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
적탄 맞아 숨 거둔 이순신 장군
시신 처음 뭍에 오른 관음포에
남해 사람 힘 모아 전적비 세워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정한 2022년 남해군 방문의 해가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남해군은 그동안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 경상남도의 지원 아래 찾아오는 탐방객과 관광객을 늘리고자 지역을 갈고닦으면서 널리 알리는 활동을 펼쳐 왔다.

경남도민일보는 이를 응원하는 뜻으로 연말을 맞아 '내년에 남해로 오시다' 짧은 기획을 마련했다. 이미 잘 알려진 것도 좋지만 그 속에서 즐길 수 있는 작고 소소한 것들을 좀 더 찾아보고자 한다.

◇노량해전이 벌어진 관음포 앞바다

남해 하면 곳곳에 숨어 있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역사의 풍랑이 거셌던 데이기도 하다. 430년 전 백성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던 임진왜란의 마지막 끝자락 회오리가 남해를 몰아쳤다. 하동에서 남해대교와 노량대교를 건너면 노량마을이 나타난다. 노량은 1598년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가 치러진 곳으로 이순신 장군이 적탄에 맞아 숨을 거둔 곳이다.

▲ 첨망대에서 바라본 관음포 앞바다. <br /><br />
▲ 첨망대에서 바라본 관음포 앞바다. /김훤주 기자

왜적은 전선 500척에 병력 6만 명이었고 조명 연합 수군은 전선 150척에 병력은 2만 명 정도였다. 1598년 11월 18일 밤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왜적은 전선 450척이 불타고 깨지는 참패를 당한 끝에 허겁지겁 일본으로 달아났다. 이순신 장군은 이튿날 새벽 적탄에 맞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노량해전은 어쩌면 왜적에게 일본으로 돌아가는 퇴로를 열어주기만 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전투였다. 그랬다면 이순신 장군이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장군은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의 요청까지 뿌리치고 단호하게 마지막 전투에 나섰다.

◇장군의 시신이 뭍에 오른 이락포

장군의 시신이 처음 뭍에 오른 자리가 바로 관음포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234년 만인 1832년에 제단을 만들고 유허비를 세웠다. 한글로 새겨진 '리충무공전적비'도 있는데 6.25전쟁이 한창일 때 남해 사람들이 힘을 모아 세운 비석이다.

이락포라고도 하는데 이순신의 '이(李)'와 떨어질 '락(落)'을 쓴다. 여기서 솔숲을 500m 정도 오르면 첨망대가 나온다. 해 질 무렵 첨망대에 오르면 앞바다가 노을을 받아 온통 붉은빛이다. 430년 전 그날 피로 물든 바로 그 바다다.

▲ 노량해전을 3D영상으로 볼 수 있는 이순신영상관.   /김훤주 기자
▲ 노량해전을 3D영상으로 볼 수 있는 이순신영상관. /김훤주 기자

옆에는 이순신순국공원이 있는데 호국광장과 관음포광장으로 나누어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시설을 갖추었다. 이순신영상관에서는 노량해전을 3D 영상으로 보여준다. 관음포를 찾는 사람들 발길이 여기서 그치는 경우가 많지만 뜻있는 이들은 첨망대까지 걸음을 옮긴다.

◇장군의 가묘를 썼던 충렬사

장군의 시신은 노량나루 근처 지금 충렬사 자리에 잠깐 머물렀다. 지금도 사당 뒤편에 가묘가 남아 있는데 그러다 수군 본영이 있던 전남 완도군 고금도로 옮겨진 다음 본가가 있는 충남 아산에 묻혔다.

▲ 남해 충렬사 들머리에 있는 한글 비석.
▲ 남해 충렬사 들머리에 있는 한글 비석. "로량 바다는 이충무공 전사하신 데라 여긔에 사당을 세우니라"라고 적혀 있다.
▲ 남해 충렬사 사당 뒤편에 남아 있는 이순신 장군의 가묘.
▲ 남해 충렬사 사당 뒤편에 남아 있는 이순신 장군의 가묘.

충렬사는 1632년 처음 지어질 때는 조그만 띠집이었다. 조정에서 베푸는 공식 이전 이전에 남해 사람 김여빈과 고승후가 초가 한 칸을 짓고 처음 제사를 올렸다. 조정은 1643년에 '충무공' 시호를 내렸다.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기와를 얹은 것은 다시 15년이 지난 1658년이었다. 60년이 지나서야 조정이 보살피기 시작한 셈이다. '충렬사' 현판은 그보다 늦은 1663년에 내려왔다.

충렬사 들머리에도 한글 비석이 서 있다. 해방 직후 남해군민들과 경남 지역 초등학생들이 모은 돈을 합해서 세운 것으로 이순신 장군에 대한 지역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돈독한지 알려 주고 있다.

◇고려 시대 관음포대첩과 정지석탑

관음포 앞바다에서 왜적을 물리친 역사는 고려 말기에도 있었다. 1374~1388년 모두 380차례가량 한 달에 두 번꼴로 침략했을 정도로 왜구의 준동은 극심했다. 이런 와중에 정지 장군이 등장했다.

최영 이성계와 어깨를 겨루던 당대 명장이었다. 1383년 5월에 왜구가 120척 적선을 타고 관음포로 쳐들어왔다. 정지 장군은 멀리 전라도에서 손수 노를 저으며 와서는 앞장서서 진격하고 화공을 퍼부었다. 적선 17척이 불타면서 물에 빠져 죽은 왜구 2000명가량이 바다를 덮었다.

남해 고현면 탑동마을에 가면 관음포대첩을 기리는 '정지석탑'이 세워져 있다. 마을 한가운데 시장 한 귀퉁이에 있는데 당시 백성들이 손수 깎고 다듬은 돌을 4층으로 쌓아 만들었다. 크지 않고 보잘것없지만 보노라면 당대 백성의 가슴 벅찬 감동이 느껴진다. 왜구 때문에 섬까지 비워야 했던 그들이 얼마나 기뻐하고 고마워했을지가 넉넉하게 짐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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