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사랑과 전쟁 영승마을 창대한 풍경 속 오롯이
조선 풍류 즐긴 수승대 지나 옛 정취 품은 고택 길 운치

산은 기개가 있으며 강은 시원하고 맑다. 산바람과 물길이 빚은 널따란 분지는 푸르고 편안하다. 1862년 농민항쟁, 1951년 민간인 학살사건 같은 근현대사의 비극들을 모조리 견뎌낸 곳이다. 풍파를 다 겪은 후 너그러워진 느티나무처럼 거창은 서 있다. 그것이 이 고장의 첫인상이었다.

자전거유람단은 지난 23일 거창분지의 중심인 거창읍 한 강변 주차장에서 모였다. 초청 단원인 거창 파견 기자가 먼저 와있었다. 털털하고 여유로운 풍채.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나자 근방 거창교회와 거창YMCA를 가리키며 이번 유람에 도움이 될 몇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뒤에 보이는 게 거창교회인데 이런 교회를 중심으로 거창YMCA가 만들어졌어요. 이곳을 중심으로 1970년대부터 사회운동을 활발히 펼쳤죠. 교육이 중요하다고 여겨 1950년대부터 거창고등학교도 키웠고. 많은 일이 일어난 곳이죠."

이 고장 저항 정신이 곳곳에 있음을 일러주는 거창 사람의 당연한 자부심이다. 자전거유람단은 어느 고장보다 수려한 풍광, 그리고 이 고장에 지닌 깊은 역사를 염두에 두고 달려보려고 한다. 수승대, 거창창포원을 둘러보는 54㎞ 코스로 총 이동 시간은 3시간 57분, 소요 시간은 6시간 37분이다.

◇아홉산 자락 아래 영승마을

거창읍에서 건계정을 거쳐 마리면 장백마을, 영승마을, 위천면 수승대에 닿는 코스인 '외갓집 가는 길'을 달린다. 이 길은 2013년 5월 만들어졌다. 총 길이 17.7㎞로 자전거로 평균 1시간 30분, 걸어서 3시간 30분가량 걸린다. 갈림길마다 방향을 일러주는 팻말이 서 있다.

먼저 출발지에서 건계정까지는 2.5㎞로 위천 옆에 조성해 놓은 자전거 도로 겸 산책로를 뒤덮은 나무 그늘을 따라가면 된다. 길을 잘 가꾸어 놓아 평일인데도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랜만에 가볍고 경쾌하게 따르릉따르릉 청명한 소리를 내보는 일도 즐겁다.

건계정부터 영승마을까지는 도로와 농로를 타고 간다. 5㎞ 남짓한 거리다. 영승마을로 들어가는 들판, 들판을 가로지르는 길이 특히 아름답다. '가르마 같은 논길 따라 꿈길을 가듯'이라는 이상화 시인의 시 구절이 절로 떠오를 만큼 고요하고 쓸쓸하기까지 하다. 외갓집 가는 길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듯이.

평탄하고 조용한 강변길과 들판을 지나 영승마을 앞에 서자 서쪽으로는 오두봉이, 동쪽으로는 아홉산이라는 이름이 더 정겨운 건흥산 자락이 보인다. 오두봉은 가파른 절벽 같고 아홉산은 마을에 두른 편안한 병풍 같다. 그러나 역사는 아홉산 쪽에서 더 가팔랐다고 한다.

"여기가 삼국시대 때 백제, 신라가 서로 차지하려고 치열하게 다투던 곳이에요. 오른쪽 아홉산이 국경인 거죠. 전쟁이 심했던 곳이어서인지 백제 신라 화폐는 물론이고 당나라 화폐까지 나온다고 해요."

잠시 준수한 산세에 감탄하는 일행들에게 이곳 역사를 잘 아는 거창 파견기자가 일러준다. 저 건너 건흥산 정상에 있는 거열산성이 바로 전장이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는 백제 패망 후의 전쟁 기록까지 있다. 663년(문무왕 3년) 신라가 군사를 파견해 거열산성을 전초 기지 삼아 백제 부흥운동을 하던 세력을 공격, 700여 명의 목을 베었다는 기록이다. 오른편 산 위에 역사의 흔적이 파묻혀 있을 것이다.

이 마을엔 살벌한 전쟁만이 아니라 사랑 이야기도 있다. 서동요의 주인공인 선화공주 설화의 발원지인 것이다. 훗날 백제 무왕이 되는 서동을 따라 백제로 넘어가 왕비가 됐다는 삼국유사와는 사뭇 다르다. 이 마을에서 구전되고 채록된 설화는 선화공주가 서동을 만나기 위해 홀로 백제와 신라 국경선을 넘으려다 군사의 검문을 받고 첩자로 오인돼 목숨을 잃었다는 내용이다.

마을 입구에는 선화공주가 눈물을 뿌렸다는 '취우령' 표지판이 서 있고 마을 사람들은 매년 비극적 죽음을 맞은 선화공주의 넋을 달래기 위해 취우령제를 지낸다. 일행이 영승마을을 떠나기 시작하자 고글에 빗물 네 방울이 똑똑 떨어진다. "비 오려나 보다"하고 일행 중 누군가 말했다. 그러나 영승마을을 지나 다른 길로 들어서자 하늘이 흐릴 뿐, 비의 흔적은 사라지고 없었다.

▲ 수승대 물은 거울 같고 거북바위에는 그 옛날 학자들과 시인들이 읊고간 시들이 새겨져 있다. /최석환 기자
▲ 수승대 물은 거울 같고 거북바위에는 그 옛날 학자들과 시인들이 읊고간 시들이 새겨져 있다. /최석환 기자

자전거유람단은 이 마을에서 4㎞를 달려 위천우체국 인근 조그만 식당에서 어탕국수로 이른 점심을 먹고 수승대로 향했다. 길은 전과 다름없이 평탄하고 그저 길을 따라 페달을 밟기만 하면 된다. 10여 분쯤 달리자 '수승대 관광지'라고 적힌 입구와 넓은 주차장이 나타난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 솔숲에 난 오솔길을 따라가면 절경에 닿는다.

요수정과 수승대다. 요수정은 조선 전기 학자 신권(1501~1573)이 풍류를 즐기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수승대 건너편에 있다. 큰 바위를 주춧돌 삼아 지은 누정인데, 사방에 난간을 둘러치고 문을 달아 방도 만들어 놓은 특이한 구조다.

그 아래 수승대가 있다. 넓적한 바위 위를 미끄러지듯 흘러 우뚝 솟은 거대한 거북바위를 휘돌아가는 물의 풍경은 잔잔하면서도 역동적이다. 백제 멸망 무렵 사신을 여기서 송별하고, 돌아오지 못함을 슬퍼해 근심 '수' 보낼 '송' 자를 써서 수송대라고 했다. 그러다 1543년 퇴계 이황이 거창을 지나면서 내력을 듣고 시를 지어 보냈다고 한다. "수송을 수승이라 새롭게 이름하노니/ 봄을 만난 경치 더욱 아름답구나".

수승대에서 10여 분쯤 달려 황산마을 고택으로 가면 옛 정취를 담뿍 품은 돌담이 이어져 있다. 민박도 치는데, 처마 아래 국장댁이라고 적힌 현판 앞에서 '국장댁이다'라는 일행의 소리가 들린다. 왠지 모르게 다들 키득거린다. 한옥의 멋을 느끼고 수승대로 가는 길도 산책할 수 있으니, 가족과 함께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 거창 황산마을 고택 담장은 고풍스럽다. 한옥 곡선과 마을 신록 아래 더 빛을 발한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라면 이 한옥들을 두고 하는 말인가. 우리는 이 마을을 지나 5월이면 창포꽃 천지가 된다는 창포원으로 간다. /최석환 기자 csh@idomin.com
▲ 거창 황산마을 고택 담장은 고풍스럽다. 한옥 곡선과 마을 신록 아래 더 빛을 발한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라면 이 한옥들을 두고 하는 말인가. 우리는 이 마을을 지나 5월이면 창포꽃 천지가 된다는 창포원으로 간다. /최석환 기자 csh@idomin.com

◇거창생태공원 지나 드넓은 창포원으로

황산마을을 나와 당산리 모동리 완대리 내오리 연교리를 거쳐 영귀대를 지나 거창생태공원과 거창창포원을 둘러보는 30㎞ 길을 두 번째 구간으로 택한다.

경사도가 완만한 고개가 두 곳 있지만 수월하게 오를 수 있다. 화물트럭이 자주 지나치는 곳으로 안전하게 주행해야 한다. 모동리 부근에서 길게 이어지는 내리막길이 특히 시원하다.

마을 앞 도로를 따라 15.3㎞를 달려 영귀대에 닿는다. 완계천과 절벽, 숲이 어우러진 풍경 좋은 곳에 영월정이라는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백침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982년에 지었다고 한다. 절벽 쪽으로 난 갑판(덱) 길을 따라 가다 도평리 쪽 도로에 올라선 후 둔전들, 양지들을 배경으로 학리길과 양평길을 10㎞쯤 따라 밟는다. 거창생태공원이 있다. 조경이 훌륭하다. 무엇보다 창포꽃이 예쁘게 피어있다. 거기서 5㎞를 더 내달리면 드넓은 창포원에 닿는다. 수해를 입어 곳곳이 흙투성이다. 굴착기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수해도 빼어난 정취를 앗아가지는 못하는 법. 이륜 자전거와 사륜 자전거를 타고 창포원을 누비는 사람들의 표정이 행복해 보인다.

자전거유람단은 창포원을 뒤로하고 위천의 빼어난 풍경과 함께 다시 10㎞를 더 달려 출발지에 도착했다. 중간 지점에서 단원 두 명이 찰과상을 입는 사고가 있었지만, 무사히 유람이 끝났다. 거창 파견 기자가 어디론가 달려가더니 다시 돌아온다. 빨간약과 밴드를 사 들고서. 그러고는 찰과상을 입은 단원 둘에게 정성스럽게 발라준다. 그것이 거창이라는 곳의 마지막 인상이 되었다. 거창의 길을 느끼기 위해 우리는 왔지만, 거창의 굴곡진 고대사와 근현대사,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한 저항과 투쟁의 기억도 슬며시 가지고 돌아간다.

볼거리 먹거리 놀거리

◇수승대 =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에 가면 수승대 관광지를 볼 수 있다. 수승대는 백제와 신라가 대립하던 삼국시대 때 백제의 국경지대 역할을 하던 곳이다. 현판을 지나 수승대 안에 들어가면 화강암이 드러나는 계곡과 탁월한 자연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게 계곡 중간에 터를 틀고 있는 거북바위다. 거북이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가 머리를 빼꼼하게 내밀고 계곡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안겨준다. 바위 곳곳에는 시가 새겨져 있는데, 구한말 3대 문장가로 꼽혔던 이건창의 시도 여기에 적혀있다.

◇어탕국수 = 황강을 끼고 있는 거창에선 민물고기를 뼈째 갈아 만든 어탕국수(사진)를 먹어야 한다. 추어탕 국물이 연상되는 육수에 삶은 국수를 넣어 만든다. 걸쭉하게 우러난 국물에 다진 마늘과 고추를 듬뿍 넣어 먹는 맛이 일품이다. 시원하면서도 알싸한 게 술 먹고 바로 그다음 날 해장용으로 먹기 딱 괜찮을 것 같은 맛이 난다.

◇거창생태공원과 창포원 = 창포원은 남상면에 있는 지역대표 관광지 중 한 곳으로, 수목 16종 2596주, 초하류 263종 118만 1119본, 아열대식물 190종 4500본이 심겨있는 수변생태공원이다. 이곳에선 1~2인승 자전거뿐 아니라 4인승 마차와 6인승 마차도 대여해준다. 공원 안엔 어린이도서관과 키즈카페, 북카페 등도 마련돼 있어서, 가족 단위 관광객들에게 나들이 장소로 추천할만하다. 창포원보다 규모는 작지만 거창생태공원(사진) 역시 들르기 괜찮은 관광지다. 공원 안에 들어가면 산책하기 좋게 길이 닦여있다. 연꽃이 떠다니는 연못도 공원 안에 있다. 이곳 주변으로 나무 덱이 뻗어있는데, 그 위를 지나는 맛이 특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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