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배제 일찍 경험한 아이들
차별과 혐오 내재화할까 걱정돼

아이를 낳기 전에는 여가 시간의 상당 부분을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 데에 사용했다. 주말마다 카페 투어를 다니며 새로운 공간에서 인테리어나 건축을 접하고, 새로운 빵과 커피를 맛보는 것은 우리 부부의 낙이었다. 아이를 낳고 나서 카페에 갈 때 책이 든 에코백 대신 육아용품이 가득 든 짐가방을 챙기고, 책을 읽을 여유를 갖지 못하는 건 조금 슬픈 일이었다.

이전과 다름없이 우리는 카페에 자주 방문한다. 하지만 아이가 없을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던 '노키즈 존(No Kids Zone)'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알게 됐다. 부끄럽지만 아이가 없던 시절에는 노키즈 존 카페에 가서, 이 카페는 아이들이 없어 조용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 나니 노키즈 존이 사회에 널리 퍼진 소수자 차별의 양상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나라에서 소수자는 존재하나 존재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다. 이른바 정상인이라고 스스로 지칭하는 다수자들은 소수자들을 사회구성원으로서 적극적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고, 성가신 존재로만 치부한다. 공공장소에서 장애인을 향한 따가운 시선과 공공장소에서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지 않다.

흔히 노키즈 존에 찬성하는 입장의 주장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뛰어나니며 소리지르고 만지면 안 되는 물건들을 함부로 만지는 아이들을 제재하지 않는 일부 부모들 때문에 다른 손님들이 피해를 입는다는 요지다.

사적인 비즈니스 영역에서 손님을 골라 받는 것은 사장의 자유라고 말한다. 또 일부는 노키즈 존이 아닌 다른 카페에 가면 그만이지 않느냐고 반박한다.

그러나 아이와 아이 부모가 어떤 공간을 가려할 때 환영받지 못하는 경험을 배우는 것, 이것은 신체가 불편한 장애인들이 높은 턱이 있어 특정한 공간을 출입할 수 없을 때 느끼는 무력감과 같은 종류의 사회적 배제 경험이다.

사회에서 거부당하고 있다는 좌절감을 느낀 개인은 무의식적으로 학습된다. 그리고 자신을 배제한 사장과 자기는 어울려 살 수 없는 다른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이 '다른 존재'라는 인식이 무서운 것이다. 백인이 흑인은 잠재적으로 범죄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들을 배제하고 나와는 '다른 존재'라고 여겨 인종 갈등이 시작되는 것처럼 말이다. 대단히 큰 무언가만이 차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일상 속에 스며든 이러한 차별이 사회구성원 간 신뢰를 무너뜨리고, 혐오를 만들고 나아가 혐오 범죄를 양산한다. 차별이 일상 속에 스며든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

나는 카페의 노키즈 존에 반대하지만 찬성하는 사람들이 아이를 받지 않을 자유는 인정하기 때문에 아이를 가진 부모들이 적극적으로 노키즈 존 카페를 방문하지 않음으로서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아이다운 것은 의자에 가만히 꼼짝없이 묶여서 수저를 들고 얌전히 조용하게 밥만 먹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런 아이는 어디에도 없다. 궁극적으로는 아이가 건강한 사회구성원으로 자라날 수 있도록 부모와 어른들은 공공예절을 가르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또 아이가 뛰놀 수 있는 공간만이 허락되고, 정숙해야 하는 공간에는 출입조차 할 수 없다면 아이들은 어디에서 공공예절을 배울 수 있을까. 교육조차 받을 기회를 잃어버린 아이들은 커서 어떤 어른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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