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서 묘향산, 설악산, 압록강을 순례하는 이은상

18세기 영·정조 시대에는 문인들의 기행문, 기행시, 기행 산수화가 유행이었다. 옛날에도 가을철 단풍을 구경하는 인파로 북적이는 곳이 있었다. 평안남도와 평안북도의 경계선에 위치한 관서 제일의 명산 묘향산이 그랬다. 정조 때 시인이며 학자인 박제가는 묘향산 단풍 구경의 감격을 아름다운 기행문으로 남겨 놓았다. 그는 묘향산을 열흘 동안 유람하고 돌아와서 <묘향산소기(妙香山小記)>를 썼다. 동행인이 많았다. 기생과 악공까지 데리고 간 호사스런 유람이었다. 패기만만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스무 살의 시인은 이 여행기에서 글솜씨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산수를 느끼고 묘사하는 산수기의 새로운 차원을 연 작품이라고 평가받는 수작이다. 보고서처럼 무미건조하지도 않고 감탄을 남발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산을 보는 안목이 없지도 않다. <개벽>지 1923년 8월 제38호에는 박춘파의 '일천리(一千里) 국경으로 다시 묘향산까지', 9월 제39호에는 '묘향산으로부터 다시 국경 천리에'라는 글이 실렸다. 신의주, 압록강 부근의 중국 국경, 개천, 회천을 돌아보는 여정에서 묘향산을 들린 이야기이다. 여정에서 묘향산을 들른 이유는 명승지일 뿐만 아니라 '국조 단군 신인의 탄강지'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일본인들의 글과는 달리 민족적인 분위기의 글이긴 했지만 민중의 삶이 담겨있지는 않았다.

금강산을 다녀온 다음 해인 1931년 6월 11일부터 노산은 '묘향산 유기(遊記)'를 동아일보에 35회 연재하였다. '묘향산 유기'는 이 산의 수많은 기봉(奇峰), 벽계(碧溪), 담폭(潭瀑) 마다 수놓은 특유의 해학과 이곳을 거처 간 옛 선인묵객(先人墨客), 고승대사들의 시문(詩文)으로 가득하다. 대은화상(大隱和尙)과 함께 한 이 순례는 아름다운 명소 섭렵에 그치지 않고, 이 산의 으뜸인 비로봉, 원만봉 등 7개 연봉으로 주산군(主山群)을 이룬 묘향의 가장 멀고 험한 안산지역까지 탐험하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노산의 산행이 이어졌다. 이화여전 교수로 있을 때에는 여름방학 기간에 황해도 황주군 주남면에 있는 정방산을 등정하고 내려오다가 성불사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는데 여기서 시조 '성불사의 밤'을 썼다. 동아일보 기자로 근무하고 있던 1933년 10월에는 8일간 설악산을 종주하고 '설악행각(雪岳行脚)'이라는 기행문을 동아일보에 썼다. 서울에서 소양강을 거쳐 인제를 지나 설악에 들어선 이후 설악산의 유명한 골짜기와 봉우리를 답파한 내용이다. 그런데 행각(行脚)이라는 용어는 불교계 용어로 스님이 구도의 길을 걷는 걸 의미하는데 일반적으로는 도피행각, 애정행각 등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안갸'라고 읽는데 講演行脚(강연행각·강연여행), 史跡行脚(사적행각·사적답사), 全國行脚(전국행각·전국순회), 遊說行脚(유세행각·순회유세)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한다. 일제시대 때에도 1927년에 '支那行脚(지나행각, 지은이 後藤朝太郞)', 1934년에 <旅の自然>(지은이 長谷井市松)에는 '內外金剛山草行脚の記'가 수록되어 있다. 1926년에는 滿鮮考古行脚(만선고고행각, 고고학 입문서)이, 1932년에는 星座行脚(성좌행각, 천체관측 입문서)도 있었다. 

1935년 6월에 조선일보로 옮겨서 편집국 고문으로 있을 때부터는 더욱 국토순례가 활발해졌다. 동양화의 대가인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과 함께 문묵동도(文墨同途)로 길을 떠나 평안북도 정주, 선천, 의주 등지를 순례하면서 만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지역을 보고 느낀 점에 대하여 '만상답청기(灣上踏靑記)'를 써서 조선일보에 1935년 5월부터 연재하였다. 압록강 유역 일곱 고을의 산수 답파기이다. 답청기란 삼월 삼짓날에 들에 나가 파랗게 난 풀을 밟고 거니는 것을 일컷는 것으로 문인과 묵객이 어울려 변경을 함께 다니면서 느끼고 본 것을 기록한 것이다. 답청은 봄풀을 밟기는 하지만 짓밟는 것은 아니다. 겨우내 얼었던 보리밭을 밟듯이 들뜨지 말고 잘 자라라는 정성으로 어루만지는 것이다. 정지용은 노산이 다녀온 선천과 함께 의주, 평양 등지를 다녀와서 동아일보 1940년 1월 28일~2월 15일에 화문행각(畵文行脚)을 게재하였다. 1935년 7월에 노산이 쓴 시조 '압록강(鴨綠江)'에서는 조국산하의 하나인 압록강의 장관이나 아름다움을 찬양하기보다는 압록강을 통하여 역사의 흐름 속에서 겪었던 민족 수난의 비극과 조국의 흥망성쇠를 돌이켜 보고 있다.

 

굽이쳐 흐르는 물, 여보 이게 압록강이요?

물은 연방 흐르는데, 발은 붙어 안 떨어진다.

이 강아 작기나 하렴. 한번 안아라도 보게.

무수한 의인(義人)들이 울며 넘던 강이길래.

눈 못 감는 원혼(寃魂)들이 울며 도는 강이 길래.

두다리 펼치고 앉아 목을 놓아 버린다.

오제암(烏啼岩) 까마귀들 집 찾아 날아든다.

 

1936년 1월, 조국의 역사와 민족을 사랑하고 조국 광복의 정신을 기르는 뜻에서 민족의 슬픈 정한을 넣어 '조선산수가'라는 장가 몇십 절을 지어 곡을 붙여 널리 알리려 했으나 일제가 거의 대부분을 강제로 수거했다.

그리고 1936년 10월에는 위창(韋滄) 오세창(吳世昌)과 함께 신라 진흥왕(534~576년) 순수비를 보러 함경남도 이원군으로 갔다. 이때 위창은 73세였고 노산은 39세의 청년이었다. 함경남북도 도계를 달려 중강진까지 연결되는 마천령산맥의 지류인 마운령까지 갔다. 이곳은 한반도의 지붕인 개마고원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 파묻혀 있던 순수비를 찾은 주민들에 의해 다시 일으켜 세우고 비각을 지어 낙성식을 하는 자리에 초청받은 것이었다. 서울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는 1,000리나 되는 먼 거리였다. 노산은 이후에도 무등산, 백양산, 초월산, 마니산, 속리산, 가야산 등 많은 산을 오르내리며 기행문을 발표하였다.

동아일보의 국토탐방과 조선일보의 제주도, 지리산 탐승단

1937년 7월에는 조선일보사에서 국토탐방운동을 시작하면서 50여명의 제주도 탐승단(단장 이은상)을 모집하였다. 만주사변이 일어난 해였다. 노산이 조선일보사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다음은 한라산에서 노산이 쓴 기도시이다.

 

천지의 대주재(大主宰)시여,

나는 지금 두 팔을 들고, 당신의 내리시는 뜻을 받드려 하나이다.

아끼지 마시옵소서. 자비하신 말씀을.

평화와 즐거움으로 찼던, 당신의 나라를

피와 눈물과, 아우성 속에 쓸어 넣은,

창생(蒼生)의 가증한 죄를 들어.

여기 엎디어 사(謝)하나이다.

지금 내 몸을 싸고 두른, 구름과 안개

이것은 당신 옷자락.

옷자락 끝을 붙들고서, 정성껏 이마를 조아려 당신 앞에 아뢰나이다.

천지의 대주재시여.

당신은 아시리이다.

흥망의 긴 세월도 번개같은 한 순간이라.

 

제주를 출발해 관음사를 거쳐 정상에 오른 후 영실과 이승생을 거쳐 제주로 하산했는데 등반대의 규모는 한국인과 포터들을 합쳐 80여 명의 대부대였다고 한다. 노산의 한라산 등반기에는 두보(杜甫)의 시에 '조정삼산출해심(潮淨三山出海心·조수가 맑으니 세 개의 산이 바다 가운데로부터 드러나오는구나)'이라 하였고, 장효표(章孝標)의 김가기(金可紀)가 신라(新羅)로 돌아가는 것을 보내는 시에 '조정삼산출해심(潮淨三山出海心)'이라 하였으며, 또한 경남 남해군 이동면 양하리(二東面 良河里)와 이곳 제주도 서귀포와 조천포(朝天浦) 등처에 서불(徐)의 제명(題名)의 석각(石刻)이 있다고 하여, 중국 신선설의 최고, 최대의 것이라 할 삼신산 불사향(不死鄕)은 분명히 조선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여 오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으나, 과연 제(齊)나라 선왕(宣王)이나 연나라 소왕(昭王)과 진시황, 한무제의 이상향이 조선이었으며, 조선에서도 이 제주도 한라산이 그 세 개 중에 하나이었던가 여부는 이제 대답할 사람이 없음이 한(恨)이 되거니와, 나는 여기 이 섬, 이 산이 삼신산의 하나이건 아니건 헤아릴 것 없이, 우리의 거룩한 산악, 신비한 영장(靈場·신령스런 터)으로 생각하여 감격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정지용도 한라산을 다녀왔다. 1938년, 김영랑, 김현구와 함께 강진, 목포를 거쳐 제주를 다녀와서 기행문 '남유, 다도해기'와 두 번째 시집 <백록담>을 썼다.

한라산을 다녀온 다음해인 1938년 8월에는 조선일보사에서 100여명의 지리산 탐승단을 모집하였다. 노산의 수필 '청춘20년기'에는 '……그리고 그다음 해인 1938년에는 소위 중일(中日) 전쟁이 터졌다. 그 해에도 조선일보사에서는 지리산(智異山) 탐승단(探勝團)을 모았다. 그때는 내가 신문사를 물러난 때였다. 경술국치 이후 그래도 신문지면 위에서 일본군이라고 써 왔던 것인데 거센 압력에 어쩔 수 없이 '아군(我軍)'이니 '황군(皇軍)'이니 하는 문자가 역사적으로 처음 적히기 시작한 해였다. 나는 그것 때문에 사내(社內) 투쟁을 하다가 마침내 붓을 꺾고 물러났던 것이다'는 내용이 있다. 이처럼 <조선일보> 주간 자리를 분개한 마음으로 박차고 나와 그 울분으로 전국 순례의 길에 올랐던 것이다. 비록 신문사는 그만 두었지만 지리산 기행문은 자신이 쓰고 싶었다고 한다. 노산이 쓴 기행문은 조선일보에 게재되었다. 

 

보라! 나는 지금 천왕봉 머리에 올랐노라

구름과 안개를 모조리 다 헤치고

세상에 가장 높은 자 되어 하늘 위에 올랐노라

 

하늘과 땅과 바다와 여기 가득 찬 온갖 것들

작은 모래알과 나무껍질까지라도

모두 나를 위하여 있는 것임을 알았노라

 

'인생을 잠깐이라 인생은 눈물이라'

누가 너희에게 그릇된 도를 전하더냐

인생은 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여기 복된 자니라

 

노산의 글은 단순한 여행 감상문이 아니었다. '지리산 탐험기' 연재 가운데 '연기(緣起)의 사사석탑(四獅石塔)'에 관한 글을 통해 당시의 일본인 학자 관야(關野) 박사의 그릇된 감식과 주장을 지적하였다. 관야 박사는 당시에 구례(求禮) 화엄사(華嚴寺) 효대(孝臺)에 있는 사사석탑(四獅石塔) 탑중(塔中)의 입상(立像)을 자장(慈藏)이라고 하였고, 조선총독부도 그것을 믿어 간행물마다 관야의 주장대로 따랐으나 노산이 남추강(南秋江)의 '해동명승기'를 인용하여 그 입상은 자장율사가 아니고 연기조사(緣起祖師)의 어머니의 상(像)이라는 것을 밝혀서 바로잡았다. 따라서 조선총독부의 간행물 일체도 노산의 주장을 따라 수정되었다. 우리의 문화재에 우리의 정신을 불어 넣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노산은 '강서유기(江西遊記)'의 서문인 '신록(新綠)의 고허(古墟)'에서 '나는 차라리 문재(文才)의 곰배팔이가 될지라도, 학식의 소경이 될지라도 내 역사, 내 민족, 내 땅에 대한 사랑의 병신은 되고 싶지 아니합니다. 조선은 노래할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 곡조(曲調)로 노래한 자가 얼마입니까? 조선은 공부할 것입니다. 그러나 껍데기 문자로 공부한 자가 얼마입니까?'라고 하였다. 이 글은 청전 이상범 화백과 함께 국토순례를 출발하면서 편지형식으로 쓴 글이다.

지리산을 다녀온 한 달 후인 9월에 전남 광양에 있는 백운산으로 내려갔다. 노산은 1975년에 펴낸 <노산(鷺山) 산행기(山行記)> 머리말에서 '일제시대의 일이라 그 글들은 혹은 삭제도 당하고 혹은 압수도 당하는 여러 가지 난관을 겪지 않을 수 없었거니와'라고 하였다. 일제시대 언론에 대한 탄압과 검열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이 당시 여행기를 쓴 문인은 여러 명 있었다. 정인보는 1934년 여름 안재홍, 박한영, 윤석오와 함께 남쪽 지방을 여행하면서 '남유기신(南游寄信)'을 써서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 평소 여행을 즐기던 백석은 노산이 그만두기 한해 전인 1937년, 조선일보를 먼저 그만두고 여러 고장을 돌아다니면서 고유의 민속, 명절, 향토음식 같은 갖가지 풍물과 방언 등을 취재해 시에 담았다. 그는 이런 풍물과 방언은 특히 '남행시초(南行詩抄)'를 기점으로 '함주시초(咸州詩抄)', '고성가도(固城街道)', '서행시초(西行詩抄)' 등 해마다 기행시 형식의 연작시를 썼다.

해방 전 10대 수필집 가운데 하나였던 기행문집 <반도산하(半島山河)>는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소화 16년인 1941년에 <삼천리>사에서 발간된 총 290쪽의 이 책은 발행자가 친일파 김동환이다. 3년 후 1944년에 재판이 나왔는데 발행자는 대산 수(大山 壽)다. 김동환의 창씨개명이다. <삼천리>사는 김동환이 운영하고 있었다. 이 책에는 이광수, 김억, 염상섭, 노천명, 한용운, 모윤숙, 노자영, 함대훈, 이병기, 양주동, 박종화, 전영택, 이기영, 최정희, 이은상, 김동환 등 16명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 중에서 한용운, 이기영과 이광수, 김억, 모윤숙 등의 문학적 노선은 서로 대립되는데도 불구하고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 책에 실린 이광수의 '비로봉 기행'은 그의 <금강산 유기>에 수록되었던 것이며, 한용운의 '명사십리'도 그전에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명사십리행'을 부분 부분 재수록한 것이다. 김억의 '약산 동대'는 영변의 약산과 동대, 그곳의 명물인 진달래를 찬미하는 글이고 염상섭의 '수원 화홍문'은 수원에 있는 조선조 건축예술의 보배인 화홍문을 조선심의 상징으로 찬양하였다. <반도산하>의 전체 글 16편은 승경 중심 8경, 사적 중심 8경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들은 각자 1편씩의 기행수필을 수록하였다. 승경은 영봉 금강산, 약산 동대, 수원 화홍문, 선경 묘향산, 명사십리, 부전고원, 천안 삼거리, 남원 광한루이고, 사적은 부여 낙화암, 패성 모란봉, 남한산성, 의주 통군정, 합천 해인사, 개성 만월대, 탐라 한라봉, 경주 반월성이다. 사적 중심 8경의 수필은 최정희의 '만월대와 선죽교', 이병기의 '부여 낙화암', 양주동의 '패성 모란봉', 김동환의 '경주 반월성'과 노산의 작품이다. 노산은 '탐라의 한라산'이라는 기행문을 실었다. 제주의 삼성혈, 산방굴, 정방폭포, 천지연폭포 등을 둘러보고 한라산 백록담을 오르면서 그곳에 얽힌 전설과 경승에 대한 소회를 풀어놓은 글이다.

이 당시에는 내선일체론에 의해 우리 민족의 정치적 독립을 배제한 전통성과 향토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시인 우무석은 <반도산하>가 우리 조국의 산하를 찬양하는 기행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것은 일제 식민지의 문화체험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고 한다. 지역 시조문단에서 조국 산하의 역사에 대한 글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애국이라고 평가하는 분위기에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전혀 항일의 의미가 아니고 내선일체의 정책에 순응하는 논리였다. 이은상 역시 불행하게 식민지 조선 땅에서 살았던 장삼이사(張三李四)에 다름 아니라는 평가도 있다.

노산이 1936년에 펴낸 '조선산수가'의 후편이라고 할 수 있는 <조국강산>은 1954년 민족문화사에서 발간했는데 높은 산 이름난 산 40개, 긴 강, 이름난 강 21개 그리고 동해, 남해, 서해의 바다 9개를 합한 70개를 대상으로 정하고 여기에 첫 노래, 끝 노래를 합한 총 72편에 이르는 조국사랑의 노래를 실었다. '조선산수가'를 다시 검토하고 첨가하여 만들고, 분류하였으며 노래마다 해설을 붙였다. 노산은 머리말에서 '남녀노소, 상하귀천 어느 누구나 조국을 사랑하는 모든 동포 앞에 '조국의 찬송가'로 바치기 위해 출판한다'고 하였다. 1954년판에 이어서 1974년, 1981년에 각각 수정판을 냈다. 수정판의 책 앞부분에는 '조국강산'이라는 같은 제목의 노래 2곡의 악보가 실려 있는데 하나는 현제명 작곡(장일남 편곡)이고 또 하나는 이흥렬이 작곡한 노래이다. 명승지 화보 7편도 게재했다. 1974년에 횃불사에서 펴낸 <조국강산>을 보면 노산의 종교인 조국에 대한 찬미가, 찬송가이다. 책은 산노래, 강노래, 바다노래 그리고 언젠가 가야할 북녘의 산하와 5대 사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각각에 대해 시조형식의 노래가사를 적고나서 그 아래에 자세한 설명을 해놓았다. 1981년에 노산문학회가 펴낸 수정 4판은 횃불사에서 출판하였다. 이 책의 면지의 그림은 초판에 실은 청전 이상범 화백의 휘호이고 새로 쓴 제목 글씨는 평보 서희환이 썼다. 편집자는 노산이 국토순례, 산악등척으로 기행문의 최고봉이며, 수필문학의 궤범이며, 시조문학 연구의 선구자라고 하면서 '이 책의 노래를 읽는 이마다 반드시 국토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통일에 대한 불붙는 의욕이 다시금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또 다른 기행문이 <가을을 안고>라는 제목으로 1971년에 횃불사에서 발간되었는데 충청북도의 2시, 10군을 답파한 기행문을 한국일보에 1964년 11월부터 게재한 것을 수정 보완한 책이다. 머리말은 1966년에 쓴 것이 수록되어 있고, 책의 앞부분에 노래 2곡이 수록되어 있다. '우리 속리산'은 '막대를 던져 짚고 찾아드는 곳 / 속리산 법주사야 미륵의 도장 / 은폭동 물소리에 가벼운 걸음 / 천왕봉 구름 안개 헤치고 섰네 / 장하다 소백산맥 뻗어 내려와 / 높이도 솟아오른 우리 속리산 / 장하다 소백산맥 뻗어 내려와 / 높이도 솟아오른 우리 속리산', '탄금대'는 '외로운 악성 우륵 가얏고 당겨안고 / 고국 정한을 열두 줄에 올릴 적에 / 심장에 피끓는 소리도 섞여 들었으리다 / 승패를 묻지 마오 거룩한 그 죽음을 / 몸이야 천길 절벽에 솟구쳐 떨어져도 / 그 넋은 만고에 남아 울며 외치오리다 / 그 넋은 만고에 남아 울며 울며 외치오리다', '우리 속리산', '탄금대' 2곡 모두 김동진 작곡이다. 글은 '서남으로 내려 간다'로 시작하여 '추풍령 마루에 서서'로 끝나는 데 이 답파를 시작할 때에 충북도지사와 속리산 스님의 초청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노산의 국토순례는 항일운동인가? 양심적 지식인의 도피인가?

노산은 세 가지 소원이 있다고 했다. '국토산수(國土山水)를 두루 밟아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예찬해보고 싶은 것이 일원(一願)이요, 거기에 실려 있는 우리 민족의 오랜 문화를 두루 뒤져 역사와 전통을 발양(發楊)해보고 싶은 것이 이원(二願)이요, 또다시 방방곡곡에서 이 민족과 이 문화를 이끌고 나간 모든 고현(古賢)을 숭모함과 아울러 오늘 현실에 있어서도 고상한 지조를 지켜 구국행(救國行)을 짓고 있는 모든 동지들 앞에 경례해보고 싶은 것이 삼원(三願)이다'고 하였다. 노산에게 있어서 국토와 자연은 자신과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노산은 스스로 '나와 강산순례는 둘이 아니요 하나다. 지나간 내 생애의 반 이상의 시간을 강산순례에 바쳤고 또 내 문학작품의 반 이상이 강산순례에서 얻어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강산순례는 한갓 위안이나 교훈만이 아니다. 거의 생리화된 종교이기도 하다. 내 지식과 사상이 온통 거기에서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정이 넘었습니다. / 어쩌면 이리도 고요할까요 / 수정같은 하늘에 / 달도 졸고 있습니다. // 이 밤도 나는 엎디어 / 당신의 이름을 외웁니다. // 당신은 / 내 면류관이요 / 내 기도요 / 내 노래입니다. // 그리하여 바라보다 / 다시보면 내 자신입니다. // 이 순간 당신과 나는 / 분명 둘 아닌 하나입니다.

 

'조국에 바치는 노래'라는 부제가 달린 작품 '당신과 나'에서 조국을 당신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때 당신이란 단순히 상대방에 대한 호칭이 아니라 다시 보면 내 자신인 일체감 속에서 갖는 당신이다.

김동리는 노산이 작고한 뒤에 쓴 조사(吊辭)에서 '선생은 글과 사람만 아끼시고 찾으신 것이 아니라 이 나라, 명산, 대천(大川) 그리고 유서 깊은 고찰(古刹), 명소(名所)들을 찾지 않은 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학자나 여행가들이 찾는 역사적 지식이나 풍광(風光), 견문들을 위한 것이기보다 한국의 마음과 겨레의 숨결과 정서에 영혼을 거기서 찾으시고 어루만지시고 시문으로 승화시켰습니다'라고 하였다. 정인보는 '노산은 산을 벗하여 수십 년을 살고 있다. 어쩌면 노산은 산을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 자나 깨나 산으로 산으로만 헤매는 그 정열과 정신에 나는 감동된 바 크다. 산 같은 마음으로 사는 노산이 퍽 부럽고 존경심마저 갈 때가 많다'라고 했다.

노산의 일제 암흑기 활동에 대한 상반된 평가

중일전쟁을 고비로 점점 강화되어가던 일제의 파시즘 체제는 1930년대 말에 이르면 본격적인 조선말살정책으로 전환된다. 일제는 문학이 갖는 대중적 영향력을 고려하여 조직적인 방식으로 문학가들을 자신의 파시즘체제 강화에 이용하였다. 조선문예회(1937년), 조선문인협회(1939년), 조선문인보국회(1943년) 같은 어용단체가 잇달아 조직되었고 대다수의 문인들은 문필보국의 미명하에 일제의 침락전쟁을 선전하는 역할을 강요당하였다. 문학평론가들은 이 시기를 암흑기라 부른다. 

그러나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일제의 압제하에서도 말과 글을 다듬어 민족문학의 명맥을 이어가려고 노력하거나 절필로서 자신의 지조를 지킨 문학인들도 있었다. 특히 이 시기에 이육사와 윤동주가 있어서 다행이다. 이육사는 의열단에 가입(1925년)하는 등 항일독립운동으로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대표작인 청포도(1939년), 절정(1940년), 교목, 광야 등은 그 자신의 치열한 삶의 소산일 뿐만 아니라 가혹한 시대를 견디는 지사적인 품위를 잃지 않고, 민족해방에 대한 열망을 형상화하고 있다. 윤동주는 일본 立敎대학 영문과를 거쳐 동지사대학을 다니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945년 2월 福岡형무소에서 2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쉽게 씨여 진 시, 서시, 자화상, 십자가 등 윤동주의 시는 소극적인 자기성찰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에서 저항에의 의지를 직접적으로 드러낸 카프의 시와는 다르지만 현실의 강압에 자신의 지조와 양심 그리고 윤리적 순결성을 지키려는 치열한 정신을 형상화하고 있다.

1920~30년대에 국내에서 지식인이 자신의 지조를 지키면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노산이 조선일보에 근무할 때 아군, 황군 등의 표현문제 때문에 주필과 개인적으로 다투긴 했다. 그러나 항일과 독립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노산의 활동은 육당, 춘원과 함께 국민문학파의 시조부흥운동을 하였고 동아일보, 조선일보에 근무하면서 국토순례단을 모집하고 국토순례를 열심히 하면서 우리 역사, 우리 문화, 우리 글을 지키려고 열심히 시조를 쓰고, 저술활동을 한 보수적 지식인이었다. 항일투쟁가는 아니었다. 산, 강을 찾아다니고, 노래를 좋아하고, 글을 잘 쓰는 부지런하고, 재주 많은 양심적인 문필가였다. 국민문학파의 많은 문인들이 친일을 할 때에도 광양 백운산으로 내려가는 방식으로 현실도피를 했다. 그러나 민족 독립을 요구하는 독립운동을 하지는 않았다.

한편 노산의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모습과 국토순례, 시조부흥운동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 김준 교수는 노산이 일제 식민지 억압 속에서도 불굴의 지조를 지키며 민족정신의 고취에 앞장섰고 오직 조국 광복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평생을 조국과 겨레와 국토를 예찬하는 많은 시와 산문을 썼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심지어 김해성은 '노산은 진정한 의미에서 민족정신이 투철하고 조국강산에 동화되어버린 한국의 민중시인이기도 했다'고 민족과 민중을 함께하는 시인으로 평가했다. 지나친 표현이다. <독립운동사 제8권 문화투쟁사>에는 '노산의 민족주의는 조국정신과 민족정신에 있었고 그 정신을 나라 잃은 민중에게 고취시켰던 것이다. 그것은 시조를 통해서도 나타났고 일반 산문 혹은 역사 저술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그가 국토 순례에서 얻은 기행문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하면서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노산은 항일투쟁 및 민족주의자로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책을 펴낸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의 위원장은 노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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