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일간 짝 못 찾으면 동물 변신
저항할 수 없는 현실에 고통
폭력적·잔혹한 장면마다 흐르는
쇼스타코비치 현악4중주 8번 곡
처연하고 암울한 감정 고스란히

영화라는 매체가 주는 문화적, 정서적 영향력은 상당하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간편하고도 다양한 체험을 선사하는 장르이자 대표적인 종합예술인 것이다. 하여 창작되어 선보이는 영화들이 하루 단위로 세어야 할 만큼이라 무엇을 골라 볼지 행복한 고민을 선사한다. 이렇듯 어지러이 쏟아지는 작품들, 이제는 상상력이 고갈되어 새롭고도 놀라운 이야기는 더 이상 존재하기 어려워 보이고 어디선가 이미 본 듯한 장면들과 반복되는 메시지들로 지겨울 때, 가끔은 상상력을 뛰어넘는 기발한 설정들로 놀라움을 선사하는 영화들이 있다. 영화 <더 랍스터>가 바로 그렇다.

▲ <br /><br />유예기간 안에 짝을 찾지 못하면 동물로 변하게 되는 기묘한 커플 메이킹 호텔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더 랍스터> 스틸컷.
▲ 유예기간 안에 짝을 찾지 못하면 동물로 변하게 되는 기묘한 커플 메이킹 호텔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더 랍스터> 스틸컷.

◇메이킹 호텔 = 자신의 짝으로부터 버림받은 데이비드(콜린 파렐), 그가 향하는, 아니 향해야 하는 곳은 커플 메이킹 호텔. 그곳은 홀로 남겨진 이들이 모여 완벽한 짝을 만나 커플로 거듭나야만 하는 곳이다. 주어진 시간은 단 45일. 하지만 인연 찾기에 실패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벌이 있으니 바로 사람이 아닌 동물로 변형되어 자연에 버려지는 것.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변하고 싶은 동물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인데 주인공 데이비드가 선택한 동물이 바로 랍스터다.

짝을 찾지 못한 것이 죄가 되어 벌이 내려지는, 그것도 동물로 변형시켜버리는 잔인한 형벌이 내려지는 세상. 이러한 황당한 상황에 누군가 의문을 제기할 만도 하지만 모두가 담담히 받아들이는 걸 보니 아마도 오래 이어온 규칙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시작된 데이비드의 짝 찾기.

그렇지만 이미 전처로부터 상처를 받았기에 새로운 짝을 찾기엔 관심이 없고 하루하루를 낭비하며 보낸다. 그렇지만 다른 이들은 억지 커플 되기와 외톨이 사냥을 통한 시간 벌기에 여념이 없다. 어떤 이는 동물이 되기 싫어 아픔을 참고 멀쩡한 코를 부딪혀 가짜 코피를 만들기도 한다. 완벽한 커플로 인정받기 위하여는 그만큼의 완벽한 공통점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며 바라보는 여성이 코피를 잘 흘린다는 단순한 이유이다.

그리고 그는 '무척 아팠을 텐데?'라며 한심하다는 듯 안쓰러워하는 데이비드에게 '동물이 되어 포식자에게 사냥 당하는 것과 아프지만 매일 코피를 흘리는 것 중 뭐가 더 나은가'라며 반문한다.

◇냉혈녀 = 그렇게 시간이 흘러 데이비드에게 인간으로서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즈음, 갑작스레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낀 그는 커플 만들기에 돌입한다.

상대는 완벽한 냉혈녀. 어색하게 그녀에게 접근한 데이비드는 자신도 같은 부류임, 즉 '우린 제법 잘 어울려요'를 입증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한다.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놀라지 않기, 아이에게 차갑게 굴기 등. 그러던 어느 날, 냉혈녀의 발에 차여 처참하게 죽은 개의 모습에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냉혈남으로서의 연극이 들켜버린 것이며 그녀의 발에 무참히 죽어간 개는 외톨이 벌을 받은 자신의 형이기 때문이다. 이제 데이비드는 냉혈녀의 추격을 피해 그곳으로부터 어렵게 탈출, 그가 찾은 곳은 외톨이들의 세상이다. 숲 속에서 외톨이로 살아가는 무리들. 누구도 커플 되기를 강요하지 않으며 이성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곳.

하지만 이곳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아찔한 규칙이 있다. 결코 커플이 되어서는 안 되며 어길 시 죽음의 벌을 받는다는 것. 그렇게 새로운 속박에 또다시 갇혀버린 데이비드. 그는 과연 사랑 없는 억지 커플 지옥을 벗어나 혼자로서의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까? 만약 그곳에서 마음이 이끄는 사랑을 만난다면?

◇쇼스타코비치 = 호텔에 도착해 체크인을 마친 데이비드, 그가 자신이 지닌 모든 소지품을 반납하고 새로운 생활물품들을 지급받는 장면에서 네 대의 현악기가 폭력적으로 달려든다.

그리고 이 선율은 이후에도 계속하여 장면 곳곳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와 가슴을 내려친다. 모두가 폭력적이거나 잔혹한 현실이다.

구소련의 작곡가 '쇼스타코비치' (Dmitrii Shostakovich·1906~1975)의 현악 4중주 8번 (String Quartet no. 8)의 4악장 (Largo). 어렸을 적부터 천재로 세상의 주목을 받았던 쇼스타코비치였지만 그의 삶이 평탄했다고 생각하는 이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는 그가 살았던 시대적 아픔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평생을 순음악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사이에서의 위태로운 줄타기를 해 왔던 것이다. 그런 그의 1960년은 더욱 암울했다. 지닌 질병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으며 무엇보다도 가장으로의 책임감과 당국의 탄압으로 결국 공산당에 입당하게 된 것이다.

이후 내려진 임무와도 같은 창작활동, 구동독의 드레스덴에 머물며 그곳을 배경으로 한 영화 <5번의 낮, 5번의 밤>을 위한 음악을 담당하게 된다. 그리고 마주한 전쟁의 참상. 참혹한 현장을 향한 분노와 좌절의 격렬한 감흥에 쇼스타코비치는 곧 작곡에 착수하여 단 3일 만에 완성하는데 모두 5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 악장은 이어진다.

▲ <br /><br />유예기간 안에 짝을 찾지 못하면 동물로 변하게 되는 기묘한 커플 메이킹 호텔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더 랍스터> 스틸컷.
▲<더 랍스터> 스틸컷.

◇상실감 = 1악장은 작곡가의 시그너처라 할 DSCH(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약자)로 시작하며 이 모티브는 모든 악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어 흘러나오는 바이올린 소리는 희생자들의 서글픈 울음소리인 양 처연하며 암울하다. 이어지는 2악장은 한마디로 참혹하여 무고한 이들을 향해 내리 붓는 포화처럼 잔인하게 몰아친다. 왈츠 풍의 3악장은 그로테스크한 흥겨움을 빚어내는데 이는 한때의 행복, 곧 죽음을 맞이할 이들의 마지막 향연인 듯 허무하다.

그리고 영화에 사용된 4악장 '라르고(Largo)', 어둠과 죽음의 정령이 문을 두드리는 듯한 세 번의 찰음은 마치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인 듯 두려우며 마주친 운명을 향한 절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다 대항할 수 없는 두려움에 분노해 보지만 현실은 잔인할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 5악장, 멀어져 가는 폭음과 총성이 결국 사라져 간다. 하지만 사라진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이처럼 곡은 한 편의 영화를 보듯 생생하게 장면들이 그려지며 악보에는 '파시즘과 전쟁의 희생자들을 애도하며'라는 문구가 명확하다. 하여 한때 쇼스타코비치의 작품들은 목적의식적 결과물로 여겨지며 가치 절하되었을 뿐 아니라 완벽한 공산주의자로 그의 이름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사후, 모든 상황이 반전된다. 스탈린 정권의 충실한 하수인으로 여겨지던 그의 음악들에 상징적으로 숨겨져 있는 의미를 찾기 위한 진지한 접근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쇼스타코비치의 음악들이 재평가되며 현악 4중주 8번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졌다.

파시즘 희생자들을 위한 작품이라는 협의가 모든 전체주의로 인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곡으로 그 의미를 넓혔을 뿐 아니라 시대의 희생자였던 스스로를 위한 장송곡으로 지극히 개인적인 상실감을 표현하였다는 사실이 여러 증언을 통해 밝혀진 것이다.

이후 작품은 순음악적 가치를 인정받으며 그의 작품 중, 아니 20세기 탄생한 현악 4중주 중 가장 위대한 곡 중 하나로 평가받기에 이른다.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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