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둔 만큼 상상과 창의의 싹이 자라나
학생 존중 위에 자발성 끌어내는 수업을

여백이 있으면 여유가 생긴다. 그대로 비워 둘 수도 있고, 뭔가 더 넣을 수도 있어 좋다. 뭔가를 더 넣을 때는, 넣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으면 더욱 좋다. 그만큼 개성이 숨쉬는 자리가 생긴다. 비워 둔 만큼 생각이 여유로우면 상상과 창의의 싹이 자라날 수 있다. 여백이 있다는 건 그려 넣고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것 아니면 저것, 맞다 아니면 틀리다가 아닌, 다양함이 자랄 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뜻이다.

학교의 여백을 떠올려 본다. 아침 등굣길부터 수업 시간과 쉬는 시간, 점심과 종례까지 돌아본다. 거기 어디쯤에 아이들에게 주어진 여백이 있을까? 스스로 여유를 가지고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시간이 있을까? 학교를 마치고 학원을 거쳐 집에 돌아왔을 때, 그쯤에서 여백이 생길까? 교실과 특별실과 계단과 농구장, 텃밭과 느티나무 아래 긴 의자와 화단을 돌아본다. 거기 어디쯤에 여백이 있을까? 아이들이 세우고 허물고 비우는 자리가 있을까? 수업의 여백을 생각해 본다. 선생님 속도를 정신없이 따라가다 땡, 종소리와 함께 모든 걸 잊고 돌아서지는 않을까? 그 어디쯤서 선생님 시간이 아이들 시간에다 자리를 내어줄까? '네가 이 자리에 앉아 봐.' 그 여백에 엉덩이를 걸친 아이는 '지금 나는 뭘 하고 있지?' 하며 자신을 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수업에서 아이들이 누릴 적절한 여백을 만들어 줄 때, 스스로 관심을 갖게 할 때, 그때부터 성장은 시작될 것이다.

학교도 사람 사는 곳이다. 아이들은 친구들, 교직원들과 관계 속에서 하루를 보낸다. 사람들과 관계에는 어느 정도 여백이 있을까? 선생님과 학생 사이에 한 발 내딛거나 물러설 수 있는 여유로움이 있는가?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해 주는 만큼 여백이 생겨 서로를 평온하게 해 줄 것이다. 빈틈없는 규칙과 빽빽한 요구에 끌려다니지는 않는가? 선택의 여지도 없고 빈틈없는 길을 지긋지긋해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가고 있는 건 아닌가?

'여백을 만들어 놓으면, 아이들이 그 여백을 채워 나간다.' 원격 연수를 듣다가, 이 한마디에 멈추어 섰다. 그렇다. 여백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업자가 '만들어 놓은 것'이다. 똑같은 책을 펼치고 하는 수업도 수업자의 설계에 따라 결과는 아주 달라진다.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스스로 그 여백을 채워 나가도록 하는 수업 디자인과 설계는 만만한 게 아니다.

우선 아이들과 서로 존중하는 바탕이 마련되어야 한다. 어른도 마찬가지지만,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수업, 자신이 존중받지 않는 수업을 열심히 하는 아이는 없다. 인정하고 존중하는 바탕 위에 관심과 자발성을 끌어내는 전문가 디자인이 필요한 것이다. 이 디자인은 한 번 만들면 영구적으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이들도 선생님도 변하기 때문이다.

징검다리를 폴짝폴짝 뛰어 건너던 아이가 멈추었다. 다음 다릿돌은 거리가 좀 더 멀어 보였다.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아이는 몇 걸음 되돌아와서 다시 징검다리를 성큼성큼 건너다 폴짝 뛴다. 이 작은 성공을 통해 아이는 '이렇게 해 보니까 되네.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어' 하고 스스로에게 말을 건넨다.

그 징검다리는 선생님이 아이의 도전과 성장을 위해 맞춤하게 놓은 것이다. 너무 멀어서 좌절하지 않고, 너무 가까워서 귀찮지 않게, 스스로 생각하고 도전하도록 '여백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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