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에서 시작해 50년 세월
2004년 창원 중앙동 자리잡아
실·바늘 바쁘게 지나간 자리
그것과 꼭 닮은 주름이 팼다

손을 찾아 나섭니다. 자식을 먹여 살리고, 가정을 지키고, 꿈을 키우는 '일손'입니다. 그 속에 담긴 소소한 인생 이야기도 살짝 덧붙입니다. 노동 여건 개선을 위해 앞장섰던 손부터 묵묵히 제 역할을 다한 손까지 두루 살피려 합니다. 거창한 의미를 담기보다는 일하는 우리 모두의 손, 그 이야기를 전하려 합니다. 장소가 어디든, 무슨 일을 하든, 얼마를 벌든 그저 '모두가 노동자'라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내일이 제131주년 노동절입니다. 노동절을 맞아 연재를 시작합니다. 올해 말까지 매주 1회가 '목표'입니다. 취재 과정을 영상으로도 전하려 합니다. 바삐 손을 움직여 보겠습니다.

50여 년 전 정수현(72) 씨는 월급으로 50원을 받았다. 한 달에 두 번 쉬었고 사흘씩 밤을 지새울 때도 잦았다. 이발 한 번 하고 나면 없어지는 월급, 열악한 노동환경이었지만 참았다. 어깨너머 일을 배우고 익히다 보면 '나만의 옷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서다.

사천에서 시작해 서울, 부산을 오갔다. 점점 실력이 쌓였고 일도 늘었다. 1970년대에는 마산으로 와 터를 잡았다. 몇 년 뒤 그는 양복·숙녀복 의상실을 차리며 어엿한 사장이 됐다.

몇십 번이고 날을 갈았을 가위가 말해주듯 지난 세월 그의 손 주름도 늘었다. 50대 무렵부터는 돋보기 안경을 썼다. 어깨가 쑤시고 손목이 아픈 건 예삿일이 됐다. 20대로 돌아간다면 이 직업을 택할까. '돌이켜보니 허무하다'는 말로 대신하는 그다.

▲ 수선사 정수현 씨가 29일 창원시 성산구 중앙동 미화 옷 수선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다. /김은주 인턴기자 kej@idomin.com
▲ 수선사 정수현 씨가 29일 창원시 성산구 중앙동 미화 옷 수선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다. /김은주 인턴기자 kej@idomin.com

주변 환경도 변했다. 잘나가던 의상실은 IMF로 위기를 맞았다. 맞춤옷을 찾는 발걸음은 끊겼다. 의상실 운영이 어려워진 그는 '옷 수선'으로 업종을 바꿨다. 창원 중앙동 한 수선집에서 직원으로 일하다가 백화점 수선 코너도 2년가량 맡았다. 그리고 2004년 중앙동에 '미화 옷 수선'을 차렸다.

수선할 옷이 들어오면 그는 머릿속에 개요를 그린다. 구상이 끝나면 손이 바빠진다. 밝은 조명 아래 시침질을 하고 칼로 실을 뜯는다. 재봉틀로 바느질을 하되 마무리는 반드시 바늘로 직접 한다. 옷 한 벌 수선하는 데 들이는 시간은 평균 1시간가량. 바느질할 때는 잡생각도 안 든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그의 수선집은 위기다. 손님을 기다리는 게 '지옥'이라고 말할 정도다. 그럼에도 일손을 놓을 생각은 없다.

"일어나서 갈 직장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데요. 한편으로는 1세대 수선사인 우리 세대가 은퇴하고 나면 수선업 계보가 끊기진 않을지 염려돼요. 아무래도 지금은 인기 없는 일이니까요. 나라도 더 해야죠."

쉼 없는 손에 의지가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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