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안정은 사회의 안정에서 온다
잃었던 지갑이 돌아오는 것도 포함돼

7월 초 2주 넘게 제주 여행을 했다. 겨우 세 명뿐인 가족이 14년 만에 함께하는 여행이라 왜 그래야 했는지 돌이켜 보는 반추의 시간이기도 했다. 일정이 반쯤 지났을 때 지갑을 잃어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여름이면 남자들도 손가방이 필요하다. 전화기와 지갑은 물론이고 선글라스, 돋보기에 보조 배터리까지. 가벼운 차림의 호주머니로는 감당하기 어렵다. 여행 내내 손가방을 들고 다녔는데 간혹 덮개가 열려 불안했다. 그날도 절물휴양림을 걷던 중 덮개가 열려 깜짝 놀랐는데 지갑을 확인한 기억이 없어 관리사무소에 전화했지만, 습득물은 없단다. 여행 막바지에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 힘든 곳을 둘러보기 위해 차를 빌렸는데 면허증이 없고 결정적으로 비행기를 타기 위한 신분증도 없다. 상당한 비용과 꼬박 하루를 바쳐 임시신분증을 받아 급한 불은 껐다.

분실 다음다음 날 일부러 날아온 절친과 한라산을 올랐는데 등산 중 신용카드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서귀포경찰서에서 지갑을 보관 중이란다. 순간 끓는 더위의 고통은 사라지고 몸도 마음도 바람처럼 가벼워졌다. 담당 경찰에게 습득 장소와 맡기신 분 연락처를 물으니 고마운 누이가 숙소로 내준 아파트 입구에서 주웠고 연락처는 본인 의사를 물어본다 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역시 손가방이 문제였다. 전화번호를 받고 어떻게 사례할지 궁리만 하다 돌아와서야 일단 문자로 고마움을 표시했더니 중학교 2학년 손녀가 주웠고 경찰에 연락했더니 직접 가지러 왔었다고 한다. 듣고 보니 그 손녀의 교육 목적에서라도 구체적으로 고마움을 표시해야 하겠다는 생각에 할머니와 손녀가 모두 좋아할 만한 아이스크림 한 통을 보냈다. 혹시 약소하게 여기거나 부담스러워 거절할까 걱정했는데 손녀도 고맙다는 말을 전해 달란다 하시면서 잘 먹겠다고 답이 왔다. 제주 여행 중 가장 불편하면서도 기쁜 일이었다.

여행 일주일 후쯤, 김해 장유에 사시는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반갑게 인사를 했는데 상대 목소리는 젊은 남자였다. 무슨 사고라도 생겼나 해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다행히 전화기를 주웠는데 마지막 통화자에게 전화했단다. 경찰서에 맡기러 간다기에 위치를 물으니 어머니 집 옆이었다. 경찰서보다는 가까우니 어머니 집으로 부탁하니 기꺼이 그러겠단다. 집 전화도 안 받으셔서 우편함에 넣어 달라고 했다. 두어 시간이 지나 통화가 됐는데 전화기를 잃어버리신 줄도 모르신다. 우편함을 챙겨 보시라니 그제야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냐' 하시면서 가슴을 쓸어내리신다.

최근 UNCTAD(국제연합무역개발협의회)가 우리나라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변경했는데 1964년 협의회 설립 이후 첫 사례다. 이들이 말하는 선진국이란 돈에 대한 이야기일 뿐 진짜 사람살이는 아니다. 저 선진국 대도시에 머물 때면 검은 적막을 찢는 잦은 사이렌 소리에 신경이 곤두서곤 했는데 위급 상황이 많은 건지 아니면 대응 능력이 높은 건지 늘 궁금했다. 뭐가 됐든 그 도시에서 지갑이나 전화기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지금까지 누구도 깨지 못한 출판 역사의 금자탑, <뿌리깊은 나무> 1976년 3월호 창간사에서 발행인 한창기는 "'잘사는' 것은 넉넉한 살림뿐만이 아니라 마음의 안정도 누리고 사는 것이겠습니다. '어제'까지의 우리가 안정은 있었으되 가난했다면, 오늘의 우리는 물질가치로는 더 가멸돼 안정이 모자랍니다"라고 했다. '마음의 안정'은 '사회의 안정'에서 오고 사회의 안정은 잃어버린 지갑, 전화기가 제 발로 돌아오는 것도 포함된다. 우리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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