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도의회 김경영 의원

창원 서성동 성매매 집결지의 핵심이었던 우정집이 철거 중이라는 뉴스를 접한 날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이 김경영 경남도의원이었다. 성매매 집결지 문제를 끈질기게 공론화하고 해결을 촉구하여 결국은 철거까지 이르게 한 데는 어린 시절 자신이 뛰어놀던 곳, 민주화의 성지인 3.15탑 주변을 여성 유린의 현장으로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그의 노력이 한몫했다.

1963년 12월, 마산 완월동에서 태어나 무학초, 창원여중, 성지여고, 창원대 영문과를 거친 그는 삶의 모든 시간을 창원에서 보낸 토박이다. 집안 형편으로 서울로 가지 못하고 현 국립창원대학교의 전신인 마산대학에 전체 수석 입학했을 때 그가 바라는 출구는 오직 하나 자유로운 대학 생활이었다. 그래서 택한 탈춤반이었는데 전체 수석 입학자의 당시 불온 서클 탈춤반 가입은 그 자체로 화제가 되었다. 체계적인 사회과학 서적 읽기가 시작됐고 <전태일 평전>을 읽은 뒤 가슴에 불이 이는 것을 느꼈다.

▲ 김경영 도의원
▲ 김경영 도의원

그의 성장기에 10.26사태 발발과 광주 민주화 항쟁, 제5공화국 집권 등의 역사적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고 대학도 격랑에 휘말렸다. 3학년 때는 서클연합회장, 4학년 때는 총학생회 부활 운동과 함께 창원대 초대 여학생회장을 맡아 연대하고 협력하면서 사회적, 정치적 의식을 키웠다. 집에서는 공부 잘하던 딸의 변화가 당황스러웠을 터. 교내 시위 때 학교로 찾아오신 아버지께 생전 처음으로 뺨을 맞았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부모님은 교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고민 끝에 취업을 핑계로 집을 나와 '수출자유지역' 근처에 방을 얻고 노동 현장으로 들어갔다. 처음 신흥화학, 태양유전 등을 거쳐 1986년 10월 한국웨스트전기에 입사해 1995년까지 9년간 근무했다. 1987년 현장 투쟁에 나섰다가 노사협의회 노동자위원으로 선출되었는데 당시 수출자유지역은 한국 산업화의 첨병인 동시에 위장취업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곳곳에서 활동하던 비슷한 처지의 동지들이 각기 활동하다가 위장취업을 이유로 구속, 해고된 이후에야 서로를 알게 될 정도였다.

지금은 당연한 노동조합 결성이 당시로서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봉암동 중국집에서 30여 명의 노동자가 모여서 그동안 은밀하게 진행했던 노동조합 발기인대회를 열었다. 1988년 3월 27일 노동조합 결성식을 했는데 4월 19일 구사대가 떴다.

노노 분열이 격화되고 결국 회사는 2개월간 '직장폐쇄'를 했지만 이 과정에서 마창노련 연대활동과 투쟁력도 강화되었다. 직장폐쇄 기간 위장취업으로 두 번이나 연행되었는데 조합원들이 마산동부경찰서까지 달려가 석방 요구 농성도 했다. 노동 운동 중 많은 성과를 남기고 후배들의 역량 강화와 진보의 더 큰 전진을 위해 그는 스스로 노동현장을 떠났다.

 

여성 처우 개선·인권 증진 앞장
2018년 비례대표로 정치 입문
성·인간평등 경남 만들기 중점

 

그는 1999년 경남여성회 사무국장으로 본격적인 여성운동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이후 마산여성회장, 경남여성회 대표, 경남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 등을 거쳐 여성계에서 입지를 다졌고 2018년 지방의회 선거에 비례대표로 도전하여 당선, 도의원 배지를 달았다. 여성 비례대표인 그에게 여성단체들의 기대치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여성시설 종사자 처우 개선, 성폭력, 가정 폭력, 성매매 여성 문제 등에 특히 관심을 기울이고 경남여성가족재단 설립에도 힘썼다. 전국 최초로 도민여성의회를 열어 여성의 목소리를 도민들에게 전했고 하동화력발전소 인근 명덕마을 주민들과 함께 환경피해문제와 이주문제 해결에 힘써 주민들로부터 감사패도 받았다.

우리 지역 곳곳에 공공 무료 와이파이를 깔고, 작은 도서관을 지원하여 주민들의 사랑방이 되도록 하고 문화예술인 복지 향상과 생활 체육, 복지 영역 전반에서 막힌 문제를 해결했다.

하루에도 수많은 일정을 소화하면서 그는 오늘도 분주하게 성 평등, 인간평등의 경남을 꿈꾼다. 현재 경남도의회 내 여성의원은 8명, 비율로는 13.8%이다. 개개인으로 매우 뛰어난 역량을 지닌 여성의원들의 힘을 모으고 세력화해서 의회 내 자치분권을 강화하겠다는 그의 꿈이 이뤄지는 날이 머지않기를 바란다.

 

◇경남도의회 이옥선 의원

일 잘하는 의원이라는 말은 그에게 가장 많이 따라다니는 수식어이다. 그 결과 '2021년 전국지방의원 풀뿌리 의정대상'에서 복지 분야 최우수상 수상의 쾌거를 이루었다. 시의원 때 신마산 댓거리 지역에서 출발, 도의원이 되면서 삼진·구산면으로까지 지역구를 넓히게 된 이후, 더욱 바빠졌지만 여전히 일 잘하는 의원이라는 데에는 비록 정치적 성향을 달리하는 이라 해도 이견이 없다.

그는 1964년 마산 홍문동에서 출생해 월포초와 의신여중, 제일여고, 덕성여대 약대를 다녔다. 물리학에 관심이 많았으나 부모님의 권유로 약대로 진학했던 모범생은 격랑의 80년대에 대학에서 학생운동에 뛰어들어 사회의 부조리에 눈을 뜬다. 결국 대학을 포기하고 노동현장으로 갔다. 전자, 가구, 제약회사 등의 노동자를 거쳐 노동상담소에서 실무자로 노동운동과 지역운동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 진보정당 추진위원회 실무자로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 이옥선 도의원
▲ 이옥선 도의원

다시 마산으로 내려온 것은 1990년, 당시 소련이 붕괴하고 세계의 질서는 급속히 바뀌었다. 고향으로 와서 새로운 역할을 모색하던 그는 고 이경숙 선생과 가톨릭 상담소에서 실무자로 노동상담, 연대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진보정당을 창당하고 실무 활동을 하면서 정치와 노동의 결합을 모색했다.

그는 보다 나은 선택을 고민하다가 대학에 복학해 학업을 마치고 서울에서 잠시 생활하다 마산으로 내려와 약국을 운영하며 진보의 길을 걸었다. 2006년 지방선거 비례대표 출마 권유를 받고 고민했다. 결국 진보의 가치를 위해 기꺼이 광야의 삶도 견뎌야 한다는 마음으로 나섰다. 당시 워낙 진보의 바람이 거세던 시기라 덜컥 당선됐고 이후 그의 삶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시의원에 당선된 뒤는 철저히 시민 우선의 삶을 살았다. 시민의 불편이 있는 곳은 남 먼저 달려갔고 문제를 앞장서서 해결했다. 그러다보니 유권자들로부터 인정을 받아 이후 지역구에 출마해 내리 두 번 당선되어 3선의 시의원이 됐다. 정치의 격랑 속 당의 이름이 바뀌긴 했지만 초심을 잃지 않았고 결국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창원시의회 경제복지위원장을 맡아서 실력을 입증했다.

2018년에는 정치적 지형을 확대해서 도의원으로 출마했다. 이때도 시의원 출마 당시 못지않게 큰 고민이 있었다. 지역의 보수적 성향과 현실정치에 대한 고민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결국 개혁 진보에 힘을 보태겠다는 마음으로 그해 2월 민주당원이 되어 도의원에 출마했다.

 

진보정당 추진위 등 정치활동
3선 시의원 지낸 뒤 도의원으로
시민 생활밀착 의정활동 집중

 

창원시 전체 선거구 중 가장 늦게까지 당선자가 결정되지 않을 정도의 접전 끝에 보수의 텃밭에서 귀한 승리를 이룬 것은 그동안 묵묵하고 성실히 일해 온 공을 도민들이 인정한 덕분이었다. 당선 뒤 곧바로 도의회 기획행정위원장까지 맡게 되었으니 일복을 타고났다. 그는 균형과 조화, 협력을 중시한다. 유권자들도 공무원들도 한결같이 열린 마음으로 대했기에 기꺼이 시민과 행정의 중간자로 역할 할 수 있었고 시민뿐만 아니라 공무원들에게도 신망이 높다. 그는 시민 밀착형 숙제를 잘 해결한다. 전국 최초로 도시생태농업 지원에 관한 조례 제정, 빈집정비 지원조례 등을 제정하고, 합포스포츠센터 민간위탁에 반대하여 공단위탁을 위해 노력하는 등 주민들의 생활과 필요에 다가가는 활동을 해왔다. 가임여성 수영장 사용료 할인, 보훈단체 수당 지원대상 확대 등 실질적인 지원에도 관심을 기울여왔다. 또한 지역 언론 지원과 로봇랜드 정상화 등 지역의 굵직한 문제 해결에도 힘을 보태왔으며, 현재는 마창대교 통행료 인하를 위한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그는 권력은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이라는 생각이 확고하다.

정치의 길로 들어선 지 벌써 16년, 4선의 관록을 지녔지만 주민들에 대한 책임감과 연대의식이 그를 지탱하는 절대적인 힘이다. 약으로 사람들의 건강을 지켰던 그는 이제 정치로 주민의 삶을 지키는 든든한 파수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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