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장 형성 전 들어선 쌀 집
19살 결혼과 동시에 장사 시작
국내산 쌀과 20여 종류 곡물 판매
세월 흐름 속 찾는 발길 줄어도
땀 흘려 일한 가치 지키며 버텨

"대형마트 들어섰지, 사람(인구) 줄었지, 집에서 요리해 먹는 사람 없지…. 장사 안된다, 안 돼."

양경자(62) 씨는 본가가 고성군이다. 19살 때 진주에서 결혼했다. 그와 동시에 진주 자유시장 '동부쌀집'에서 일했다. 동부쌀집은 자유시장이 들어서기 전부터 자리 잡고 있었다. 양 씨 시아버지가 시청 뒤편 자유시장 들어서는 길목에 작은 건물을 세웠다. 그때가 1978년이었다. 그리고 양 씨가 지금까지 동부쌀집을 지키고 있다.

동부쌀집은 국내산 쌀과 곡물을 판다. 20여 종류 곡물이 매대에 놓여있다. 참기름·들기름을 파는데 국내산 참깨는 기름이 많이 안 나온다. 명절 전 고춧가루를 빻으려는 손님이 늘기는 한다. 

여름철이라 콩가루와 미숫가루도 내놓았다. 콩가루는 흰콩(백태)을 볶고 간다. 한 봉지에 5000원. 얼음물에 풀어 국수랑 먹으면 여름 별미다. 콩가루는 곱고 뽀얗다. 미숫가루도 직접 취급하는 곡물 9가지를 볶고 갈아 내놓는다.

주력 상품은 쌀이다. 지금은 20㎏ 한 포대에 5만 5000원이다. 지난해보다 1만 원 하락했다. 

요즘은 시장을 찾는 발길이 줄었지만 잘 되던 시기가 있었다. 쌀을 팔려면 허가가 필요했다. 양 씨 시아버지가 당시 20만 원 넘는 허가증을 얻어 장사했다. 자유시장 개장 초기에는 쌀집이 거의 없었다. 

수요 많을 때는 쌀 한 포대가 80㎏이었다. 한 차에 실려와 가게 안에 가득 쌓였다. 어느 순간 한 포대 무게가 60㎏에서 40㎏으로 줄더니 이제는 20㎏이다. 그마저도 줄어들 것 같다. 양 씨 처지에선 기가 찰 노릇이다. 하지만 안 사가는 걸 어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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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씨는 이렇게 내뱉었다. "이제는 어디서든 다 팔어. 대목이면 전부 쌀·곡물을 내놓잖아. 그리고 요새 가족 한두 명인 집은 요리도 안 해 먹잖아. 간단하게 사서 먹고 말지. 대형마트 한번 가면 굳이 필요 없는 것까지 왕창 사서들 오고…."  

40년 다 된 단골손님도 있었다. 하지만 주변에 큰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이리저리 흩어졌다. 이제는 특별히 기억에 남는 손님도, 나쁘게 했던 손님도 없는 것만 같다.

양 씨는 남편과 장사를 오래했다. 남편은 이날 가게에 없었다. 허리·어깨 등 안 아픈 곳이 없다. 수술하고서 집에서 지내고 있다. 양 씨 남편은 키도 체구도 작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 사람이 쌀 배달을 했다. 80㎏ 쌀 한 포대를 들고 승강기도 없는 건물을 올랐다. 어깨에 이고서 손님 쌀독에 직접 부어줬다. 이때 남편 어깨가 많이 상했다. 

양 씨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땐 왜 그렇게 일했나 몰라. 나이 들면 골병들 걸 알았는데도 말이야. 그래도 그렇게 일할 수밖에 없었어…."

양 씨 손은 원래 작고 고왔다. 이제는 손가락마다 관절이 툭툭 튀어나왔다. 허리도 어깨도 예전 같지 않다. 

"내 손 좀 봐.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이렇게 상했어. 살도 너무 많이 빠졌고…."

그럼에도 가게를 접을 생각은 없다. 동부쌀집은 양 씨 삶의 터전이다. 40년 넘게 빚지지 않고 정직히 살게 해줬다. 양 씨가 선풍기 한 대로 여름을 나며 자리를 지키는 이유다. 

/주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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