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여행 온 마쓰모토 씨
잘못된 국기 표기에 당혹감
시대 맞지 않은 비행기까지
진해근대역사보존회 회원
시의원·진해구 수정 요청
2년여 만에 제대로 표기돼

2019년 4월 창원시 진해구 제황산공원에 일본 홋카이도에서 사는 생물학자 마쓰모토 겐이치(76) 씨가 도착했다. 진해로 여행 온 그는 진해근대문화역사보존회 회원 이애옥(64)·정영숙(54) 씨 안내를 받아 제황산 곳곳을 둘러봤다. 공원 내 일제가 러일전쟁 전승기념으로 만들어놓은 37·38계단도 둘러봤다. 마쓰모토 씨는 계단 유래를 설명해놓은 안내판을 보던 중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안내판 내용을 자세히 훑어본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고 한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 진해근대문화역사보존회 정영숙(왼쪽) 씨와 이애옥 씨가 지난 21일 창원시 진해구 제황산공원 37·38계단 옆에서 수정된 안내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최석환 기자
▲ 진해근대문화역사보존회 정영숙(왼쪽) 씨와 이애옥 씨가 지난 21일 창원시 진해구 제황산공원 37·38계단 옆에서 수정된 안내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최석환 기자

◇두 가지 오류 = 마쓰모토 씨는 두 사람에게 제황산 정상에 있는 진해탑과 37·38계단에 관해 안내받았다. 진해탑은 1967년 건립된 28m 높이의 해군 군함 사령탑 상징 기념물이다. 37·38계단은 1927년 일본이 명치(메이지) 37년(1904년)과 명치 38년(1905년)에 있었던 러일전쟁을 상징해 만들어 놓은 것으로,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승전기념탑(진해탑 건립 전에 세워져 있던 기념탑)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다. 계단 주변 안내판에는 8컷짜리 만화 형식으로 계단 유래를 소개해놨다.

마쓰모토 씨는 이 안내판에서 두 가지 오류를 찾아냈다. 하나는 잘못된 국기 표기였다. 러시아 삼색기가 아닌 소비에트 연방 국기가 그려진 것이다. 일본 제국과 러시아 제국 간 전쟁을 일본과 소비에트 연방이 벌인 전쟁으로 표현한 셈이다. 러일전쟁에서 일본 승전을 이끈 대마도(쓰시마)해전이 벌어진 것은 1905년 5월, 소비에트 연방은 그로부터 12년 후인 1917년 10월 성립됐다.

또 다른 오류는 일본 비행기 단엽기(주날개가 하나인 비행기)가 러시아 함대를 격침한 것처럼 표현된 것이다. 대마도 해전은 일본 연합 함대와 러시아 발트 함대가 맞붙은 포격전 성격의 전투다. 군함이 주요 전력이었다. 더구나 단엽기가 전쟁에서 사용된 것은 1930년대 이후부터다.

이를 본 마쓰모토 씨는 "한국의 세계사 인식이 이 정도라는 말인가?"라며 당혹감을 감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역사를 잘 아는 세계 각지 관광객이 찾아와 이 안내판을 본다면, 대한민국 역사 인식이 이 정도냐며 웃음거리가 될지도 모른다"면서 "앞으로 진해가 관광도시로 발전하려면 반드시 이런 내용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진해근대문화역사보존회 회원들에게 강조한 뒤 한국을 떠났다.

◇안내판 수정이 그렇게 어렵나 = 마쓰모토 씨는 처음 진해를 찾은 2019년 4월 이후에도 두 차례 더 한국을 방문했다. 다시 방한했을 때도 관련 내용이 수정돼 있지 않자 마쓰모토 씨는 이애옥 씨에게 수정이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에 이 씨는 지역구 의원인 이해련 창원시의원에게 관련 내용을 여러 차례 전했다. 하지만 2년이 지나도록 안내판 수정 문제는 좀처럼 해결되지 않았다.

이 씨는 지난 1월 27일 안내판 수정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마쓰모토 씨가 직접 작성한 문서를 이해련 의원에게 메시지로 전달했다. 그제야 얼마 뒤 이 의원으로부터 '구청에 명령이 내려진 상태여서 일이 잘 처리될 것 같다'는 메시지를 받았다고 한다. 이 씨와 마쓰모토 씨는 조만간 수정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고 후속 조치를 기다렸다.

그러나 후속 조치 역시 더뎠다. 결국 마쓰모토 씨는 이 씨에게 부탁해 지난 3월 국민권익위원회 정부합동민원센터에 안내판 수정 요청에 관한 민원을 넣었다. 당시 센터에서는 "창원시 제황산 애니메이션 그림오류 수정 요청 건은 소관기관인 창원시의 검토와 답변이 필요해 보인다"고 회신했다. 센터에서는 답변하기 어려운 점이어서, 정확한 답변을 들으려면 창원시로 문의하거나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신청해야 한다고 안내했다.

◇2년여 만에 바로잡힌 오류들 = 마쓰모토 씨가 4~5월께 재차 수정 여부 확인을 부탁하자, 이애옥 씨는 진해구청 문화위생과에 안내판 수정을 요청했다. 이 씨는 관련 공무원으로부터 "지금 일이 너무 많아 손을 쓸 수 없다", "애니메이션에서 지적된 비행기와 국기의 오류는 역사상 틀린다고 하더라도 전쟁을 표현하기 위한 의도일지도 모른다"는 답을 들었다고 한다.

이 씨로부터 이 같은 답변을 전해 들은 마쓰모토 씨는 의아해했다. 관광지로 사용되는 공공장소의 안내판이 잘못돼도 이 안내판을 철거하거나 수정할 의사가 없다는 뜻으로 읽혀 창원시 담당 공무원들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법 이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판단, 안내판 관련 문제점 개선을 요구하는 내용의 편지를 써놓고 6월 3일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이튿날인 6월 4일 마쓰모토 씨는 정영숙 씨로부터 "안내판에 덮개가 씌워져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당시 안내판에는 '정비 중'이라는 표시가 종이에 적혀 붙어 있었다.

마쓰모토 씨는 "이 연락을 받고 가슴에 남아 있는 개운치 않은 감정이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며 "진해에 있는 잘못된 역사적인 사실 표기를 정정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적지 않은 만족감을 느꼈다"고 전했다.

현재 이 안내판은 정비가 끝나 마쓰모토 씨가 제기했던 두 가지 오류가 모두 바로잡힌 상태다. 소비에트 연방 국기는 러시아 제국 국기로 수정됐다. 전투기는 그림에서 모두 빠졌다. 함대만 표기돼 있다.

한편 이 의원은 민원 처리가 늦어진 이유에 대해 "올해 초 안내판 수정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처음 전해들은 뒤로 진해구청장 등에게 내용을 전달해 안내판 수정이 이뤄진 것"이라고 엇갈린 의견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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