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앓는 엄마의 모든 기억과 어떤 기억
너무도 닮은 그 둘처럼 우리 삶도 그렇다

모든 것을 기억하고 살 수는 없지만, 모든 것을 잊을 수도 없다. 어떤 것을 기억하고 살 수 있지만, 어떤 것은 기억할 수가 없다. '모든'과 '어떤'이 주는 뜻의 차이와 같음은 '너'와 '나'의 차이와 같음과 닮았다. 내가 '나'를 모두 알 수 없듯이 너도 '나'를 모두 알 수 없고, 네가 '너'를 모두 알 수 없듯 나도 '너'를 모두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것은 서로 알게 마련이다. '모든'과 '어떤'은 일종의 경계선이 아닐까.

얼마 전 급하게 어머니께 들러야 할 상황이 생겼다. 저녁에 아들과 내려가려고 놀러 나간 아이들을 기다리다 어머니께 전화를 했다.

"에어컨이 켜져 있는 거 같은데 끌 줄을 모르겠다. 벽에 커다란 빨간 통에 파란 불이 들어와 있는데…." 엄마는 에어컨을 켜지 않으신다. 여름에도 바닥이 차갑다며 전기장판을 약하게 켜고 주무신다. 그런데 에어컨이라니. "엄마. 머리맡에 에어컨 리모컨 있소." 엄마와 한참을 실랑일 벌였다. "있어 봐라. 해 볼게."

수화기를 내려놓고 에어컨을 끄려는 엄마의 모습이 그려졌다. 까만 리모컨, 하얀 리모컨만 만지작대다가 안 된다고만 하셨다. 그러곤 텔레비전 리모컨을 수화기처럼 들고 말을 하시니 내 목소리가 들릴 리 만무했다. 전화가 안 된다며 소리를 치시는 엄마. 몇 번을 끊고 다시 통화를 해야만 했다. 답답하기도 했고, 걱정도 되었다. 마음이 아팠다. 엄마는 치매다.

고향으로 향하는 길에 아내의 전화가 왔다. "어머니 에어컨 끄셨다는데. 리모컨을 못 찾아서 그냥 날개를 닫아버리니 꺼지더래. 하하하하." 아내의 웃음에 안도가 되었지만, 가는 내내 지나간 시간들이 떠올랐다. 부모의 인생에서 자식은 무엇일까? 장을 보면서도 엄마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도 새삼 떠오르며 죄스러웠다.

집에 도착해서 에어컨 리모컨을 다시 설명해야만 했다. 물론 금세 잊어버리시겠지만 말이다. 엄마와 단둘이 방에 누우면 옛이야기가 솔솔 피어났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옛이야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모든' 이야기를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쩌다 아들이 꺼내는 추억 하나에 엄마는 '어떤' 기억을 끄집어내어 혼잣말을 이어가신다. 갑자기 '어떤' 기억이 떠오르면,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같은 질문을 수십 번 하신다. 반복되는 '모든' 말에 대답을 하는 일도 쉽지는 않다. 엄마의 '어떤' 말에 답을 하다보면, '모든'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다 다시 '모든' 기억을 잊으시는 듯 잠시 잠이 드신다. 주무시는 엄마의 모습은 천사다. '어떤' 기억을 품고 엄마는 살아가실까? 늙어가는 부모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는 까닭은 이제 곧 이 모습을 닮아갈 자신의 모습을 미리 보기에 그렇지 않을까.

엄마의 '모든' 기억과 엄마의 '어떤' 기억은 너무도 닮아 있었다. 우리네 삶도 그렇다. 우리는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고 살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라고 '모든' 것을 기억하고 사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또한 우리가 만나는 '어떤' 문제는 결코 풀어낼 수 없는 난제이기도 하지만, '어떤' 문제는 쉽게 풀어내기도 한다. 우리가 '어떤' 것은 기억을 하고 '어떤' 것은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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