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장 음악 제한한 코로나 방역정책
실효성 없는 권고는 세상 피곤하게 해

로뱅 캉피요 감독이 2017년에 만든 영화 <120bpm>은 에이즈 감염자의 권리 보장 운동을 벌이는 단체 '액트업'을 배경으로 소수자의 권리와 사랑에 진지하게 접근해 화제가 되었다. 이 영화는 제70회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과 세자르 영화제 작품상, 각본상, 편집상 등을 휩쓸었다. 120bpm이라는 제목은 그들이 좋아한 하우스 뮤직의 속도이자, 살아있음을 알리는 심장의 뜨거운 고동소리를 상징했다.

bpm은 '비트 퍼 미닛(beats per minute)'의 약어로, 의학에선 분당 심장이 몇 번 뛰는가를 말하는 심박 수를 나타내지만, 음악에선 빠르기를 나타내는 단위로도 쓰인다. 숫자가 높을수록 템포가 빨라진다.

올여름, 한국에서 느닷없이 120bpm이 화제가 되었다. 이번에는 영화가 아니라 헬스클럽에서 틀어 놓는 음악의 문제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에 따른 수도권 4단계 지침에서 그룹운동(GX·Group Exercise) 때 듣는 음악을 120bpm 이하의 곡으로 제한하는 내용 때문이다. 정부는 bpm이 높을수록 숨이 가빠지고 침 방울이 많이 튄다는 설명과 함께 120bpm의 기준을 예시해주었다. BTS의 '버터'나 나훈아의 '테스형'은 되지만,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138bpm)이나 싸이의 '챔피언'(130bpm)'은 안된다는 것이다. 뭐, 체육관에서 클래식을 틀어주는 때는 없지만, 이 기준으로 본다면 비발디의 사계 중의 여름 3악장이나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3악장도 안 될 것 같다.

이 기상천외한 지침이 발표되자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타당성은 고사하고 일단 실효성이 너무 없는 지침이기 때문이다. 어느 헬스클럽이 bpm 측정기를 가지고 있을 것이며, 그 많은 음악의 bpm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외신들마저도 전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기 어려운 이 지침에 흥미를 보였다. 영국 <가디언>은 "법을 준수하는 한국인들에게, 아이린 카라의 '플래시댄스'는 정확히 120bpm이라서 괜찮고, 밥 말리의 '이즈 디스 러브'는 122bpm이니까 안된다"라며 비꼬았다. "이 규제를 만든 행정당국 사람들은 헬스장에서 운동해본 적이 없는 듯하다"라고 쓴 신문도 있었다.

물론 코로나 상황이 엄중하니 더욱 조심하자는 취지인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세상을 피곤하게 만드는 것은 이런 식의 실효성 없는 권고사항들이다. 가뜩이나 영업을 못 해서 업주들 속이 타들어 가는데 굳이 이런 '꼼꼼한 행정'으로 기름을 부을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헬스클럽의 음악에 관한 얘기가 나온 김에 매우 개인적인 견해를 보태자면, 그곳에서 나오는 음악의 bpm이 아니라 dB(데시벨·음량)에 제한을 두고 싶다. 내가 경험한 대부분 헬스클럽은 무지막지하게 높은 음량으로 귀를 고문했다. 그곳에서 운동한다면 약간의 근육을 얻는 대신 고막과 심장에 심각한 손상을 입을 것 같다. 가뜩이나 힘든 세상에서 모두 용을 쓰고 사는데, 운동하는 곳마저도 내게 지옥을 향해 악을 쓰며 달리라고 하는 것 같다. 나는 달릴 때 뛰는 내 심장 소리를 듣고 싶다. 아령을 들고 있을 때 나오는 내 숨소리를 느끼고 싶다. 헬스클럽이든, 식당이든, 아파트 층간이든, 거리의 버스킹장이든, 삶의 모든 현장에서 dB의 문제를 꼼꼼히 살피는 정책을 기대한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