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주민 신고 발굴조사
5∼6세기 유력집단이 조성
시 역사문화공원 조성 추진
작년 대형 봉토분 6기 확인
문화재 지정 필요 목소리도

"여기가 움푹 파여 있네요?"

"예, 뚜껑돌을 들어내고 그 안에 있던 유물을 죄다 도굴해갔어요."

"아, 네…. 그렇군요."

"일제강점기에 죄다 도굴된 거거든요. 가야 유적을 공부하다 보면 정말 분노가 치밀어오를 때가 많아요. 어쩔 때는 욕을 하고 싶기도 하고…."

땅이 파인 이유를 설명하던 경상국립대박물관 송영진 학예연구팀장이 분노가 차오른 듯 말끝을 흐렸다.

대화 장소는 진주 가좌동고분군. 도굴과 도시개발 등의 이유가 겹쳐 파괴된 채로 남아있는 이 고분은 아파트로 둘러싸인 진주 무듬산 희망공원 언덕배기 쪽에 있었다. 1500여 년 전인 5~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고고학자 손에 의해 지표조사와 시굴조사, 발굴조사가 수차례 진행된 바 있는 가야 유적이다.

공원 표지판 부근에 있는 나무 계단을 따라 유적 방면으로 올라갔더니 송 팀장이 가리킨 고분군 주변에서 봉긋 솟은 땅이 여럿 엿보였다. 고분군 안팎으로 수풀이 뒤덮여 있었고, 그 위로는 기다란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언덕길을 지나 평평한 땅이 있는 곳까지 올라서자, 커다란 대형 고분군을 둥글게 둘러싼 경계 밧줄이 앞을 가로막았다. '이곳은 가좌동고분군이 위치한 곳으로, 발굴조사를 통해 진주지역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주는 6기의 대형 봉토분과 수십 기의 석곽묘가 조성되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문화재법에 의거해 경작 등과 같은 원형 훼손 행위를 금지하오니 유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의 팻말도 걸려 있었다. 앞서 소개한 창원 합성동 유적, 의령 경산리고분군과는 사뭇 다르게도 이곳엔 유적 훼손을 막기 위한 밧줄과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 밧줄로 경계를 표시해놓은 진주 가좌동고분군.  /최석환 기자
▲ 밧줄로 경계를 표시해놓은 진주 가좌동고분군. /최석환 기자
▲ 진주 가좌동고분군이 일제 침략을 받던 시기 도굴돼 움푹 파여 있다.  /최석환 기자
▲ 진주 가좌동고분군이 일제 침략을 받던 시기 도굴돼 움푹 파여 있다. /최석환 기자

이 유적 주변으로는 고분 5기가 더 있었다. 지난달 28일 만난 나머지 고분군에서는 알림판을 설치해두거나 훼손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해놓은 모습을 찾아볼 순 없었다. 동행한 송 팀장은 가좌동고분군 1호분과 주변 고분군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대형 무덤 안에 석곽묘가 있었어요. 그 위쪽으로 6개의 무덤이 같이 있었죠. 이런 걸 다곽식 무덤이라고 합니다. 이 고분군 밑쪽을 보시면 고분 5기가 더 있어요. 현재 잔존하고 있는 6기의 중대형 고분군을 포함해 이곳 주변에는 수백 기의 무덤과 생활 유구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움푹 파인 고분이 여기서 가장 큰 봉분이 있던 곳인데 일제강점기에 도굴이 됐죠. 일제 침략이 우리의 역사를 엉망으로 만들어놨어요."

진주 가좌동고분군은 1988년 9월 경상대박물관에 의해 유적 성격이 처음 확인됐다. <문화유적총람>(1977년)에 "가좌리 일대에 삼국시대 고분 10여 기가 산재했으나 일제시대에 도굴 파괴되었다"고만 기록됐을 뿐, 어떤 성격의 유적인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던 곳이었다. 지역주민의 신고를 받은 경상대학교박물관이 가좌동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했고, 이 과정에서 봉분을 갖춘 1호분과 그 주변에 배치된 3기의 고분이 조사됐다. 봉분 크기는 직경 9∼14m, 높이 1.5∼2.5m 전후였다. 이때 발굴된 매장시설은 모두 수혈식석곽이었으며, 내부에서는 토기류와 철기류가 출토됐다. 개양역 남쪽 야산 정상부에는 수십 기의 봉토분이, 사면에는 수혈식석곽묘가 다수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박물관은 결론냈다. 조사된 고분 규모와 출토 유물을 근거로 박물관은 가좌동고분군을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께 진주지역 유력 집단에 의해 조성된 가야 유적으로 추정했다.

이 고분군에 대한 문화재 조사는 경상대박물관만 한 건 아니었다. △1977년 진주시 일원 문화유적 지표조사 △2003년 진주시 일원 문화유적 지표조사 △2007년 신진주역세권 도시개발사업지구 내 지표조사 △2016년 신진주역세권 도시개발사업지구 내 유적 발굴조사 △2017년 가좌동고분군 정밀지표조사 △2017년 신진주역세권 개발사업지구 내 유적 발굴조사 △2019년 진주 가좌동고분군 시굴조사 등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경남발전연구원, 극동문화재연구원, 경상문화재연구원에 의해 조사가 진행됐다. 가장 최근 조사는 극동문화재연구원이 맡았다. 진주시는 가야유적 복원과 정비, 진주의 역사적 정체성 확립, 시민 휴게공간 제공 등을 목적으로 신진주역세권 원형 보존구역 내에 남아 있는 가좌동고분군을 역사문화공원으로 조성하는 사업을 추진했고, 이를 위해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극동문화재연구원에 의뢰해 2019년 2월부터 2020년 6월까지 원형 보존구역 내에 남아 있는 가좌동고분군에 대한 시굴조사와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가좌동 역사문화공원 조성부지 내에는 가야 시대에 조성된 대형 봉토분 6기가 남아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 중 구릉 정상부에 위치한 1호분은 다곽식 구조의 봉토분임이 확인됐다.

▲ 진주 가좌동고분군 발굴조사 현장. /경상국립대박물관
▲ 진주 가좌동고분군 발굴조사 현장. /경상국립대박물관
▲ 진주 가좌동고분군이 있는 야산 전경. 주변에 아파트가 세워져 있다.  /최석환 기자
▲ 진주 가좌동고분군이 있는 야산 전경. 주변에 아파트가 세워져 있다. /최석환 기자

극동문화재연구원 조사 결과에 따르면 6기의 고분 중 봉분의 중앙부에 위치하면서 규모가 가장 크고 토기류와 철기류 등과 같은 유물 수십 점이 나온 곳은 1-1호분이다. 연구원은 세력의 우두머리가 이곳에 묻힌 것으로 추정하는 한편 이 고분 주변에 조성된 곳에는 1-1호분에 묻힌 주인공과 가까운 친족 또는 시종이 묻혔을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1-1호분에서는 피장자의 좌우에서 대도와 철촉, 철모, 머리 쪽과 발치 쪽에서 뚜껑(개), 굽다리접시(고배), 목긴항아리(장경호), 목짧은항아리(단경호), 그릇받침(기대) 등 33점에 이르는 유물이 나왔다. 대가야계 토기와 백제계 토기, 신라계 토기 등이 함께 발굴되기도 했다. 유적에서는 토기류를 비롯해 철기류 등 유물 50여 점이 출토됐다.

송 팀장은 진주 지역에서 잘 확인되지 않던 유력 세력의 고분군이라는 점을 볼 때 유적 일대를 문화재로 지정·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가야의 성격을 특정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출토되는 유구와 유물을 보았을 때 소가야 양식의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다"며 "진주 지역 가야세력의 실체를 볼 수 있는 곳인 데다, 도심 속에 있는 문화유산이어서 문화재로 지정할만한 가치가 충분한 곳으로 평가된다"고 했다. 이어 "진주시에서는 가좌동고분군 지역을 유적공원으로 만들기 위해 정비해나가고 있는 상황이다. 도시 정립과 함께 멋진 유적 공원이 탄생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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