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결정부터 실무까지 쥐고 있는 서울
반지역성 감추려 내세우는 '민주·효율'

1995년 겨울, 친구는 동국대 본고사에 응시했다. 서울에 머문 기간은 고작 나흘. 며칠 뒤 놀자고 만났더니 미묘하게 말끝을, 어이없게 말끝만 올렸다. 별 지랄을 다 한다며 나무랐다. 친구는 재수하고 이듬해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갔다. 서울에서 취업하고 결혼까지 해서 20년 넘게 살았으니 서울시민 행세가 제법 버젓하다.

"이제 우리 아는 서울 사람 아이가? 서울에서 태어났으니까."
"최소한 할배까지 3대는 살아야지 어디서 고향 세탁이고."

서울 토박이는 얼마나 될까? 언뜻 생각해도 많을 리 없다. 1950년 인민군이 점령하면서, 국군이 수복하면서 여기 사람 대부분이 삶이나 터전을 잃었을 테다. 70여 년이 흘렀으니 지금 40대 기준으로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영화 <암살>) 같은 느낌으로 서울 사람을 내세울 이는 드물다. 아직도 서울시민 대부분은 지역민 자손이다.

서울에서 삶은 욕망이고 성취며 동경 같은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일반적인 출세는 서울에 성공적으로 착상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서울로 진학하고, 서울에서 취업하고, 서울에서 살림을 꾸리고…. 기어이 그 비싼 주택까지 구입하면서 당당하게 지역민과 선을 긋는다.

경쟁을 거듭해 가까스로 얻은 성취가 대물림되면 서울시민 권리는 기본값이 된다. '지역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같은 아련한 구호는 낙오자끼리 구슬픈 합창이다. 2인조 그룹 미미시스터즈 노래 '우리 자연사하자' 가사를 빌려 말하면 이렇다.

"지역민들아, 너무 요구하지 마. 어차피 잘 안 될 거야."

정부 내 의사결정권자부터 정책 책임자인 고위 간부, 업무를 실행할 실무자까지 서울시민이다. 서울시민이 되고 싶은 사람이다. 그나마 입법부 구성원을 서울에서만 뽑지 않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당장 경남을 대변할 국회의원만 16명이다. 물론 16명 중 10명은 자기 집이 서울에 있다는 사실 따위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의사결정권은 서울에 있다.

서울시민에게 지역에서 삶은 낙오나 정체 같은 것이다. 그런 삶으로 이동하는 것을 자청할 리 없다. 욕망을 감추는 명분으로 민주적 절차는 얼마나 훌륭하고 소중한가. 구성원이 끝까지 버티면 서울시민 마음을 잘 아는 의사결정권자가 알아서 조정해낼 것이다. 민주적 절차로 이권을 지켜내기 버겁다면 경제적 효율성 같은 명분도 있다. 타당성 조사로 서울이, 수도권이 지역 따위에 밀리는 것을 본 적 있나?

민주적 절차와 경제적 효율성은 반지역적 정책을 더욱 강요한다. 돌이켜 보면 그 절차와 효율성을 아주 무시했던 정부가 지역 챙기는 마음은 더 살뜰하고 화끈했나 보다. 그나저나 늘 소외받는 듯한 지역도 경쟁력 있는 분야는 있다. 이를테면 송전탑, 핵발전소, 사드 기지 같은….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