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주의 상담, 트라우마 악화
당사자 고통에서 방향 찾아야

"현장 노동자들은 다시 먹고살기 위해 동료가 죽거나 자신이 재해를 당했던 그곳으로 가야 한다. 일상에서 끊임없이 외상을 경험하며 감내하고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이은주 마창거제산추련 상임활동가는 이번 자료집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에 관한 피해 노동자들의 발언을 구체적으로 정리했다. 증상은 △처참했던 외상 △재경험·침습 △회피 △인지·감정의 부정적인 변화 △각성과 반응으로 분류된다.

삼성중공업이나 태안화력발전소 사고와 같은 중대 재해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재해가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는 대부분 현장 노동자가 트라우마(사고 후유 장애)를 겪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 상임활동가는 "상처를 당한 누구라도 같은 증상을 경험할 수 있다. 노동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특히 이 상임활동가는 트라우마 상담을 두고 여러 대책 중 한 가지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사고 진상규명, 재발 방지책, 아픔을 치유할 다양한 지원 체계를 갖추는 것이 노동자 개인과 가족한테도 필요하다. 노동자가 다시 돌아갈 일터가 위험하다고 생각할 때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맞물려 돌아가야 하고, 상담 체계를 놓고 모든 것을 갖춘 것처럼 이해하기보다는 사회적 관점으로 확장해야 한다."

▲ 이은주 마창거제산추련 상임활동가가 노동재해 트라우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br /><br />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 이은주 마창거제산추련 상임활동가가 노동재해 트라우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현재 우리 사회는 트라우마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강력한 외상의 상처는 기억으로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낱알처럼 흩어져 온몸과 마음에 남는다. 그 당시 비슷한 소리 등에 노출되면 당사자가 다시 느끼는 것이 단적인 예다. 상처들은 노동자 스스로 인식하고 정리가 돼야 말로 표현하는데, 그러지 못해 처음에는 말문을 닫게 된다. 다음으로, 말 못하게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다. 현장에서 '왜 너만 유독 그러느냐'며 약한 사람 혹은 무능력자처럼 대하는 분위기다. 세월호 참사도 마찬가지다. '이제 정리되고 봉합돼야 할 사안이 아니냐?'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상처를 지닌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한다."

이 상임활동가는 제도 개선책을 제시하는 것보다 노동자들의 고통 속에서 먼저 방향을 찾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꾸준히 귀기울인 까닭이다. "사고가 터지면 대책이 세워지지만, 빈 구석이 생기고 고통을 앞질러 가는 경우를 자주 봤다. 상담만 해도 몇 건을 했다는 식으로 숫자 중심으로 평가하는 성과주의가 난무하는 것 같은데, 이런 것이 트라우마를 악화하는 요인이 된다. 사회적 통합과 노동자의 현장 복귀 과정을 들여다보는 게 더 중요하다."

끝으로 이 상임활동가는 '트라우마의 아이러니(역설)'를 전했다. "트라우마가 한편으로는 사회적으로 큰 변화와 대안을 만들어내는 희망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이제 시작인 것 같다. 현장에서 만난 노동자들도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하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책을 만들어내려면 먼저 듣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자료집 제목에는 '산업재해'가 아닌 '노동재해'가 쓰였다. 노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재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자료집은 산추련과 두산공작기계노조·볼보건설기계코리아노조, 전국금속노조 경남지부 두산모트롤지회·대우조선지회·삼성테크윈지회·성동조선해양지회·퍼스텍지회·현대로템지회·현대모비스지회·현대위아지회·현대위아창원비정규직지회, 화물연대 경남지부가 자금을 모아 함께 제작했다. 산추련은 지역 현장에 200부를 배포하고, 300부는 신청을 받아 전국 어디든지 보낼 계획이다. 누리집(mklabor.or.kr/v3)에서 PDF 파일로도 공유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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