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 환수된 고사료 더미 속
박영주 지역사학자, 읍지 발견
단독 군사시설 방어영 승격 등
55쪽 분량 인구·지형 정보 담겨

2011년 일본으로부터 돌려받은 조선시대 사료 중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1870년대 창원지역 지리지가 발견됐다. 한 지역사학자가 이 시기 자료를 찾는 과정에서 나온 성과다.

2011년 12월 6일 일본 궁내청 서릉부가 보관하고 있던 한국 고사료 150종 1205책이 국내로 돌아왔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를 통해 일본으로 넘어갔던 자료들이다. 조선시대 주요 행사의 절차와 내용을 규정한 <조선왕조의궤> 80종 163책, 국내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유일본 6종 28책을 비롯해 국내 소장본과 합쳐야 완질이 되는 사료도 있어 주목을 받았다. 국립고궁박물관은 반환 다음해인 2012년부터 이 사료 원문 사진을 차례로 찍어 누리집에 공개하고 있다.

이 많은 양의 기록더미 속에서 의미 있는 지역사료가 나왔다. 1832~1899년 사이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국 읍지(옛 인문·지리지) 가운데서 1870년대 창원지역 자료가 확인된 것이다. 지역사학자 박영주(61) 씨가 최근 고궁박물관 누리집에서 읍지 사료를 뒤지다 이 사실을 발견했다.

창원부 읍지는 1책 안에 안동·경주와 함께 엮여 있다. 첨부된 고지도까지 55쪽 분량이다. 첫 장을 펼치면 두 쪽에 걸쳐 고지도가 나온다. 지금의 창원시 의창구 의창동 일대에 있었던 창원읍성, 그 옆의 창원향교, 안민동 일대에 있었던 안민역과 안민원도 표시 돼 있다. 구룡산, 전단산(지금 정병산) 등 대표적인 지역의 산들도 보인다. 내용을 보면, 당시(1876년 병자년 기준) 인구는 7308가구 2만 9618명이었다. 다만, 당시 창원부는 현재 마산지역 일부(칠원현)와, 지금의 진해구(웅천현)와 마산합포구 삼진지역(진해현)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이처럼 읍지는 각 지역의 인구·행정기관·지형·물산·인물·명승지 등이 체계적으로 정리돼 있어 지역사 연구의 토대가 된다.

현재 경남지역 지역사 연구에 주로 활용되는 1800년대 읍지는 <경상도읍지>(1832년), <영남읍지>(1871), <영남읍지>(1895년), 창원읍지(1899년) 등 4가지가 대표적이다. 대개 중앙정부 목적에 따라 각 부·군·현 단위에서 만들어져 광역 단위로 묶인 결과물들이다. 그런데 다른 자료와 달리, 1871년도 편찬 영남읍지 속에는 창원 부분이 빠져 있다. 박 씨가 그동안 이 시기 읍지 사료를 찾아왔던 이유다.

▲ 박영주 지역사학자가 최근 찾은 창원부 읍지의 첫 장에는 옛 창원지역을 그린 고지도가 수록돼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 박영주 지역사학자가 최근 찾은 창원부 읍지의 첫 장에는 옛 창원지역을 그린 고지도가 수록돼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마침 이번에 찾은 읍지 제작 연대는 1870년대 후반으로 추정된다. 지도에 회원서원이 폐지됐다고 언급된 점에서 흥선대원군 서원철폐령(1868년) 이후임을 알 수 있고, 호구조사 시점이 병자년(1876년)인 점, 창원부사 선생안(역대 재임 부사 목록)이 1878년 부임한 이종관 부사로 끝나는 점 등에서도 그 대략적 연대를 짐작할 수 있다. 박 씨는 "이 읍지가 <영남읍지>에서 빠진 부분인지, 다른 문서인지는 확인이 필요하지만, 그동안 창원지역 1870년대 읍지는 알려진 바가 없어서, 사실이라면 지역사 공백을 메울 의미 있는 사료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라고 설명했다.

이 사료에는 지금껏 알려진 다른 읍지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정보들도 수록돼 있다. 1871년 창원대도호부가 김해진관 관할에서 방어영(군사요충시설)으로 승격된 일을 기록한 점이 대표적이다. 다른 진의 지휘를 받던 입장에서 웅천·진해·천성·안골·제포·구산 등 휘하 진·포를 통솔하는 단독 군사시설이 된 것이다. 이는 창원지역이 조선 후기 군사방어 체제에서 요충지로 인정받았다는 뜻으로,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김정대 경남대학교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는 "최신 정보를 반영한 점을 고려할 때, 편찬 시점은 1879년 즈음이라고 볼 수 있다"라며 "특히 방어영 승격 내용이나 고지도에 포함된 정보들이 새롭다"라고 덧붙였다.

민긍기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도 지금까지 이 사료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는 지난 2005년 역주 창원부읍지를 발간하는 등 이 문제에 관심이 깊다. 민 명예교수는 "편찬 목적과 시대 상황에 따라 1900년대 이후 사료적 가치가 떨어지는 읍지 필사본들이 돌아다니곤 하지만, 이번 사료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볼 때 의미를 부여할 만하다"라면서도 "1871년판 영남읍지 누락분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라고 선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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