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금 조성용' 의심받은 이건희 컬렉션
유치 경쟁 나선 지자체들 염두에 두어야

우리나라 지자체들이 미술에 이렇게 관심이 많았던 적이 있었나 싶다. 지난 4월 삼성가가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을 정부에 기증한다고 발표하고 대통령이 이 기증품을 전시할 '별도 공간'을 조성할 것을 지시하면서 전국의 크고 작은 지자체들이 유치전에 뛰어들었다. 경남에서만도 의령·진주·창원 등이 참전 중이고, 최근에는 개별 자치단체 차원을 넘어 경남·부산·울산 등 광역자치단체 연합, 남해안 영호남 자치단체 협의기구인 남해안남중권발전협의회 등도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일단 이해되는 부분이 크다. 우선은 콘텐츠의 힘. 대통령부터 앞장서서 별도 공간을 언급할 정도로 이번 기증품의 목록이 워낙 화려하다. 단원과 겸재, 박수근과 김환기, 그리고 이중섭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예술가들의 작품은 물론 모네와 샤갈 등 세계적인 화가들의 작품들도 대거 포함됐으니, 일단 유치할 수만 있다면 화제성으로나 구심력이나 이보다 더 강력한 소재가 당분간 나오기 어려울 것 같다. 여기에 1년여 앞으로 다가온 지방선거 일정이 휘발유를 부었지 싶다. 정치인이 전 국민의 이목이 쏠린 곳을 그냥 지나칠 리 없다. 하지만 모든 행동은 행동한 사람의 어떤 면을 드러낸다. 특히 '평소 안 하던 짓'은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의 초라한 밑천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이번 유치전에 뛰어든 지자체들 행보도 대부분 여기에 해당돼 보인다. 이들 지자체는 평소 지역 미술시장에 얼마나 관심을 갖고 투자했을까? 평소에는 관심도 없다가 흥행성만 보고 뛰어든 것이라면, 문화에 천박했음을 스스로 폭로하는 자책골이 되지 않을까? 물론 연극이 끝나고 난 뒤 부끄러움은 지역민의 몫.

혹시 판단에 도움이 될까 해서 2008년 초에 발견된 어느 비닐하우스를 소개한다. 당시 전국적인 화제는 단연 '삼성 비자금 의혹 특검'이었다. 비자금으로 구입한 미술품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특검팀은 용인 에버랜드에 있는 비닐하우스 네 동을 압수수색했다. 그때 수색팀을 막아선 삼성 관계자는 그곳이 "창고가 아니라 맹인 안내견과 구조견을 훈련시키는 사육장"이라고 우겼다. 막상 수색과 함께 미술품이 무더기로 발견되자 삼성 측은 "호암미술관이 낡고 비좁아 별도로 작품을 보관해온 수장고"라고 말을 바꿨다.

그때 최고 관심사는 그곳에서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이 나오냐마냐였다. 김용철 변호사가 이 작품을 홍라희 씨가 삼성 비자금으로 구입했다고 지목했기 때문이다. <행복한 눈물>은 압수수색에선 발견되지 않고 1년 뒤 엉뚱하게도 서미갤러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갤러리의 홍송원 대표는 자신이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구입했다고 주장했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참고로 홍 대표는 삼성가뿐만 아니라 CJ·오리온·동양그룹·남양유업 등 재벌가의 미술품 구매와 판매를 대행하며 재벌가 비자금 조성에 창구역할을 한 인물이다. 실제 그녀는 2010년대 비자금 조성과 횡령 등 혐의로 두어 차례 실형을 받은 적이 있다.

물론 비자금 조성이 1차 목표였다고 해서 작품의 가치가 훼손될 리 없다. 그 귀한 작품들을 사회 자산으로 기증한 행동 또한 칭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다만 이 기증품들이 지역의 이름과 자존심을 내걸고 유치전에 뛰어들 정도인지 잠시만이라도 따져보면 좋겠다. 문화예술은 '근사한 맛'이 있어야 한다. 지금 모습은 '숭어가 뛰니 망둥이도 뛰는 꼴'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