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쇼백신 예약·최소잔여형 주사기
작은 아이디어가 위기를 이겨낸다

"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가슴 시린 보릿고개 길…"로 시작하는 어느 트로트 가수의 구성진 '보릿고개'는 들을 때마다 가슴이 뭉클하고 짠한 그 무엇이 있는 것 같다.

근래에 들어 급격한 경제성장과 더불어 우리네 생활 형편이 많이 나아져 실감 나지는 않겠지만 '보릿고개'는 일제강점기 식량 수탈과 한국전쟁을 겪은 필자의 부모 세대가 겪어야만 했던 극심한 경제적 빈곤으로, 초근목피로 끼니를 때우거나 걸식과 빚으로 연명했던 매우 어려웠던 시절을 비유하는 말이다.

어언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필자도 우리네 부모 세대 궁핍과는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모든 것을 아끼고,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던 필자 나름의 유년시절 '보릿고개'가 있었다. 작금에 우리나라가 예기치 못한 '백신 디바이드(백신 양극화)'로 때아닌 코로나19 백신 보릿고개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G7을 비롯한 일부 국가에서는 충분한 물량 확보로 백신 접종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중·저소득 국가들은 백신 접종에서 소외되고 있다. 전 세계 코로나19 백신의 75%가 미국을 비롯한 선진 10여 개국에 집중돼 공급되고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필요 이상의 백신을 확보한 일부 국가에서는 과학적인 보급 방법을 활용하지 않거나, 백신 부작용 걱정으로 접종을 회피하는 등의 이유로 유효기간이 만료되었거나 생산·보관·관리 부실로 엄청난 양의 백신이 사용되지 못한 채 통째로 폐기되고 있다.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허탈하고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듯싶다.

최근 보도 자료에 따르면 아프리카 국가 중 상당수가 아직 아무도 백신 접종을 받지 못하는 등 많은 나라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백신이 턱없이 부족한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단 한 방울의 백신도 낭비하지 않기 위해 모든 국민이 공옥이석(攻玉以石·돌로 옥을 간다)의 지혜를 짜내고 있다.

최근에 필자는 코로나 백신(아스트라제네카)을 1차 접종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노쇼(no-show) 백신'을 예약해 두었는데 나름 성공한 셈이다. 예약한 병원에서 "금일중 아무 때나 오시면 됩니다"라는 막연한 말을 들었을 때 다소 의아해 했는데, 예약 시간이 별도로 정해지지 않은 이유를 병원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서너 사람이 먼저 도착해 있었고 필자도 잠시 대기하라는 관계자의 말을 들었다. 반 시간 정도 지나 10여 명이 모였을 때, 그때부터 문진표를 작성하고 먼저 도착한 순서부터 한 사람씩 의사와 면담한 후 일사천리로 10명 모두 접종을 완료했다.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은 1병(바이알)당 10회 용량, 즉 10명분의 백신을 추출할 수 있다. 백신 개봉 후 한꺼번에 10명분 모두를 투여해 낭비되는 백신이 없도록 예약 시간이 정해지지 않았던 셈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백신 투여 시 기존 일회용 일반주사기는 약 0.058g의 백신이 남은 채 폐기되는데, 낭비되는 백신을 다섯 번 모으면 한 사람에게 투여할 수 있는 백신의 양이 된다고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내 중소기업에서 백신의 잔량이 거의 없는 '최소 잔여형(LDS·Low Dead Space)' 주사기를 개발해 별거 아닌 것 같은 작은 아이디어가 위기 속에 빛을 발하고 있다. 그야말로 단 한 방울의 백신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셈이다.

흔히들 과학은, 세간의 이목이 쏠리는 대단한 발명이나 큰 기술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대수롭지 않은 듯한 공옥이석의 아이디어야말로 작금의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는 일상에서 마주할 수 있는 과학임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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