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서 장군 앞장서 악전고투, 사졸은 목숨 바쳐 엄호
가진 것 모두 병사에게 쏟은 장군 헌신 승전으로 보답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기강나루 전투는 규모를 떠나 전쟁의 공포에 질린 백성들에게 용기를 심어준 승리였다. 마음먹기에 따라 능히 이룰 수 있는 것이 사람의 일인 것이다. 뒤이은 정암진 승첩은 좀 더 나아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가능성으로 희망을 가지게 한 전투였다.

결과는 현실로 나타났다. 5월의 승전을 계기로 군사는 2000명 안팎으로 불어났다. "의령은 전 목사 오운이 소모관이 돼서 한 고을을 잘 설득해 군사를 2000명 남짓 얻었다"는 기록이1592년 7월 6일 <난중잡록>에 나온다.

기강 전투와 정암진 승첩 등 곽재우 장군의 초기 활약상을 살펴보면 의령·진주와 전라도를 지키는 수비 성격이 강했다. 곡창지대였던 전라도를 차지하려는 왜적의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정암진과 의령을 지켜내는 것만도 버거웠다. 그러다 7월 들어 장군은 낙동강을 건너 동쪽으로 진격했다. 수세를 벗어나 공세로 전환한 첫 작전이 시작되었다.

▲ 영산읍성 북쪽 성벽. 1592년 당시 이 읍성을 점령하고 있던 왜적을 곽재우 장군이 무찔렀다. 장군이 낙동강을 건너 현풍과 영산을 되찾는 과정에서는 이름 없는 병사들의 목숨을 바친 헌신도 눈길을 끈다. 장군이 위험에 놓여 있을 때 무명용사들이 온몸으로 보호하고 나섰던 것이다.
▲ 영산읍성 북쪽 성벽. 1592년 당시 이 읍성을 점령하고 있던 왜적을 곽재우 장군이 무찔렀다. 장군이 낙동강을 건너 현풍과 영산을 되찾는 과정에서는 이름 없는 병사들의 목숨을 바친 헌신도 눈길을 끈다. 장군이 위험에 놓여 있을 때 무명용사들이 온몸으로 보호하고 나섰던 것이다.

◇현풍은 한 자루에 다섯 가지 횃불로 = 여기서도 장군은 불패 신화를 이어나갔다. 현풍 전투에 대해 <난중잡록>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수복했다고 적고 있다.(1592. 7. 9.) "장군은 신기한 꾀가 많아서 정예 수백을 뽑아 현풍으로 끌고 나가 산 위에서 군사를 바라보거나 성 밖에서 말을 달리는 등 백 가지로 싸움을 걸었으나 적은 시종 감히 나오지 못했다.

장군이 또 한 자루에 다섯 가지가 난 횃불을 만들어 밤중에 고갯마루에 올라 한꺼번에 불을 붙여 들어 불빛이 적진에 비치게 했다.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포를 쏘고 고함을 치며 여럿이 서로 응하면서 말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홍의장군이 여기 있으니 내일 접전해서 반드시 다 죽이겠다. 너희는 후회하지 말라.' 그러고는 곧바로 불을 끄고 가만히 물러났다."

군사들이 든 횃불이 자루 하나에 가지가 다섯이었다. 이는 군사가 실제보다 다섯 배 많아 보이게 하는 효과를 냈다. 밝은 새벽에 보니 현풍의 적이 간밤에 이미 도망가 버리고 없었다. 장군의 이 같은 허장성세 작전이 그대로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때마침 30리 근처 성주 용암면 무계리에서 합천 의병장 정인홍과 거제현령 출신 김준민이 성주읍성으로 가던 왜적 400명 남짓을 섬멸한 무계전투가 같은 날 벌어졌는데 이와 맞물려 장군의 작전은 더욱 상승효과를 거두었다.

<난중잡록>은 이 두 전투를 함께 언급하고 있다. "밝은 새벽에 보니 현풍의 적이 간밤에 이미 도망가 버렸다. 이 거사는 마침 무계 전투와 같은 때였기 때문에 적은 더욱 두려워서 달아난 것이다." <선조수정실록>(1592. 7. 1.)도 "의병장 김준민이 왜병을 무계현에서 물리쳤다"고 적은 다음 "의병장 곽재우도 왜병을 현풍과 창녕 사이에서 잇따라 물리쳤다"고 했다.

◇영산은 치열한 공방전 끝에 되찾고 = 현풍을 접수한 장군의 군대는 곧바로 남하해 영산으로 내달렸다. 현풍과 영산 사이에 있는 창녕은 이미 6일부터 창녕의 의병들이 왜적과 공방을 벌여 되찾은 상태였다. 현풍은 읍성이 조그맣고 안에 물도 없었으나(<세종실록지리지>) 영산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은 창녕에 딸린 한 개 면이지만 당시는 별도로 독립된 현이었던 영산은 읍성이 나름 규모가 제법이었고 우물도 있었다. 군사 또한 현풍보다 많고 강해서 쉽사리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작전이 필요했으며 군사도 의령군에 더해 삼가·합천군까지 가세했다.

현풍 전투와 같은 날에 적힌 <난중잡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상황은 이랬다. "합천·삼가는 의병장 윤탁이 이끌어 후원하게 하고, 의령 군사는 장군이 이끌고 적진과 마주한 봉우리에 들어가 진을 쳤다. 목책을 셋으로 나누어 치고 장군이 가운데 있었는데 왜적 선봉 백여 명이 말을 달려 곧장 중군을 공격했다. 장군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갑옷 입은 왜적 선봉을 쏘아 5~6명을 연달아 넘어뜨렸다. 탄환이 비 오듯 하는 데도 장군은 태연자약했으며 병사들이 몸으로 장군을 날개처럼 가리며 죽을 각오로 힘껏 화살과 돌을 아래로 날렸다.

적의 선봉 말 수십 마리가 넘어져 죽고 적도 매우 많이 죽으면서 남은 적이 잠깐 후퇴했다. 성안에서 격전을 바라보던 왜적이 한꺼번에 나란히 나와서 윤탁의 군사가 무너져 흩어졌다. 왜적이 승세를 타고 쳐들어오니 장군은 형세가 서로 대적하지 못하게 되어 싸우면서 후퇴해 산으로 올라 피하자 적도 역시 감히 끝까지 쫓아오지 못했다."

장군이 진을 쳤던 곳은 아마 지금 남산호국공원 일대였을 듯하다. 그날 밤 장군은 먼저 후퇴한 윤탁을 혼내고는 나가 싸워서 불리해도 사나흘을 한정하고 반드시 이기라고 다짐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 뜻밖의 사태가 벌어져 있었다. "사람을 보내 정탐했더니 성문이 활짝 열려 있고 불 때는 연기도 나지 않고 아무 동정이 없어 무슨 계획이 있으리라 의심했다. 밝은 아침에 사람을 시켜 살펴보니 왜적이 밤중에 막사를 불태우고 이미 달아나고 없었다." 영산은 이처럼 장군의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악전고투한 끝에 되찾은 고을이었다.

▲ 영산읍성에서 내려다본 영산 시가지. 장군이 진을 쳤던 자리는 맞은편에 보이는 두 탑 가운데 높은 데 있는 탑(한국전쟁 영산지구 전적비) 근처로 짐작된다.
▲ 영산읍성에서 내려다본 영산 시가지. 장군이 진을 쳤던 자리는 맞은편에 보이는 두 탑 가운데 높은 데 있는 탑(한국전쟁 영산지구 전적비) 근처로 짐작된다.

◇현풍·영산 전투 승리의 효과는 = 현풍과 영산 전투에서 장군이 거둔 승리는 왜적의 행동 반경을 절반으로 좁혔다. 왜적은 그때까지 의령 정암진을 뚫지 못한 대신 낙동강 동쪽을 완전히 장악하고 세 갈래로 거침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국조보감>을 보면 왼쪽 길은 동래~기장~좌병영(울산)~경주~영천~신령~의흥~군위~비안~용궁~문경이었고, 가운데 길은 낙동강 동쪽을 따라 동래~양산~밀양으로 간 다음 영산~창녕~현풍~성주와 청도~대구~인동~선산~상주로 나뉘었다. 또 낙동강 서쪽 오른쪽 길은 동래~김해~경상우도~성주~지례~김천으로 이어졌다.

장군이 일찌감치 의령을 지킴으로써 그 오른쪽 길을 차단한 데 이어 현풍·영산 전투의 연이은 승리로 가운데 길에서 절반을 되찾았다. 게다가 이들 고을은 낙동강 동쪽 연안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맞은편 의령과 호응해 낙동강을 통한 왜적 수운까지 제대로 막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왜적의 진로 다섯 개 가운데 세 개가 장군에게 가로막힌 셈이다.

침략 직후 낙동강 상황은 이렇게 적혀 있다. "적선이 100척 남짓 또는 수십 척씩 강을 뒤덮고 끊임없이 오르내리는데 모두 약탈한 물건을 운송하는 배들입니다."(<선조실록> 1592. 6. 28.) 그러다 6월 기록에서는 상황이 달라져 있다. "적선이 두 척은 물에 빠지고 한 척은 노가 풀려 떠내려가는데 곽재우가 모조리 나포해 머리 27급을 벴다. 실려 있던 것은 모두 궁중의 보물이고 태조가 신던 신발도 있었는데 곧바로 초유사에게 보냈다."(<난중잡록> 1592. 6. 19.) 그리고 영산·현풍 전투가 벌어진 7월 중순 이후로는 이조차 사라졌다.

덕분에 낙동강 서쪽 경상우도에서는 백성들이 전란 이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 물론 전부가 장군의 업적인 것은 아니었다. 거창·김천·합천·초계·고령·성주 등에서 떨쳐 일어난 여러 의병들의 활동과 어우러졌기에 가능했다. "김면은 거창에 머물며 지례·김천의 길을 막고 정인홍은 성주에 주둔하며 고령·합천의 길을 질러 막았으며, 곽재우는 의령에 진을 치고 함안·창녕·영산에서 강을 건너는 적을 방비해 우도 일대가 안정될 수 있었다."(<난중잡록> 1592. 8. 3.)

한 번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왜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왜적 점령 지역과 붙어 있는 현풍과 영산은 뺏고 빼앗기는 싸움이 거듭 되풀이됐다.

장군의 현풍·영산 승전에서 스무 날 남짓 지난 8월 4일 자 <난중잡록>에서 김성일은 "현풍·영산의 적도 역시 형세가 공격할 만하므로 고령·합천·초계의 의병으로 현풍을 치고 창녕·의령의 군사로 영산을 치기로 이미 약속했습니다"라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난중잡록>을 지은 조경남은 이 대목을 <경상순영록>에서 옮겨쓰면서 "곽재우가 이보다 먼저 수복했는데 여기서 또 왜적이 있다 한 것은 그 오고 감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설명을 달았다.

◇승리 뒤에 숨겨진 무명용사의 희생 = 장군이 낙동강을 건너 현풍과 영산을 되찾는 과정에서는 이름 없는 병사들의 목숨을 바친 헌신도 눈길을 끈다. 장군이 위험에 놓여 있을 때 무명용사들이 온몸으로 보호하고 나섰던 것이다. "탄환이 비 오듯 하는 가운데 사졸들이 몸으로 장군을 날개처럼 가리며 죽을 각오로 힘껏 화살과 돌을 아래로 날렸다." <난중잡록>은 이어 "저물녘에 흩어진 군사를 모아보니 죽거나 다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적었다. 이런 헌신과 기적이 따르지 않았다면 이루어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망우집>의 '용사별록'에는 좀 더 사실적으로 기록돼 있다. "왜적이 탄환을 쏘아 비 오듯 하는데 사졸들이 장군을 부축해 산으로 올라갔다. 앞다투어 몸으로 탄환을 막으니 맞아서 앞에 죽어 쓰러진 것이 열두 명이었다." 목숨을 건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병사들이 자기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장군을 지키려 했던 그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사령관인 장군의 생사에 전투의 승패가 달려있다는 생각을 했을 여지가 없지 않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돌이켜 보면 장군은 언제나 병사를 아끼고 사랑했다. 장군은 가진 모든 재산을 버려서 의병을 일으켰다. 자기 옷을 벗어서 병사들에게 주었고 병사들 처자를 위해서는 식구와 자제들의 의복을 가져와 입혔다. 전투에서는 몸을 사리지 않고 앞장서 싸웠다. 병사들이 적군에게 몰리게 되면 어김없이 구했으며 그런 다음에는 충분히 벗어날 때까지 반드시 뒤를 맡아 엄호했다. 고수는 버려서 더 큰 것을 얻고 하수는 버릴 줄 몰라서 더 큰 것을 잃는다. 장군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병사들과 나누었고 그 덕분에 목숨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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