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 지속 괴롭힘 한순간 무너진 삶
혼자 견디던 피해자에 손 내민 상담소
진정성 있는 위로…의료·법률 지원도
일상 향해 차근차근 발 내딛게 도와줘
"혼자가 아니라는 점 항상 상기시켜
행동하고 해결해 나가야 진심 전달"

집주인에게 지속적인 괴롭힘과 성폭력을 경험한 이민지(가명) 씨는 진주성폭력상담소의 문을 두드렸다. 성폭력상담소는 상담과 의료, 법률적 지원 등을 하면서 성폭력 피해자를 위해 일하는 곳이다. 서로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면서 성평등한 세상을 만들어 가겠다는 게 이들의 목표다. 민지 씨는 진주성폭력상담소 김미정(48) 상담원을 만나 일상을 향해 차근차근 발을 내디디고 있다. 성폭력상담소를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민지 씨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모든 게 끝났겠죠"라고 답했다.

성폭력상담소와 활동가들이 없었더라면 이 세상의 수많은 미투들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미투를 넘어 위드유까지 끌고 온 건 이들 덕이 크다.

"아마 가해자에게 계속 괴롭힘을 당했을 거예요.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옆에서 저를 도와주시니까 사는 거죠. 사실 사회 나와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받기 힘들잖아요. 김미정 선생님이 제 마음속 지주가 되어 주셨어요. 그래서 지금 떳떳하게 살 수 있는 거 같아요." 삶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던 그를 일으켜 세운 건 김미정 상담원이었다. 늘 그렇듯 이번에도 김 상담원이 이 씨 손을 꼭 붙잡았다. 두 사람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차분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 김미정(오른쪽) 진주성폭력상담소 상담원이 성폭력 피해자 민지 씨와 손을 맞잡고 눈을 맞추고 있다.   /김다솜 기자
▲ 김미정(오른쪽) 진주성폭력상담소 상담원이 성폭력 피해자 민지 씨와 손을 맞잡고 눈을 맞추고 있다. /김다솜 기자

◇갑자기 무너진 삶 =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누군들 하루아침에 성폭력 피해자가 될 줄 알았을까. 민지 씨는 성폭력 피해자였다. 가해자는 다름 아닌 집주인이었다.

2020년 가을, 그는 건강이 나빠져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쉬고 있었다. 가끔 환기를 하려고 현관문을 살짝 열어두면 틈새로 가해자 얼굴이 보였다. 가해자는 갈수록 과감하게 행동했다.

허락 없이 집 안으로 들어와 누워 있는가 하면 휴대전화로 음란물을 보내고, 불쾌한 말을 던지면서 만남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언제 가해자가 찾아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민지 씨의 밤은 길어져만 갔다. 평화롭던 일상은 사라지고, 갑자기 삶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몇 달 동안 혼자서 앓기만 했다. 혼자서는 도무지 견딜 수 없던 어느 날이었다. 민지 씨는 "누군가에게 성폭력 피해 사실을 알릴 수도 없어서 혼자 삭이기가 너무 힘들었고, 불안했다"고 심경을 전했다. 급한 대로 114로 전화를 걸었다. 성폭력을 당했다는 말에 진주성폭력상담소로 전화가 연결됐다. 그렇게 민지 씨는 2021년 2월 8일 김 상담원과 만나게 됐다.

두 사람은 시청과 경찰서, 법원을 오가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번에는 가해자인 집주인 아들이 민지 씨를 험담하면서 못살게 굴었다. 이사가 시급했다. 김 상담원은 민지 씨 대신 근로부 조건 기초생활수급자 기간을 늘려주고, 신변 보호 요청을 하는 등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길을 찾아줬다.

◇유일한 민지 씨 편 = "가해자 아들이 나를 찾아와서 몰아붙이기도 했어요. 우리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당신이 잘못한 거라고. 동네에다 악의적으로 이상한 소문까지 퍼트렸죠. 다른 사람들이 피해자인 나를 가해자 취급을 할 때 선생님이 용기를 주셨어요. 그 사람들이 나쁘지, 민지 씨 잘못이 아니다. 나는 같은 편이다. 그런 얘기들…."

모든 일이 순탄하게 흘러가진 않았다. 그럴 때마다 진주성폭력상담소가 도움을 줬다. 민지 씨의 유일한 편이었다. 민지 씨는 진주성폭력상담소에서 제 일처럼 해결해줬기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말한다. 성폭력 피해자 혼자서 싸우기엔 세상이 녹록지 않다.

4시간 동안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민지 씨는 "내가 피해자인데 범죄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며 "내 행동을 왜 이해시켜야 하고, 설명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더라"고 토로했다.

검찰 조사를 받고 돌아와서도 김 상담원이 이 씨를 위로했다.

국선 변호사가 배정됐지만, 진정성 있게 사건을 담당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모습도 없었다. 김 상담원은 검찰에 변호사 변경을 요청하고, 진정서를 넣었다. 그렇게 비게 된 국선 변호사 자리에는 다른 변호사를 구해 무료 변론을 부탁했다.

가까스로 변호사도 구했지만, 산 넘어 산이었다. 사건이 일어나고 꼭 1년째 되던 10월에야 검찰 수사 결과가 나왔다. 약식 명령이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한 사건을 재판도 제대로 치르지 않는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 김 상담원이 진술서 공개 요청을 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판사가 다시 사건을 훑었고, 검찰로 사건을 되돌려 보냈다. 검찰이 다시 사건을 수사하고 나면 재판이 열린다. 진주성폭력상담소는 지난 1년 동안 민지 씨를 향해 쏟아진 2차 가해도 문제 삼아 법의 심판을 받게 할 계획이다. 25일 오전에 첫 재판이 열렸다.

"피해자에게 우리가 마지막 한 사람일 수도 있거든요. 유일하기도 하고. '저는 같은 편이에요', '도움이 될 거예요' 말만 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직접 행동해야 진심이 전달되고, 피해자도 다시 일어설 수 있어요."

▲ 성폭력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말하자 손을 꼭 잡아주고 있는 김미정 상담원.
▲ 성폭력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말하자 손을 꼭 잡아주고 있는 김미정 상담원.

◇언제나 피해자 곁에서 = 원래 금융기관에서 일하던 김 상담원은 결혼을 하면서 일을 쉬었다. 인권에 관심을 두고 공부를 이어가다 2013년 성폭력 상담원 전문 양성 과정을 듣고, 여성 분야까지 이르게 된다. 정식 상담원으로 일하게 된 건 2019년부터다.

김 상담원은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나,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삶을 망가뜨릴 수 있나 하고 화를 많이 내기도 했다"며 "내가 밥 먹고 웃을 시간에 누군가는 혼자서 울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처음에는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여러 사건을 접하면서 상담원이란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고 있다. 누군가가 상담원을 믿을 수 있도록 신뢰를 주고, 함께 해결해나가는 일. 그렇게 피해자에게 다시 일상을 돌려주면서 보람도 얻는다. 그는 피해자에게 당신 잘못이 아니고, 혼자가 아니라는 점을 항상 상기시켜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3년 차 상담원이 된 지금은 마음이 많이 단단해졌다. 김 상담원은 "피해자들이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망가진 삶을 살다가 일상을 성취하는 걸 보는 게 좋다"며 "사건 이전보다 오히려 더 성장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분도 많이 봤다"고 말했다. 오늘도 김 상담원은 성폭력 피해자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진주성폭력상담소(경남 진주시 신안동 34-60번지 2층) 문의는 055-747-1366으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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