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앓는 발레리나 춤추게 한 신비한 힘
오늘 듣는 음악이 삶 끝까지 동행할 친구

며칠 전에 강의를 시작하려고 가방을 열다가 화들짝 놀랐다. 강의 파일을 담아놓은 하드디스크를 집에 두고 온 것이다. 그나마 컴퓨터의 가상공간에 넣어둔 자료가 있어서 그럭저럭 진행할 수는 있었지만, "내가 아직 이럴 나이는 아닌데"라는 탄식이 절로 나오는 사건이었다.

실수가 쑥스러워서 강의 시작 곡으로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오블리비언'(망각)을 들려주었다. 오블리비언은 1984년에 마르코 벨로치오 감독이 만든 영화 <엔리코 4세>에 삽입된 곡이다. 피아졸라는 이 곡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모든 인간의 행위에는 망각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모든 것은 스쳐 지나가는 망각이 아니라, 기억 속에 묻혀 잊히는 것일 뿐이다. 나를 기억에 묻고 너를 그 위에 다시 묻는 것이다."

피아졸라의 음악을 듣고 나자, 언젠가 배우 윤정희 씨가 술자리에서 해 준 얘기가 떠올랐다. 어느 날 부부 두 사람은 별것 아닌 일로 아침부터 말다툼했다. 사실 많은 부부가 별것 아닌 일로 자주 실랑이한다. 말다툼 후에 백건우 씨는 피아노만 치고, 윤정희 씨는 화가 풀리지 않아 방에 들어가 한참을 앉아 있었다고 한다. "확, 짐 싸서 나가 버릴까 생각하는데 자꾸만 피아노 소리가 귀에 들어오는 거예요. 심지어 그 소리가 너무 아름다워서 알 수 없는 눈물만 나는 거예요. 좀 지나니까 저이가 피아노에 다 쏟아냈는지 슬며시 와서 '아까는 내가 좀 심했어'라고 했어요. 그걸로 다 풀려버렸죠, 뭐. 음악이란 게 그래요."

두 사람 사이에 음악이 있었기에 긴 세월을 함께할 수 있었다는 얘기였다. 그 얘기를 나눈 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윤정희 씨가 알츠하이머로 힘들어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록 그녀의 기억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고 해도 음악만은 다른 형태로 남아 있으리라 생각한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우리의 몸도 늙고 정신도 늙어간다. 주소나 비밀번호가 기억나지 않아 인터넷 접속을 못 하기도 하고, 엊그제 했던 얘기를 새로운 얘기인 양 하게 되고, 가스 불을 끄고 나왔는지 알 수 없어서 집에 다시 들어가기도 한다. 그러니 베토벤의 작품번호가 안 떠오른다든가, 안나 네트렙코나 발레리 게르기예프 같은 외국 연주자의 이름이 퍼뜩 떠오르지 않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자신을 위로해본다.

그날 강의 마무리에 유튜브 영상 한 편을 소개했다. 스페인 발렌시아의 요양원에 있는 어떤 노인에게 봉사자가 헤드폰을 씌우며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들려주는 장면이었다. 그 곡을 들려주는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마르타 곤잘레스라는 이 할머니는 과거에 뉴욕발레단의 발레리나였는데 알츠하이머가 심해져서 모든 기억을 잃고 무기력한 상태였다. 그녀는 음악을 듣더니 서서히 팔을 움직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영락없는 백조의 모습이었다. 무려 50년 동안 잠들어 있던 백조가 푸덕거리며 날갯짓을 했다. 몸이 음악을 기억하고 있던 것이다.

수강생들과 그 영상을 보며 우리는 음악의 힘에 전율했다. 음악은 참으로 신묘해서 머릿속의 기억이 사라져도 나이테처럼 몸에 각인되어 머무는 것 같다. 인생의 화창한 시간은 해를 거듭할수록 짧게 느껴지는 법이다. 계절의 여왕이라 불리는 5월, 가까운 공연장을 찾아서 음악 한 곡이라도 더 담아두시기 바란다. 어쩌면 그것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동행해 줄 친구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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