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아킨 로드리고 '아란후에스 협주곡' 시그널 음악으로 유명
애수 머금은 기타 선율에 두근…늦은 밤 기다리던 때 생각 나

최근 한 장의 LP를 발견, 획득했다.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싶겠지만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음반이 손에 들어왔을 때의 기쁨은 제법 크다. 가끔 스스로 그리고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은 '아직도 가슴이 설레어 요동치게 하는 음악이 있는가?'이다. 음악으로 가슴 뛰기에는 두 가지의 원인이 있을 것이다. 마음에 들어오는 새로운 선율을 만났을 때, 또는 추억을 아련히 떠올리게 하는 곡과 마주쳤을 때. 이번엔 후자의 경우다. KBS에서 방영했던 영화 프로그램 <토요명화>의 시그널. 영화보다는 그 속에 담긴 음악과 먼저 사랑에 빠졌던 어린 시절, 영화를 수놓던 아름다운 선율에 '과연 어떤 영화이길래 이토록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일까?' 궁금증은 커져 갔다. 하지만 영화란 매체를 접하기란 쉽지 않았고 오직 극장에서만이었으며 그마저 개봉작이라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멋진 선율의 주인을 만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음악으로 영화를 상상할 수밖에 없던 시절, 주말이면 나의 호기심을 채워주던 고마운 친구가 있었으니 바로 <토요명화>와 <주말의 명화>다.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는, 제목마저 생소했던 영화도 좋았지만 음악을 통해 이미 그 제목이 익은 영화가 방영된다는 신문의 방송 편성표를 발견한 날이면 그 시간을 설렘으로 기다렸고, 시작을 알리는 시그널이 흘러나올 때면 심장이 쿵쾅거렸다. 저녁 9시면 으레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그보다 훨씬 늦은 시간 깨어있다는 사실 또한 가슴을 저릿하게 했을 것이다. 그 추억의 <토요명화> 시그널이 바로 스페인의 작곡가 '호아킨 로드리고'(Joaquin Rodrigo·1901∼1999)의 대표작 '아란후에스 협주곡'이다.

1901년 스페인 발렌시아 지방 사군토에서 태어난 로드리고는 3세라는 어린 나이에 앞을 볼 수 없게 된다. 하늘이 내린 아픔, 하지만 타고난 음악적 재능이 있었고 이를 알아본 아버지는 그에게 음악 교육을 받도록 한다. 이후 작곡가 '뒤카'의 지도로 작곡을 배우며 스페인 음악, 특히 기타 음악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그의 작품 목록을 들여다보면 실내악곡, 가곡, 합창곡 등 다양하지만 역시 그가 남긴 최고의 작품군은 기타를 위한 것들임을 알 수 있다. '네 개의 기타를 위한 안달루시아 협주곡', '기타 듀오를 위한 마드리갈 협주곡', '축제 협주곡', 그리고 기타 협주곡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의 하나라 할 '아란후에스 협주곡'.

▲ KBS <토요명화> 오프닝.  /KBS 뉴스 화면 갈무리
▲ KBS <토요명화> 오프닝. /KBS 뉴스 화면 갈무리

기타의 기원을 찾아가다 보면 그 역사의 아득함이 놀라운데 기타가 악기로 쓰이게 된 것이 기원전 3000년경이라 하니 무려 5000년의 시간을 간직한 것으로, 그것조차 추정이니 아마 훨씬 더 오래된 것일 것이다. 그 무리 또한 다양해 기타족, 류트족 등으로 나뉘어 각 지역과 시대적 차이로 비슷한 모양이지만 이름만 다른 것을 합쳐보면 수십 가지다. 이러한 기타의 부흥기라면 역시 16세기를 전후한 바로크 시대로 '사계'로 우리에게 친숙한 작곡가 '비발디'와 더불어 당시의 많은 작곡가가 기타를 위한 작품들을 남긴다. 이후 새로운 악기들의 등장과 작품 규모의 확대로 점차 악기의 중심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쇠퇴의 길을 걷지만 기타라는 악기의 매력을 곁에 두는 작곡가들은 늘 존재하였다. '베토벤'과 비슷한 시기를 살다 간 에스파냐의 작곡가 '페르난도 소르'(Fernando Sor·1778∼1837)는 기타 연주자들에게 소중한 레퍼토리를 제공하고 있으며 특히 그의 연습곡 중 10번은 양희은의 1991 앨범에서 '나무와 아이'라는 노래로 가사가 붙여져 우리에게 더욱 친숙하게 다가온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으나 스페인에서 대부분 생을 보내며 작곡가로 활동한 '보케리니'(Luigi Boccherini·1743∼1805) 역시 그 매력에 전도돼 기타가 포함된 실내악곡을 그의 대표작(기타 오중주 4번 G. 448 '판당고')으로 남기고 있다.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 역시 기타를 사랑한 음악가로 빼놓을 수 없으며 바이올린 실력만큼 기타 연주에도 능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악기가 가진 한계에도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던 기타는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으로 유명한 에스파냐의 작곡가 '타레가' (Francisco Tarrega·1852∼1909)에 의해 근대적 주법이 확립됐으며 '아란후에스 협주곡'과 같은 걸작이 탄생할 기초를 마련, 마침내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아란후에스 협주곡', 16세기에 지어진 아란후에스 궁전의 정원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는 이 곡에는 스페인이라는 나라가 지닌 라틴적 감수성과 아름다운 자연풍광이 담겨 있다. 하니 기타를 사랑하는 민족, 스페인 국민에게 이 곡은 자신의 정체성과 감수성을 대변하는 곡으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 작품의 2악장은 너무도 유명한데 애수를 머금은 선율이 마치 사막에서 마주한 밤의 절대고독처럼 비현실적이며 아득하다. 그리고 이 선율이 바로 <토요명화>의 시그널로, 독일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베르너 뮐러' (Werner Muller)가 편곡한 버전을 사용한 것이다. 이쯤이면 <토요명화>와 더불어 영화 프로그램의 양대 산맥이던 MBC <주말의 명화>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을 것이며 그 시그널 또한 귓가에 맴돌 것이다. 그 곡은 바로 영화 의 주제곡으로 시그널로 사용된 것은 스탠리 블랙(Stanley Black) 버전으로 이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영화음악으로 꼽힌다.

▲ '아란후에스 협주곡' 앨범.  /심광도
▲ '아란후에스 협주곡' 앨범. /심광도

기타에 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또 한가지는 가장 친숙한 발현악기라는 것이다. 먼저 발현악기란 무엇인가? 이는 손가락이나 다른 어떠한 도구로 현을 퉁겨서 내는 악기를 말하는 것으로 하프, 류트, 그리고 기타가 대표적이며 그랜드 피아노와 생김새가 유사한 쳄발로 역시 이에 속한다. 우리나라의 가야금 역시 발현악기를 이해함에 많은 도움을 주는데 이처럼 줄(현)을 이용한 악기들 중 소리를 내는 방법에 따라 구분한 것이 바로 발현악기, 찰현악기 그리고 타현 악기이다. 찰현악기란 마찰, 즉 긁어서 내는 악기를 말하는 것으로 서양악기로는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 등이 대표적일 것이고 국악기로는 해금과 아쟁이 있다. 그리고 줄을 두드려 내는 타현악기로는 피아노가 대표적이다.

영화와 관련된 음악을 안내하다 간혹 듣곤 하는 말은 "어떻게 그렇게 영화의 장면과 대사를 잘 기억하냐?"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와 생각해 본 이유는 바로 '절실함'이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언제 다시 만날지 알 수 없는 절실함. 이는 곧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는 집중력으로 이어졌고 내가 영화를 볼 때의 자세로 습관처럼 남아있다. 하니 이불 속에 숨어 바라보던, 비록 작은 스크린이지만 웅대하게 펼쳐지던, 어쩌면 흑백이었을지도 모를 그 순간이 잊히지 않는 것이다. 원하는 영화를 언제든 볼 수 있는 콘텐츠 풍요의 시대, 하지만 왜인지 가슴이 뛰지 않는다. 하니 감정의 일렁임과 감동이 예술작품 감상의 목적이라면 진정 풍요로운가. 꼭 영화나 음악이 아니라도 말이다.

"아직도 당신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것들이 남아 있나요?"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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