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공동체 구심이던 학교 기능 유지
책·주민 어울림 활동으로 운영 활성화
기숙형 대안학교로 새로운 도전 나서

인구 감소 등으로 경남 도내 폐교 학교가 늘고 있습니다. 경남도교육청은 올해를 '미활용 폐교 재산 감축의 해'로 정했습니다. 지난해 도교육청 행정사무감사에서 도내 미활용 폐교 수가 전국에서 가장 많다는 지적이 제기됐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발생하는 폐교를 어떻게 잘 활용해나갈지, 경남지역을 포함해 전국 폐교 활용 사례를 8차례에 걸쳐 찾아 나섭니다. 지역공동체가 함께 만들었던 학교가 그저 허물어지지 않고, 이제는 독서·예술·치유 공간 등으로 새로운 지역민의 공간으로 재탄생하고 있습니다.

읽고 쓰고, 그림 그리고, 책을 만드는 공간. '누구나 책, 누구나 도서관'이라는 기치로 어린이부터 어르신까지 책을 읽고 책을 펴내는 '책마을해리'. 지난 6일 전북 고창군 해리면 월봉선산길 88에 있는 옛 나성초등학교 분교인 책마을해리를 찾았다.

◇도축장 될 뻔한 공간 살려내 = 학교는 지난 1936년에 광승 간이학교로 문을 열었다가, 나성초등학교를 거쳐 2001년에 폐교했다. 전북교육청은 학교 매각을 고민했고, 이곳에 요양병원·태양광발전소·도축장 등을 하겠다고 나선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대건(51) 책마을해리 촌장이 자신의 증조부가 손수 지어 기부한 학교를 다시 교육공간으로 활용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폐교는 책마을해리로 재탄생하게 됐다. 이 촌장은 2006년 학교를 인수, 경기도 파주출판단지에서 하던 편집자 생활을 정리하고 2012년에 이곳으로 왔다. 이전하기 전부터 가족과 마을 이웃들이 함께 손봤던 폐교는 지금 전국 각지에서 찾는 책 공간으로 거듭났다.

▲ 전북 고창군 해리면 라성리 '책마을해리' 전경. 2001년 폐교한 학교를 설립 기부자의 증손자인 이대건 촌장이 새로운 교육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가족과 마을 이웃들이 직접 손을 본 폐교는 현재 전국 각지에서 찾는 책공간으로 거듭났다.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 전북 고창군 해리면 라성리 '책마을해리' 전경. 2001년 폐교한 학교를 설립 기부자의 증손자인 이대건 촌장이 새로운 교육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가족과 마을 이웃들이 직접 손을 본 폐교는 현재 전국 각지에서 찾는 책공간으로 거듭났다.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올해 28년째 편집자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2000년대 초반 작은 어린이책 편집장을 할 때 전자책 얘기가 많았어요. 그때 종이·활자를 만들었던 우리 역사 문명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제가 하리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웃음) 전자책 광풍 시대에 종이책이 여전히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차에 학교를 인수하게 됐습니다. 증조부께서 교육공간으로 재산을 내놓은 공간을 이어받아 다시 책 중심으로 뭔가 하는 학교를 만들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지역과 함께하는 책마을 = 책마을해리는 △출판캠프 △청년출판대학 △시인학교 △그림책학교 △만화학교 △밭매다 딴짓거리 △인문공작소 △미디어학교 △책영화학교 △책영화제 등을 진행하고 있다.

글과 그림을 그리는 '누리책공방', 온 방 가득 책으로 둘러싸인 '책숲시간의숲', 어린이책이 가득한 '버들눈도서관' 등은 기존 교실 공간을 살렸다. 만화책이 가득한 '책마을만화공방', 숙소형 도서관인 '서고앉고누운 책, 동재·서재', 실내체육관이었던 '갤러리해리', 책을 다 읽을 때까지는 나올 수 없다는 '책마을책감옥' 등 공간도 기존 학교 공간을 활용해서 꾸몄다.

▲ 이대건 책마을해리 촌장.
▲ 이대건 책마을해리 촌장.

책마을해리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마을 주민들이 쓴 글을 묶어서 책을 내고 있다. 출판캠프에 참여한 이들의 소감을 묶은 <책숲에서 하룻밤>, 책마을 마을학교에서 글쓰기·그림 그리기 등을 한 내용을 묶은 <마을책, 오늘은 학교가는날>(2015년), <개념어 없이 잘 사는 법>(2016년), <밭매다 딴짓거리>(2017년) 등 책을 만들었다.

책마을해리에서 '2019 고창 한국지역도서전'이 열리기도 했다. 지금까지 책마을해리에서 400여 종의 책·발간물 등을 제작했다. 작가도 4000여 명에 이른다. 고창여고 학생 8명과 2017년에 만든 <흔들리며, 흔들리지 않고>는 우수 출판콘텐츠로 인정받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세종도서 교양부문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 책은 학생들이 경주 지진을 주제로 한국과 일본 내진 설계 비교, 지진 이후 전염병 양상 등 주제로 내용을 집필했다. 지역 교사와 출판 작업한 30여 권 중 3권이 더 세종도서에 선정됐다.

이 촌장은 책을 통해 지역공동화 문제를 해결하고, 지역 주민이 문화 생산자가 되도록 했다는 등 공로로 2019년 한국의 12번째 아쇼카 펠로로 뽑혔다. 1980년 미국에서 설립된 아쇼카는 세계적으로 시급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사회혁신기업가를 선정해 지원한다.

▲ 이대건 책마을해리 촌장이 온 방 가득 책으로 둘러싸인 '책숲시간의숲'에 서 있다. 이 공간에서는 캠프·강연·토론회·집담회 등이 이뤄진다.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 이대건 책마을해리 촌장이 온 방 가득 책으로 둘러싸인 '책숲시간의숲'에 서 있다. 이 공간에서는 캠프·강연·토론회·집담회 등이 이뤄진다.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책 만드는 대안학교 = 책마을해리는 계속해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지난해 전북교육청과 대안교육위탁교육기관으로 협약을 맺고, 올해부터는 기숙형 위탁 대안학교로 운영한다. 대안학교로서도 기지개를 켜고 있다. 14∼16세 청소년에게는 책을 읽고 쓰는 창작자 중심 배움터가 되고, 17∼21세 청년들은 1년 차에 공동 기획해 책을 만들고, 2년 차에는 소그룹이, 3년 차 졸업할 때는 자신만의 책을 만드는 형태로 운영한다.

전북교육청과 함께 이리동산초등학교 교과서도 만들고 있다. 지역 교과서에서 더 나아가 학교에 맞는 맞춤형 교과서를 제작하는 것이다. 학교 교사들과 동네 이야기 등 지역민 이야기를 담을 계획이다.

"동그란 안경 쓴 제 모습을 보고 해리포터를 닮았다고 합니다. (웃음) 쉽게 닳지 않는 금속으로 활자를 찍어낸 우리는 마법사의 핏줄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책 1만 권을 찍으면, 나 대신 책 1만 권이 돌아다니는 건데요. 이런 출판 행위가 마법입니다. 고창 해리면에서 누구나 책을 만드는 존재, 저자가 되는 마법을 경험하게 됩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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