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제차순 할머니 자서전
동생 응원에 글쓰기 도전
사라호 태풍 등 묘사 생생
가족들에게 쓴 편지 뭉클

▲ 〈 인생살이 그렇더라 〉 제차순 지음

최근 사무실로 부쳐온 책 한 권, 가격도 도서정보(ISBN)도 없는 비매품이지만, 양장본에 깔끔한 표지 디자인까지 만듦새가 좋다.

제목은 <인생살이 그렇더라>. '제차순, 삶의 이야기'란 부제가 달렸다. 고성에 사시는 제차순(78) 할머니의 자서전이다.

일제강점기가 끝날 즈음 태어나 한국전쟁과 산업시대를 거쳐온 다분히 개인사지만, 또 다분히 보편적일 수도 있는 인생이다. 책 속에 담긴 할머니의 삶은 집안 어른들이나 동네 어르신들에게 들은 이야기와 똑 닮았다. '그때는 다 그리 살았다'는 상투적인 말이 현실적으로 와 닿는 책이다. 모두가 공유하는 큰 사건, 떨치지 못한 오랜 관습이 삶을 관통해 온 까닭이다. 그래서 이 책이 애잔하면서도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 제차순 할머니 결혼 사진.  /책 갈무리
▲ 제차순 할머니 결혼 사진. /책 갈무리

특별한 기교 없이 시간순으로 기억들을 엮었다. 전체 300쪽인데 '첫 친정 나들이', '첫 딸 출산', '첫 딸 이름 짓기' 식으로 120여 편에 이르는 소제목만 이어 붙여도 이야기가 될 것 같다. 할머니가 만년에 자신의 삶을 책으로 정리할 수 있었던 건 글쓰기라는 오랜 꿈 덕분이다.

"어릴 적 제 꿈이 수필가가 되고 싶었는데 시대를 잘못 만났는지 희망사항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30년만 늦게 태어났더라면 내 인생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해봅니다. (중략) 언제부터 내 살아온 이야기를 한번 쓸까 생각했지만 쉽지 않아 주저했었고 자녀들의 응원에 힘을 얻고도 용기가 나지 않아 망설였는데 막냇동생 민숙이의 격려와 조언으로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253쪽)

여기서 막냇동생 민숙이는 고성 출신 제민숙 시조시인이다. 시인은 할머니를 고향 품은 어머니 같은 언니라고 말했다.

▲ 새마을 지도자 시절 제차순(뒷줄 오른쪽) 할머니.  /책 갈무리
▲ 새마을 지도자 시절 제차순(뒷줄 오른쪽) 할머니. /책 갈무리

책에 적힌 기억들이 나름 세세해서 거대 역사보다 개인의 삶을 다루는 미시사(微視史) 자료 가치도 있을 것 같다.

1959년 사라호 태풍 이야기를 보자.

"그때 내 나이 17세 팔월 한가위를 하루 앞둔 밤, (중략) 밤새 얼마나 태풍이 불어닥쳤는지 문을 꼭 닫고 내다보지도 못하였다. 아침 날이 밝아 살펴보니 부침개 바구니가 다 날아가 여기저기 부침개가 흩어져있고, 지붕도 날아가고 마을 앞 넓은 시내는 물바다가 되어 어디가 길인지 어디가 둑인지 알 수가 없었다. 논둑도 다 무너져 애써 지어놓은 논농사는 다 쓰러지고 넘어지고 흙탕물에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24쪽)

다음으로, 1963년 1월 16일이라고 정확한 날짜가 적힌 결혼 이야기다. 당시엔 보통 이런 식으로 결혼을 했다.

"내 나이 20세, 그때 시골에선 이 나이가 되면 보통 결혼을 시켰다. 중매쟁이가 오고 가는 줄도 몰랐다. 부모님이 말을 해주지 않으니 뉘 집 딸이 참하고 예쁘다는 소문이 나서 여기저기서 혼담이 들어온 모양인데 의논도 없었다. (중략) 맞선도 안 봤다. 보는 사람도 있지만 보고 안 하면 흉 된다고 저만치 총각을 불러놓고 처녀를 지나가게 하여 보고 가는 정도로 혼인이 성립된다. 섣달 22일 결혼식을 올렸다."(26쪽)

▲ 꽃밭에서 웃고 있는 제차순 할머니.  /책 갈무리
▲ 꽃밭에서 웃고 있는 제차순 할머니. /책 갈무리

이 외에도 남편의 잦은 술주정으로 힘들었던 이야기, 새마을 지도자로 활동했던 이야기, 하나둘 아이를 낳고, 조금씩 살림을 키워가는 이야기가 다큐멘터리 필름처럼 이어진다.

뒷부분에는 시매들(시누이의 경상도 방언), 동생들, 올케, 며느리, 아들, 딸, 며느리, 손자, 손녀들에게까지 일일이 쓴 편지가 실렸다. 편지들을 쓰며 아마도 할머니는 그래도 한 인생 잘 살았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다음은 할머니가 어여삐 여기는 막내딸에게 쓴 편지다.

"사람이 살려면 태산도 있고 평지도 있듯이 인생구비가 열두 구비라 만날 좋을 수만 없겠지만 그래도 노력하고 인내하고 그것이 인생살이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 앞엔 희망이 있고 내일이 있는 것이다."(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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