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고사직 거부한 정은 송전탑 점검 하청 발령
위험한 일로만 여겼는데 진짜 노동자 옥죄는 건
원청의 성과·해고 압박

노동자의 고용불안, 직장 내 성차별, 원청과 하청의 수직적 구조는 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다. 과거보다 나아졌다고 하지만, 부당한 일을 겪어도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노동자가 여전히 많다. 회사에 '찍혀' 인사상 불이익을 받기 싫어서다. 해고는 노동자에게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정은은 7년간 회사에 헌신했다. 하지만 우수사원이던 그에게 돌아온 건 권고사직. 권고사직을 거부하던 정은은 하청업체에서 1년간 일하면 원청으로 복직시켜주겠다는 회사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영화는 '해고를 당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정은의 여정을 담았다.

정은은 송전탑을 수리하고 보수하는 하청업체에서 일한다. 예상대로 원청 사무직 직원이던 정은과 하청업체 송전탑 노동자는 서로 괴리감을 느낀다.

▲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속 7년 동안 근무한 회사에서 하청 업체로 파견된 정은이 송전탑을 오르고 있다. /스틸컷
▲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속 7년 동안 근무한 회사에서 하청 업체로 파견된 정은이 송전탑을 오르고 있다. /스틸컷

소장은 정은을 보자마자 "여긴 왜 왔어요"라고 한다. "무슨 말씀이세요"라고 묻는 정은에게 "공부해서 본사 간 사람이, 여긴 물가는 싸지만 사람도 싸요. 여기에 그쪽 자리 없으니 돌아가쇼"라고 매정하게 말한다. 송전탑 노동자도 정은을 "원청"이라고 부르며 얼마 안 있어서 사라질 존재라고 본다.

우리는 손쉽게 스위치만 누르면 전기가 들어오는 삶을 산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목숨을 걸고 일하는 송전탑 노동자가 있다. 영화 속에서 그들은 작업복도 제공되지 않고 안전도 보장되지 않는 현실에서 일한다. 원청업체는 '성과와 효율'을 빌미로 끊임없이 하청업체의 목을 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아니 그렇게 다들 말한다. 사무직 노동자 정은의 눈에는 송전탑 노동자의 일이 고되게 보인다. 원청에서 온 정은의 고군분투가 안쓰러워 도움을 주는 막내에게 정은은 "막내 씨, 애들 때문에 고생이죠?"라고 말을 건넨다. 그러자 막내는 "고생 아닌데. 일하는 거 재밌어요. 일반 사람들이 못 보는 풍경도 매일 볼 수 있고"라고 덤덤히 말한다.

▲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속 7년 동안 근무한 회사에서 하청 업체로 파견된 정은이 송전탑을 오르고 있다. /스틸컷
▲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속 7년 동안 근무한 회사에서 하청 업체로 파견된 정은이 송전탑을 오르고 있다. /스틸컷

이태겸 감독은 노동 문제를 꾸준히 다루었다. 처음 연출한 영화 <1984: 우리는 합창한다>는 울산 조선소 노동자를 다루었고 <복수의 길>은 이주 노동자가 주인공이다. 데뷔작 <소년 감독>도 주인공의 아버지가 영화 노동자다.

이 감독은 이번 영화에 대해 "영화 제작이 무산되어 우울증을 겪고 있을 때 '사무직 중년 여성이 지방 현장직으로 부당 파견이 되었는데 그곳에서 굉장한 치욕을 겪었음에도 결국 버텨냈다'는 기사를 보고 영감을 얻어 영화를 기획했다"고 밝혔다.

정은은 고소공포증에도 불구하고 송전탑 노동자와 같이 철탑에 오른다. 영화는 정은의 독백으로 끝난다.

"내 목줄을 타인의 손에 쥐여주고는,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외다리 지옥길을 걷고 있다. 그렇게 외다리 지옥길을 걷지 않기 위해,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누군가에 의해 노동의 가치와 값이 매겨지지 않는 사회, 누군가에 의해 해고되지 않는 사회가 오길 바란다.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고 외치는 노동자가 더이상 '미약한 혼자'가 아니길. 

 

■ 노동을 다룬 국내외 영화

▲ 영화 <카트> 스틸컷.
▲ 영화 <카트> 스틸컷.

<카트>(부지영 감독)

한국사회 비정규직 문제를 전면에 내세워 화제가 된 작품이다. 주인공은 대형마트 비정규직 노동자. 정규직 전환을 눈앞에 둔 선희(염정아)와 싱글맘 혜미(문정희), 청소원 순례(김영애), 순박한 아줌마 옥순(황정민), 88만 원 세대 미진(천우희)은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영화는 2007년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 영화 <미안해요, 리키> 스틸컷.
▲ 영화 <미안해요, 리키> 스틸컷.

<미안해요, 리키>(켄 로치 감독)

주인공 리키(크리스 히친)는 택배기사다. 하루 14시간 주 6일 일하고 휴가를 쓰려면 제 돈을 들여 대체 기사를 구해야 한다. 리키 아내 애비(데니 허니우드)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다. 간병인인 그는 오전 7시 30분부터 밤 9시까지 쉴 틈 없이 일한다. 성실하게 행복을 찾고 싶었던 리키. 일을 하면 할수록 그들의 삶은 더 불안정해진다.

▲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 스틸컷.
▲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 스틸컷.

<내일을 위한 시간>(다르덴 형제 감독)

벨기에의 장 피에르 다르덴과 뤽 다르덴 형제는 <로제타>와 <더 차일드>로 황금종려상을 두 차례 수상한 거장이다. 복직을 앞둔 주인공 산드라(마리옹 코티아르)는 동료들이 자신과 일하는 대신 보너스를 받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주말 동안 16명의 동료를 만나 보너스를 포기하고 자신을 선택해달라고 설득한다.

▲ 영화 <실크우드> 스틸컷.
▲ 영화 <실크우드> 스틸컷.

<실크우드>(마이크 니콜스 감독)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주인공 실크우드(메릴 스트립)는 미국 오클라호마 핵발전소의 여성노동자다. 그는 방사능 오염을 폭로했다가 한 날 의문의 교통사고로 숨진다. 그날은 실크우드가 방사능 피해 사실을 폭로하려고 뉴욕타임스 기자를 만나러 가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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