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복지 제도 허상 꼬집는 이야기
심장마비 넘긴 노인 목수 일 놓게 돼
각종 수당 신청 복잡한 절차에 좌절
행정은 "더 증명하라"무성의한 답만

얼마나 가난한지, 구직활동을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얼마나 아파서 일을 못 할 지경인지. 안 그래도 서러운데 복지 혜택을 받으려면, 이 '얼마나'를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개인의 속사정은 중요치 않다.

마우스 커서가 뭔지 모르는 노인도 수당을 신청하려면 인터넷을 배우고 몸이 아파서 당장 일을 할 수 없어도 수당을 받으려면 거짓 구직활동을 해야 한다. 빠짐없는 서류와 복잡한 행정 절차는 필수. 기계처럼 사람을 대하는 관료들의 태도도 그러려니 해야 한다. 근데 이거 누구 좋으라고 하는 일이지?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영국 관료주의와 복지제도의 허상을 비판한 영화다. 지난 2016년 칸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 주인공 다니엘의 얼굴. /영화 포스터 갈무리
▲ 주인공 다니엘의 얼굴. /영화 포스터 갈무리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는 40년간 목수로 일한 성실한 시민이다.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내고 자녀 없이 혼자 산다. 그러던 어느 날 심장마비로 추락사할 뻔한 그는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의사도 쉬라고 한다. 다니엘은 질병 수당을 신청하고 다음과 같은 전화를 받는다.

"혼자서 50m 이상 걸을 수 있나요? 윗주머니까지 양팔을 올리실 수 있나요? 전화기의 버튼을 누르실 수 있나요? 혹시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으신 적 있나요? 배변 장애가 생길 정도로 통제력을 상실하신 적이 있나요? 자명종을 맞추는 건 가능하세요?"

다니엘은 심사에서 탈락한다. 그는 1시간하고도 48분이나 기다려 마침내 담당자와 통화를 한다. "심사 결과 12점인데 15점은 돼야 해요. 저희 쪽 의료 전문가의 견해로는 취업이 가능하세요." 다니엘이 항고를 하고 싶다고 하자 "심사관이 재심사를 한 뒤 다시 기각돼야 항고할 수 있다"고 말한다.

▲ 두 아이와 함께 런던에서 이주한 싱글맘 케이티(왼쪽)와 다니엘이 대화하고 있다. /스틸컷
▲ 두 아이와 함께 런던에서 이주한 싱글맘 케이티(왼쪽)와 다니엘이 대화하고 있다. /스틸컷

관료주의, 서류와 시스템의 굴레에 다니엘은 계속 제자리걸음이다. 그는 일자리플러스 센터에 가서 구직수당 신청과 항고 신청 양식을 요청하지만 관계자는 "인터넷 신청입니다"고 딱 잘라 말한다.

다니엘은 구직수당을 받기 위해 자필로 쓴 이력서를 들고 이 동네, 저 동네에 다닌다. 얼마 뒤 면접을 보러 오라는 전화 연락을 받지만 거절한다. "면목없소만 의사 소견상 아직은 일을 못해요.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그래야 보조금이 나와요."

다니엘은 발로 뛰어다니며 성실하게 구직활동을 했지만 담당자는 "부족하다, 더 증명하라"고 말한다. 급기야 그는 자존심을 잃고 구직활동을 포기한다.

지난 2014년 은퇴 선언을 한 켄 로치(85) 감독은 이듬해 총선에서 보수당이 집권하고 복지정책을 축소한다고 하자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들고 영화계에 복귀했다. 그는 '블루칼라의 시인'이라 불린다. 노동자, 이민자 등 소외계층의 편에서 그들의 애환과 목소리를 카메라에 담는다. 그리고 정치를 다룬다.

"사람들의 삶을 다룬 영화를 만들 때 정치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가족에 관한 영화를 만들때 그들의 삶을 결정하는 게 뭘까요? 그들이 어디에 살고 무슨 일을 하고 그게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휴가는 가는지,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그 모든 게 세대에 걸친 정치 투쟁의 결과죠. 그래서 거기서 벗어날 수 없죠."(<켄 로치의 삶과 영화> 중)

▲ 다니엘(왼쪽)이 벽에 답답한 맘을 표현했다. /스틸컷
▲ 다니엘(왼쪽)이 벽에 답답한 맘을 표현했다. /스틸컷

다니엘은 어렵사리 항고를 하지만 결과를 앞두고 유명을 달리한다. 그리고 항고 때 읽으려고 썼던 글은 유서가 된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난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난 굽실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그들을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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