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럽지 않은 딸 부잣집 문득 든 걱정
'상주는 곧 남자'장례문화 변화 언제쯤

우리 집엔 아들이 없다. 그 흔한 오빠나 남동생이 나에게는 없다는 얘기다. 그 옛날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던 국가 출산 정책이 우리 집안에서는 안 통했다. 아들은 무조건 있어야 된다는 강한 집념으로 부모님은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 끝은 실로 놀라웠다. 딸만 내리 여덟 명. 앞집 뒷집 옆집에 다 있던 아들을 우리 부모님은 끝내 가지지 못하고 출산 계획을 마감했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막냇동생이 또 딸로 태어나던 날, 온 동네는 고요했다. 그러나 시끄럽게 위로했다. "아들 8명이 아닌 게 얼마나 다행입니까? 아들이 많으면 형제간의 우애만 상해요. 딸이 많으면 비행기도 많이 타고 호강한답니다."

딸 부잣집의 일곱 번째 딸. 한때 자기소개서를 쓸 때면 빠지지 않던 나의 경쟁력이었다. 실제로 딸 부잣집에서 자라면 몇 가지 좋은 점이 있다. 첫째, 주목 받기가 쉽다. 어느 자리든 "딸 부잣집의 일곱 번째입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열이면 열, 대부분 사람들이 나를 쳐다본다. 그러곤 되묻는다. "아들은요?" "없습니다." "한 명도?" 재밌는 반응과 함께 나에 대해 흥미를 가진다. 임팩트 있게 확실한 존재감을 심어주곤 한다. 딸만 있는 집에서 자라면 좋은 점 두 번째는 남녀불평등을 경험하지 못한다. 아니, 할 수가 없다. 학창시절, 친구들이 오빠와 남동생과의 차별로 서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 집에 아들이 없음을 다행으로 여긴 적이 있다. 남동생의 양말을 빨고 라면까지 끓여 바쳐야 하는 친구의 신세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곤 했다. 집에서 남녀불평등을 경험하지 못해서일까, 나는 집 밖에서 부딪히는 남녀불평등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내 또래보다 성평등 지수가 높았음을 자부한다. 다음으로 딸 부잣집에서 자란 나의 경쟁력은 나이 차이가 많은 사람과 거리감을 별로 못 느낀다는 것이다. 큰언니와 18살, 큰 형부와는 26살.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나는 자매들과 생활하다 보면 사회에서 만난 나이 많은 선배들과 정서적으로 거리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나는 나이 많은 친구들이 많다. 마지막으로 딸 부잣집은 자매애가 두텁다. 서로 잘 뭉친다. 형제보다 자매가 같이 운동을 하고 쇼핑을 하고 여행을 하는 게 더 쉽다. 언니들이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또 아이를 낳아 서른 명이 넘는 대가족이 된 지금, 내년쯤 엄마 이름을 딴 가족 체육대회를 계획하고 있다. 홀수 팀과 짝수 팀을 나눠 줄다리기도 하고, 골프도 하고, 릴레이도 할 수 있는 가족. 딸만 내리 8명을 둔 딸 부잣집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지금까지 아들 없는 딸 부잣집에서 별 문제 없이 살아온 나에게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다. 얼마 전, 지인의 부고 문자를 받고부터다. 딸과 아들, 남녀가 엄연히 구분되어 날아온 부고였다. 지인이 맏딸이지만 남동생만 상주가 되어 있는 문자를 보면서 엄마 장례식을 생각했다. 우리 집은 누가 상주가 되는가? 현재, 장례 문화로는 아들이 없는 우리 집에는 상주할 사람이 없다. 딸이 여덟 명이면 무엇 하나. 딸은 딸일 뿐, 엄마 장례식에 상주가 될 수 없는 현실이다. 조문객을 맞으며 맞절을 하는 것도 아들, 제사를 지낼 때 술을 따르는 것도 아들, 고인의 영정을 드는 것도 아들, 완장을 차고 장례 절차를 의논하는 것도 모두 아들의 몫이다. 가부장적 남성 중심의 장례질서에서 딸은 며느리나 손자보다 더욱 더 설 자리가 없다.

결혼식에서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입장하는 딸도 줄어들고, 제사상에 고인이 평소 즐겨 먹던 음식을 올리는 것이 유행이 되고 있는 지금, 왜 유독 장례문화는 더디게 변하는 걸까? 아마도 슬픈 죽음 앞에 격한 논쟁을 벌일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음이리라. 그렇기에 장례식 문화에 존재하는 남녀차별을 없애기 위해선 평소에 물음을 던져야 한다. "왜, 딸은 상주가 될 수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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