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중 크레인 참사에 충격
노동자 만나 처한 현실에 분노
"무엇이 잘못인지 알고 싶어"
노동학 공부 위해 캐나다 유학

"사망자는 협력업체 직원, 안전교육의 부재, 며칠 잠깐 멈추다 또 돌아가는 공장, '노동자를 죽이지 말라'며 거리로 나온 동료들. 마치 하나의 공식처럼 산재 사망사고는 반복되고 있습니다. 달라지지 않는단 얘기죠. 일하다 죽는 사회보다 더 문제는, 일하다 죽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라는데…. 이미 모두가 비극에 익숙해진 건 아닌지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 2021년 1월 25일 맺음말(클로징 멘트)

14년간 한결같이 경남의 소식을 전해주던 아나운서가 노동학을 배우고자 캐나다 유학길에 오른다. KBS창원 이아롬(37) 아나운서다. 방송인이 공부를 위해 유학 가는 건 자주 접하는 일이지만, 방송과는 전혀 무관한 '노동'을 배우려는 그가 궁금해졌다. 지난 23일 창원 중앙동 한 카페에서 이 아나운서를 만났다.

◇미대생에서 아나운서로 = 인생의 진로를 바꾼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한때 이 아나운서는 그림 없이 살 수 없어 화가가 되는 게 꿈이었다. 예중-예고를 다니며 미술 공부에 매진했다.

그리고 당연한 과정처럼 홍익대 예술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미술에 회의를 느껴 새로운 길을 찾기 시작했었다. 굳이 화가는 아니더라도 미술에서 파생하는 직업을 구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대학에서도 실기가 아닌 이론을 배웠다. 3학년이 되자 밥벌이를 현실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전시기획자, 큐레이터, 학예사까지 여러 선택지를 두고 고민했다. 아나운서를 하면 구속받지 않고서 조직 생활을 하는 직장인이 될 수 있겠다 싶어 '방송국 한 번 가볼까' 마음먹었는데 시험에 덜컥 붙어버렸다. "방송일을 해보니까 제 적성에 정말 잘 맞더라고요. 일하면서 제가 몰입하고 있다고 느꼈어요. 스트레스가 많지 않았고요. 그냥 재밌고, 좋다는 생각뿐이었죠."

주로 뉴스나 시사 라디오를 담당했던 그는 시사 프로그램 <감시자들>을 진행하면서 성취감을 크게 느꼈다. 기억에 남는 보도로는 'SM타운 조성 문제'를 꼽았다. "창원시가 SM엔터테인먼트에 왜 그렇게 큰 특혜를 줬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부터 행정 처리 과정까지 끊임없이 물고 들어갔어요. 결국 시에서 감사가 시작됐고, 특혜를 준 사실이 밝혀졌죠."

◇왜 하필 노동인가 = 아나운서를 하면서 수많은 취재원을 만났다. 그는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 참사 2주기에 유가족 인터뷰를 했던 경험이 기억에 오래 남아 있다고 했다. 여섯 명이 사망했던 참사. 동생과 함께 조선소에서 일하던 형은 그 사고로 가족을 잃었다.

"인터뷰 말미에 그분한테 '지금 가장 원하는 게 무엇이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그분이 '사과를 받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충격을 받았죠. 유가족이 원하는 게 '사과'래요. 상식이 없는 사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사업장에서 사고가 나서, 가족을 잃고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데 가장 원하는 게 사과라면….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꼈죠."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동안 노동 이슈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그는 "창원이 노동 이슈가 전부인 도시라고 느낄 때도 많았다"며 "창원에 노동자가 이렇게 많은데 애써 사람들이 외면하는 것 같기도 하다"고 말했다.

날마다 쏟아지는 노동 이슈를 전달하면서 자연스럽게 관심이 갔다. 라디오 프로그램 <이아롬의 시사경남> 진행을 맡는 동안 노동자들을 인터뷰할 기회가 많았다. 라디오에서 20분 동안 인터뷰하려고 몇 배가 넘는 시간을 투자했다. 그렇게 쌓인 경험에 이 아나운서는 분노를 느꼈다.

"순진한 분노라고 해야 할까요? 노동자들을 만나 얘기를 듣다 보니 임계점에 달했어요. 도대체 뭐가 문제길래 노동계 현실은 이렇게 엉망진창일까. 늘 궁금했어요. 마침 유학도 가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던지라 노동학을 공부해볼까 싶었죠."

▲ 노동학을 배우려고 유학을 떠나기로 한 이아롬 KBS창원 아나운서가 23일 창원시 성산구 중앙동 한 카페에서 본보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은주 인턴기자 kej@idomin.com
▲ 노동학을 배우려고 유학을 떠나기로 한 이아롬 KBS창원 아나운서를 23일 창원시 성산구 중앙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김은주 인턴기자kej@idomin.com

◇떠납니다, 캐나다로 = 본격적으로 노동을 배워보자 결심한 이 아나운서의 마음을 사로잡은 곳은 캐나다 온타리오주 남부 해밀턴에 있는 맥마스터대학교였다. 그는 "해밀턴이 항구를 낀 제조업 도시라 그런지 노동자가 많아 창원과 비슷하다"며 "북미 대륙에서 유일한 노동학 전문 대학인 점도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재작년에 이미 대학원 석사 과정에 붙었지만 2년 동안 망설였다.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시간과 돈을 들여 유학을 다녀온 다음 계획이 없었다. '그래서 다음은 뭔데?'라는 고민이 오랫동안 이 아나운서를 괴롭혔다.

"내가 요리를 배우고 싶은데 그다음엔 뭐하지? 이렇게 생각하면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예요. 왜 한국 사회에서는 아웃풋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내 목표는 유학이야. 그다음엔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냥 지켜보자. 이것저것 다 따지면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행동하지 않고, 실천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죠. 그 생각을 하고 나서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어요."

그렇게 유학이 결정되고, 회사에 휴직계를 제출했다. 말리는 이는 없었다. 가족들도 그의 결정에 응원을 보냈다. 남편과는 떨어져 지내게 됐지만 초등학교 2학년인 쌍둥이 아들 둘은 캐나다로 함께 떠난다.

얼마 전 그는 학교 누리집에서 교과 과정을 살펴봤다. 여성과 노동, 노조운동사, 이주민과 노동…. 수강 과목을 봤다. 모두 배우고 싶었던 내용이다. 9월 첫째 주가 개강이다. 그때가 되면 이 아나운서는 담쟁이넝쿨로 둘러싸인 캠퍼스 안을 거닐고 있을 거다.

"내가 방송 스튜디오 안에서 왜 답답했는지 알게 되겠죠. 이래서 노동이 문제였구나. 반짝반짝 튀는 깨달음이 있을 거예요. 제가 영어를 잘해봤자 얼마나 잘하겠어요. 무안하고, 절망하고, 부끄러운 일도 있겠죠. 차별을 느끼기도 할 거고요. 아나운서로 살면서 그런 적이 별로 없었어요. 직업, 나이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떨리고 무안한 적이 있었나? 부끄러운 적이 있었나? 이미 가진 자가 된 거죠. 그런 감정을 하나, 하나 다시 느껴보면 살아있다고 느끼지 않을까요? 부끄러워해 보자. 꼴등도 해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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