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문예진흥원 레지던스 사업
6개 단체에 작가 31명 입주·활동
탈북청년·작가부부·충청도민…
여러 지역·분야 사람들 '시너지'
일부 사업 기획자 "혜택 부족"

#19살이 되던 해 탈북한 이혁(33) 작가는 하동군 악양면에 산다. 지난 1일부터 경남문화예술진흥원이 주관하는 레지던스 프로그램 지원사업에 참여하고자 서울에서 하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레지던스 사업은 특정 단체 입주작가에게 생활 공간과 작업실을 비롯해 매달 창작활동비(40만 원), 재료비(30만 원)를 제공하는 예술인 지원 사업이다. 북한 당국이 운영하는 미술학교에 들어갈 정도로 손재주가 좋았다는 그는 한동안 미술을 손에서 놓고 지내다가 레지던스 사업을 찾아봤고, 이 과정에서 알게 된 공모에 지원해 지리산문화예술사회적협동조합 구름마 소속 입주작가로 활동하게 됐다. 그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분야의 작업을 하는 작가 4명을 만난 뒤로 좋은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며 "북한에서 한국으로 온 것처럼 서울에서 하동으로 내려오는 건 나에겐 큰 모험이었지만, 지금까지 모든 생활에 만족하며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 이혁 작가. /최석환 기자
▲ 이혁 작가. /최석환 기자
▲ 정창훈 작가. /최석환 기자
▲ 정창훈 작가. /최석환 기자

#충청도에 있는 한 대학에서 교수를 지낸 정창훈(66) 작가는 고향인 청주가 아닌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에 터를 잡고 작업 삼매경에 빠져있다. 경남문화예술연구원 입주작가로 선정돼 10평 남짓한 공간과 숙소를 얻은 지난달 1일부터 작업실에서 회화와 조형 작업을 하루 10시간씩 한다. 쉬는 날에도 그는 작업실로 출근한다. 쉬어도 작업실에서 쉬는 게 편해서다. 그와 함께 선발된 미술관 입주작가는 모두 6명. 미국에서 작품 활동을 해온 부부 작가와 대나무를 소재로 그림을 그려온 청년 작가 등이 같이 생활한다. 정 작가는 "젊은 생각을 하는 작가들과 작업을 하면서 시대성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 레지던스 사업의 가장 큰 장점"이라며 "작가층과 연령층이 다양해서 그런지 이곳에 있으면서 젊은 작가가 된 느낌이 든다. 배울 점이 많다"고 밝혔다.

경남문화예술진흥원 주관 예술인 지원사업 레지던스 프로그램이 올해 호응을 얻고 있다. 이 사업에 참여한 단체는 경남문화예술연구원(6명), 삼진미술관(5명), 리미술관(5명), 지리산문화예술사회적협동조합 구름마(5명), 대안공간 마루(5명), 레트로 봉황(5명) 등 6곳으로, 이들 단체에서 최종 선정된 입주작가는 31명이다. 작가들은 기관별 선발 과정을 거쳐 지난달 입주작가로 선정돼 길게는 한 달 반, 짧게는 2주간 작품 활동을 벌이고 있다.

작가들은 작업실과 숙소를 지원받고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할 기회를 얻는다.

경남문화예술연구원은 '작가, 시장을 만나다'라는 이름으로 여는 아트페어 참가 및 참관 행사, 작가 전시회 및 지역교류문화탐방, 청소년 예술 멘토링,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마을 만들기 상징조형물 제작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 있다. 작가 역량을 강화하고자 타 지역 작가 작품을 감상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한편 지역민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예술작품 제작 프로그램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멘토링 수업을 진행한다.

삼진미술관은 입주작가들이 주민과 함께 진북면·진동면 등을 돌아보며 지역과 예술의 연결지점을 찾는 프로그램 '아티스트 로컬투어'를 운영 중이다. 미술 평론가와 입주작가 간 대면 행사를 마련해 작품 창작과 작가 역량 강화에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경남 레지던스 지원단체들이 참여하는 전체 작가 연합 전시를 열어 창작 활동 결과물을 보여준다.

리미술관은 남해지역 예술 청년단체와 입주작가들의 만남 행사와 바람흔적 미술관 전시 관람, 레지던스 성과전, 1대1 비평 멘토링을 진행하며, 레트로 봉황은 시민들에게 작가들의 작업을 공개하는 전시와 입주작가 성과전 등을 운영한다.

또 대안공간 마루는 지역주민 대상 예술교육을 벌이는 한편 작가 비평 워크숍과 입주작가와 외부작가 간 합동 전시를, 그룸마는 경력이 단절된 작가, 청년예술 등을 지원하고자 대안공간 소나무 소속 녹색게릴라 작가들과 함께하는 미술 교류 워크숍과 녹색게릴라 교류전 등을 진행한다.

입주작가들은 호평 일색이다. 양원정(42) 작가는 "주부가 아닌 작가로서 다른 작가를 만나니까 예전에 열심히 작업하던 때 마음이 다시 생기는 것 같다"며 "아이가 태어난 이후 10년 동안 작업을 하지 못했었는데, 작품 활동을 재개하고 싶다는 생각을 되살아나게 해준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고마운 마음이 크다. 작가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좋은 아이디어를 많이 얻고 있다"고 말했다.

박길안(48) 작가는 "수원과 인천, 인도에서 살면서 작업을 해오다가 지난 1일 하동에 내려왔다"며 "작가들과 지역이 서로 상생할 수 있는 자리가 더 활성화되면 좋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작가들을 통해 배우는 점이 많다고 설명한 이도 있었다.

조현수(27) 작가는 "종일 작업을 하는 작가들의 결과물과 재료를 연구해온 것을 보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이야기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며 "작업이 흔들리는 시점에 이곳에 들어왔는데, 다양한 관점을 가진 선생님들을 통해서 보고 배우는 점이 많다"고 했다.

▲ 조현수 작가. /최석환 기자
▲ 조현수 작가. /최석환 기자
▲ 윤춘향 작가. /최석환 기자
▲ 윤춘향 작가. /최석환 기자

윤춘향(59) 작가는 "2005년부터 남편이랑 미국에서 작품 활동을 하다가 지금은 한국에 들어와 있는 상태다. 매일 하루 10시간 이상씩 남편과 함께 계속 작업만 하고 있다"며 "입주작가들의 작품을 보면서 좋은 영향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일부 레지던스 프로그램 기획자들은 △경남 출신 작가 60% 이상 선발 의무 △부족한 지원금(월 70만 원) 혜택은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운영하는 창동레지던시와 고양레지던시의 경우 입주작가 특정 지역 참여 비율 제한을 걸어 놓지 않고 있는 데다, 해외 작가를 입주작가로 선정하면 매월 많게는 100만~200만 원을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창수 마산현대미술관 관장은 "국내외 다양한 지역 작가를 모아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작업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게 레지던시 사업의 본질"이라며 "진흥원 레지던시는 본질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도내 작가 참여 비율을 제한하지 않고 새로운 작품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민정 독립기획자는 "입주작가 참여 비율은 탄력적으로 정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며 "지원금 액수가 너무 적기 때문에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경남문화예술진흥원 관계자는 이에 대해 "도비로 지원하는 사업이어서, 지역작가를 먼저 선발하는 것을 권장하되 나머지는 다른 지역 작가 등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며 "해외 작가들에게는 재료비를 지원 중이다. 선정 단체들의 의견을 수렴해 지침에 어긋나지 않게 프로그램을 추진해나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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