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외침, 메이데이 (6) 트라우마도 '산재'입니다

생계 문제·회사 종용 등 이유
트라우마 산재 신청자는 저조

매년 2000명 넘는 노동자가 일하다 죽는다. 산업재해는 부상자와 사망자만 낳는 게 아니다. 중대재해 목격자는 트라우마를 겪는다. 2013년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가 업무상 질병으로 추가됐지만, 신청자 수는 적다.

2017년 5월 1일, 거제 앞바다에서 대형 크레인이 부딪쳐 무너졌다. 6명이 숨지고, 25명이 다쳤다. 목격자만 1000명이 넘는 중대재해였다. 스스로 산재 적용 대상자가 되는지 모르는 목격자가 허다했다. 거리가 멀거나, 당장 생계가 급하거나, 회사에서 종용하거나. 여러 이유로 산재 입증이 어려워 포기한 이도 많았다.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로 겪는 트라우마를 산재로 인정받은 사람은 단 13명에 그친다.

◇드러나지 않는 피해자 =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로 죽거나 다친 사람도 있잖아요. 제가 처음에 가장 힘들었던 건 다친 데도 없는데 나는 왜 정신병에 걸렸나 싶은 거예요. 이런 저를 보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많이 무서웠어요."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 현장에 있었던 한 노동자의 말처럼 중대재해 목격자는 죄책감, 불안을 안고 살면서도 속내를 드러내길 꺼린다. 때문에 산재 트라우마 피해자들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사고 이후 경남근로자건강센터와 고용노동부 통영지청 등은 사고 목격자를 상대로 전화 설문과 사건충격척도(IES-r) 조사를 진행했다. 사고 당시 현장에서 일한 노동자 1810명이 대상이었다. 2차 조사에서 671명이 응답했는데, 115명(17.1%)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위험군으로 분류됐다.

위험군은 불면증, 두근거림, 집중력 저하, 기억력 감퇴 등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을 드러냈다. 이들은 안전하지 못한 작업환경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에 분노하거나,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숨진 동료를 떠올리면서 그리움과 우울감에 빠지기도 했다.

 

중대산업재해 사고 목격 후
두근거림·집중력 저하 등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세도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 트라우마 첫 조사는 사고 발생 42일이 지난 6월 12일에 이뤄졌으며, 위험군 심리상담은 11월에나 이뤄졌다. 이은주 마산창원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 상임활동가는 "사고 조사가 대책 마련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중대재해 목격자에게 치유를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걸 확인하는 일에서 그쳤다"고 꼬집었다.

◇험난한 산재 신청 과정 = 이 상임활동가는 사고 발생 이후 트라우마 관리 공백기가 생겼으며, 이 과정에서 다수의 확인되지 못한 피해 노동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트라우마 실태 조사 대상자는 1810명이었으나 설문조사에는 671명만이 응답했다.

산재 신청 과정도 험난했다. 먼저 정신과 심리검사로 트라우마 진단을 받아야 했다. 생계 문제로 치료받기 힘든 노동자가 많았다. 현장에 있던 노동자 대다수가 단기고용 상태로 불안정한 고용 형태에 시달리고 있었다.

산재 지정 병원이 거제에 없다는 물리적 한계도 치료 접근성을 떨어트렸다. 공간이 없어 트라우마 피해 노동자들은 삼성중공업에서 상담받아야 했다. 이 사실에 거부감을 드러내는 노동자도 있었다.

이 상임활동가는 "트라우마 피해 노동자에게 전화를 돌리면서 '왜 이제야 하느냐', '정작 필요할 땐 왜 안 해줬느냐', '어떻게 보장해줄 거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며 "트라우마 관련 논의를 시작한 건 의미가 있으나 사고 조사 방식과 시기 모든 게 문제가 됐다"고 지적했다.

"조선소 하청노동자는 주거지가 아니라 일거리를 따라 이동하기 때문에 이미 거제를 떠난 사람이 많았어요. 회사는 정신적으로 문제없다고 말하라면서 종용했죠. 그렇지 않으면 블랙리스트에 올라 일거리를 얻을 수 없으니까 노동자는 트라우마 산재 신청을 할 수 없었습니다. 산재를 신청하더라도 과연 이게 받아들여질까 두려워서 포기하는 노동자도 있었고요."

트라우마 산재를 인정받은 노동자는 2년 동안 약물 중심 치료를 받았으며, 산재 종결 이후 4년간 약제비만 보장됐다.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 피해자 김영환(41) 씨는 "산재 승인이 날 때까지 사비를 들여서 치료받았다"며 "산재 인정을 받고 나서는 얼마 없는 지정 병원을 찾아다녀야 했는데 병원에 가서도 5분이 안 걸리는 간단한 진료만 받았다"고 토로했다.

▲ /일러스트 서동진 기자 sdj1976@idomin.com
▲ /일러스트 서동진 기자 sdj1976@idomin.com

트라우마 치료 과정에서 상처를 받은 적도 많았다. 김 씨는 "근로복지공단이 노동자를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니라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느냐면서 보험회사처럼 우리를 대했다"며 "트라우마 연장 여부는 우리와 논의해야 하는데 일방적으로 취소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고 고백했다.

◇어떻게 치료해야 하나 = "트라우마는 약물치료가 가지는 한계가 뚜렷해요.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더 나아가기 힘들다는 거죠. 상처가 크다면 약과 상담, 각종 운동 요법 등이 동시에 이뤄지는 게 가장 이상적이죠."

손창호 인권의학연구소 이사(정신의학과 전문의)는 "트라우마를 종합적으로 치료해줄 기관도 없고 의료진 역량도 부족하다"며 "환자가 약물치료를 갔다가 필요하면 상담을 받는 등 치료 방법을 스스로 적절히 조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산재를 경험하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노동자는 생계 때문에 현장을 떠날 수 없어서 더 괴롭다. 트라우마를 재경험할 수 있는 환경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셈이다.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 피해자들은 크레인만 봐도 두려워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여전히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산업 현장에서 일한다.

특히 산 자와 죽은 자로 나뉘는 중대재해 현장에서 죄책감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산재 입증이 어렵고, 가해자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 자책에 빠지기 쉽다.

박철희(51) 씨는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에서 친동생을 잃었다. 그는 "그때 휴대전화 시계가 고장 났더라면, 내가 동생에게 일하러 가지 말자고 그럴 걸 그랬다고 자주 생각했다"며 "이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인 거 같다"고 말했다.

◇"트라우마 사건에 의미가 부여돼야" = 산재 책임 입증, 보상 절차, 치료 방식 등 구조적 문제도 해결돼야 하지만 피해자를 바라보는 '사회적 공감대'도 형성돼야 한다. 손 이사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책임 규명과 사과'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는 "가해자가 가해 원인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건 피해자 죄책감을 상쇄시켜준다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손 이사는 트라우마 사건에 의미가 정확히 부여되는 것이 피해자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내가 이 고통을 겪으면서 공동체에 기여나 변화를 이끌어 냈다는 게 있으면 좋죠. 예를 들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한국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일에 도움이 됐다거나, 태안화력발전소 김용균 씨 희생으로 더욱 안전한 산업환경으로 변화됐다거나. 내가 겪은 희생에 의미가 부여될 때 고통에 가치가 생기기도 하죠. 사회적, 역사적 의미가 부여되면 치유에도 도움이 되는 거죠. 그런 점에서 가해자 규명이나 사과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삼성중공업에 잘못이 없다는 재판부의 판단은 트라우마 피해자를 더 아프게 만들었다. 삼성중공업 전현직 직원과 협력업체 대표, 직원 15명이 업무상 과실치사상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창원지법 통영지원은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 관계자 7명에 한해서 금고형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삼성중공업에는 죄를 묻지 않았다.

2심에서 원심이 깨졌다.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 관계자 4명이 금고형 또는 벌금형을 받게 됐다. 대법원에서는 파기 환송 결정이 나왔다. 재판부는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서 비슷한 사고가 잇따라 일어났고, 삼성중공업이 합리적 수준의 안전조치를 취할 의무가 있다고 내다봤다.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 파기 환송심은 26일 열릴 예정이다.

/김다솜 최환석 기자 all@ido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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