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심 "마흔 돼서야 행복 찾아야겠다 싶더라"
이은경 낮에는 간호사 밤에는 배우 '이중생활'
"열정·사명감 커…여성 후배들 위해 오래 활동하고파"

지난 24일 오후 통영시민문화회관에 경남 여성 연극인들이 모였다. 통영연극예술축제의 부대행사로 열린 경남 여성 연극인 워크숍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경남 여성 연극인이 모인 자리는 처음이었다. 이날 워크숍은 '여성 연극인들의 활동영역 확장과 역량강화'를 목표로 거창한 이름을 내걸었지만 사실, 여성 연극인으로서 느꼈던 문제점과 고민을 허심탄회하게 나누는 자리였다.

애초 여성 연극인들이 현장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취재하고 싶었지만 참가자들이 부담스러워했다. 그래서 도내 여성 연극인 중 오랫동안 현장에서 활동 중인 정명심(61), 이은경(57) 배우를 만났다.

경남 여성 연극인 워크숍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연극분야 취재를 하면서 만났던 인터뷰이 대부분이 남성이었고 도내 시군지부 지부장이나 극단 대표들도 남성이었다. 연출가 역시 여성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두 배우와의 만남이 소중했다.

정명심 배우는 김해지역 극단 이루마의 단원으로 활동했다. 초등학교 시절 성당에서 열린 성극(聖劇)에 참여하면서 연기의 매력에 눈을 떴다. 성인이 된 후 부산지역 극단 부활에서 5년 동안 배우로 활동했고 결혼 후 사정상 그만뒀다.

"마흔 살이 되니 '인생은 무엇일까', '내가 왜 살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삶이 허무해졌다. 의욕도 없고 재미가 없었다. 이렇게 넋없이 살다가 세월만 보낼 것 같았다. 그래서 인생을 살면서 가장 행복할 때가 언제였을까 생각했는데 바로 무대에 섰을 때였다. 다시 행복을 찾아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극단 이루마에 들어갔다."(정명심)

이은경 배우는 진해지역 극단 고도의 전신인 극단 터의 창립 멤버였다. 마산대 극예술연구회에서 활동하면서 연극과 연을 맺었다. 간호사 국가고시를 이틀 앞두고 친구와 극단을 찾아갈 정도로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낮에는 간호사, 밤에는 배우로 이중생활을 했다.

"결혼하면서 시부모님을 모셔야 했고 아이 세 명을 낳으면서 10년 동안 연극을 잊고 살았다. 그러던 중 언니들이 여자끼리 작품 하나 하자며 불렀는데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거다. 간간이 연극에 출연하다가 지난 2000년 극단 고도가 창단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이은경)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19년 경력단절여성 경제활동 실태조사를 보면 여성 3명 중 1명은 결혼과 출산, 양육 등으로 경력단절을 경험했다. 경력단절 이후 다시 일자리를 얻기까지는 7.8년이 걸렸다. 한국연극인복지재단이 주최하고 주관한 2017 연극인 단일 실태조사에 따르면 여성 연극인의 비율은 20~30대가 가장 높고 40대부터 줄기 시작했다. 그 사유는 결혼과 출산, 자녀교육 등으로 추정된다.

▲ 정명심(61,왼쪽) 배우와 이은경(57) 배우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서후 기자
▲ 정명심(61,왼쪽) 배우와 이은경(57) 배우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서후 기자

도내 여성 연극인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경남연극협회에 따르면 도내 여성 연극인의 비율은 30~40% 정도고 경력단절 이후 다시 연극계에 돌아오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길다. 10년 만에 돌아온 이 배우를 두고 다들 "굉장히 빨리 무대로 돌아왔다"고 말하는 분위기가 현 상황을 말해준다.

두 배우가 말하는 여성 연극인의 삶은 어떨까. 대략 예상은 했지만 그들에게 현실은 더 녹록지 않았다. 두 배우는 "정말 원더우먼처럼 시간을 초 단위로 나누어 움직여야지 할 수 있다"며 "연극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 없으면 그렇게 못한다"고 말했다.

"젊은 후배들이 연극이 좋아서 극단에 왔다가 현실에 부딪혀서, 애 때문에, 시댁이 반대해서 연극을 더 못한다고 하면 보내줄 수밖에 없다. 여성 연극인으로서 살기가 참 어렵고 힘들다. 극 중 난관을 헤쳐나가는 역보다 더 우리의 현실이 아프고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을 하는 이유는 연극에서 받는 행복감과 사명감 때문이다."(정명심)

"연극을 하는 며느리를 둔 시부모님을 설득하기가 어려웠다. 연극을 잘 모르는 시어머니를 위해 내가 출연한 연극에 초대하고 연습이 있는 날에는 될 수 있으면 남편이랑 함께 퇴근을 했다. 그렇게 가랑비에 옷 젖듯 서서히 시부모님이 이해를 해줬다. 항상 '어디 가노'라고 묻던 시어머니가 '야야 연습하러 안 가나'라고 말하더라. 그때 무척이나 고마웠다."(이은경)

연극계는 남성 중심적인 문화가 강했다. 지난 2018년 미투(#MeToo· 나도 당했다) 운동이 터지면서 연극계 권위자들이 법과 여론의 심판대에 올랐다. 이후 연극계 스스로 자정 노력을 했고 젠더 감수성 강화를 위한 워크숍 등이 열렸다. 이번 경남 여성 연극인 워크숍이 열리게 된 계기도 경남연극협회의 한 단계 더 성숙한 성 평등 문화를 위해서다. 올해 취임한 고능석 경남연극협회 회장은 여성 연극인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걸 잘 정리해서 협회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영하겠다는 계획이다.

두 배우에게 미투 운동 이후 연극계에 바뀐 점이 있느냐고 묻자 이들은 "미투라는 게 여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남녀 모두 서로 존중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계기가 됐고 성인지 감수성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이들은 여성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앞으로 오랫동안 연극배우로서 활동하고 싶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성 후배들에게 조언을 잊지 않았다.

"막상 말을 하려고 하니 지금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다.(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서) 지금은 누에고치로 살지만 우리는 비단을 만들어내는 과정 속에 있단다.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좀 더 사랑하고 내가 누구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단다. 사랑한다."(정명심)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괴롭고 힘들면 그건 고통이지 행복이 아니다. 즐겁고 재밌게 작업을 해야 오래갈 수 있다. 힘들 땐 같이 수다도 떨고 다 같이 함께 오래하자."(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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