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독립운동 기꺼이 몸 던진 지역여성
학생들과 그림책 만들며 널리 알리고파

언제나 3월이면 유관순 열사를 기념했다. 그를 기리는 노래를 부르고 누나라 해야 할지 언니가 맞는 건지 고민했지만 딱 그뿐이었다. 남성 독립운동가는 김구, 윤봉길, 안중근, 김원봉…. 그런대로 떠오르는 사람이 있는데 어쩐 일인지 여성 독립운동가는 유관순 한 사람에 기억이 멈추었다. 남자들만 조국의 국권을 침탈당한 것은 아니었고 여자라고 독립에의 의지가 없었을 리 없지만 왜 그토록 여성 독립운동가는 귀한 존재였는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막연히 당시가 여성이 독립운동에 나서기엔 여러 제약이 있었기 때문이었나보다고 생각했다.

작년에 창원시 도시재생지원센터에서 주최한 '젠더로 기록하다' 사업에 기획 단원으로 참여하면서 이런 생각이 얼마나 큰 무지의 소산인지 알게 되었다. 우리 창원시, 옛 마산만 해도 최봉선, 김봉애, 김두서, 김조이, 양한나 등 일반 대중이 알지 못했지만 조국 독립의 제단에 기꺼이 몸을 던진 많은 애국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이들 중에서 가장 우리들의 눈길을 끈 사람은 단연 김명시였다.

1907년 마산 동성동, 지금의 오동동 문화광장 부근에서 태어나 1949년 10월 부평경찰서 구금 중 사망할 때까지 그의 삶은 치열하고 뜨거웠다. 김명시는 지금의 성호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배화여고로 진학했지만 어려운 형편 때문에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어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하면서 어렵게 자식을 키웠지만 김명시의 어머니는 투철한 민족의식을 지닌 사람이었다. 김명시와 함께 오빠 김형선, 동생 김형윤까지 삼 남매를 독립운동가로 키웠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3·1운동 당시 앞장서서 만세를 부르다가 부상 당한 이력까지 있었다. 이런 가족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김명시는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여 사회주의 계열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모스크바에서 유학한 뒤 조선인 무장대와 함께 하얼빈 일본 영사관을 공격하는 등 항일 운동을 펼쳤다. 만주에서 조선의용군 부대 여성대원 지휘관으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여 용맹을 떨쳐 '백마 탄 여장군'이라는 이름까지 얻게 되었다.

1945년 11월 독립신보에 김명시는 21년간의 투쟁을 회고하는 인터뷰를 했다. 스스로는 '빈약하기 짝이 없는 기억'이라 겸손히 밝혔지만 그의 활약은 우리 독립운동사의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나는 단번에 이 용맹한 여성에게 매료됐다. 우리 지역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여성주의 관점을 공부한 뒤 김명시 학교 길을 조성하고 책을 펴내는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이렇게 멋진 여성이 우리 지역 출신이라는 사실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그 이름을 처음 접한다는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낀 것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없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 일인가. 작가 심훈이 소설 <상록수>에서 '누구든지 학교로 오너라. 배우고야 무슨 일이든지 한다'라고 외친 것처럼 더 많이 알리고 가르치는 것만이 이런 무지에서 벗어나는 길이었다.

창원시에서 양성평등 사업 수행자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우리 지역의 학생들과 김명시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만들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딸들과 함께 쓰고 그리는 창원 여성 이야기 1 김명시편' 제안을 해서 선정됐다. 이제 5월이 되면 우리 꿈꾸는 산호작은도서관이 김명시를 기억하는 딸들의 웃음으로 활기 넘칠 것이다. 이 사업을 통해 이 우리가 내딛는 이 한 걸음이 김명시라는 보물을 널리 알리고, 여성 도시 창원을 만드는 작은 주춧돌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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