토기 가마터”라면서 “가마터는 주변에 땔감이나 물, 진흙과 같은 여러 재료를 구할 수 있는 곳이어야 만들어질 수 있는데, 주변에 보면 나무도 많고 강도 있고 평지도 있는 구조여서 입지적으로 가마터가 들어서기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토기 가마터가 비화가야 중심지이자 토기생산 중심지에 있다고 밝혔다. 또 고분은 사후 세계를 보여주지만, 토기 가마 유적은 고대인들의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거라 의미가 남다르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곳 규모가 거대한 이유는 큰 항아리를 만들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을 것”이라면서 “가마 벽체를 분석해보니 가마 안 온도가 1400도 이상 올라갈 정도로 고온 제작이 가능했다. 자체 기술력은 함안지역보다 우월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분석했다.

지난 25일 찾은 창녕 퇴천리 토기 가마터 전경. 풀이 우거져 있다. 주변에는 민묘와 과수원 등이 조성돼 있다. /최석환 기자
지난 25일 찾은 창녕 퇴천리 토기 가마터 앞 일대 전경. /최석환 기자

지난 25일에 찾은 퇴천리 토기 가마터는 발굴조사 이후 흙으로 뒤덮인 상태였다. 유적 훼손을 막고자 흙을 덮은 것이다. 그 위로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어 유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기 어려웠다. 일대에는 민묘가 만들어져 있었다. 가마터 맨 밑자락과 맞닿은 곳에는 울타리와 함께 과수원이 조성돼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동네에 유적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다가 지난 조사 이후 처음 알게 됐다고 밝혔다. 황창석(69) 퇴천마을 이장은 “토박이인 나도 토기 가마터가 있다는 걸 모르고 지내다가 최근에야 알게 됐다”며 “문화재가 있는 그 산은 어릴 때부터 주민들이 쇠꼴 먹이던 데라 사람 왕래가 잦던 곳이었다”고 말했다. 토기 가마터 앞에서 농기계 창고를 운영하는 한 주민은 “바로 앞에 유적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며 “일반 야산인 줄로만 알던 곳이었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어른들에게 토기 가마터가 마을에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 없이 자랐다는 주민도 있었다. 최충길(78) 퇴천마을 전 이장은 “발굴조사할 무렵에야 처음 유적 존재를 알게 됐는데, 전혀 생각지 못한 장소에 문화재가 있다고 하니 신기할 따름”이라며 “이왕 발견된 거 잘 관리될 수 있으면 좋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창녕군은 이전까지 확인된 적 없던 중요한 유적이 지역에 있는 만큼 추후 추가 조사를 진행할 계획이다. 뒤이어 나온 조사 결과를 본 뒤 문화재 지정범위를 넓혀나가기 위한 절차를 밟는 것도 검토해볼 예정이다. 최영준 군 학예연구사는 “구체적인 일정이 잡혀 있진 않지만, 나중에 조사를 더 진행할 생각이다”라면서 “이후 보존방안도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최석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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