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시나 산문으로 시작해 인상 깊은 글 정리 활용도
직접 써보고 편한 펜 선택, 값싼 만년필도 필기감 훌륭
조경국 "힘든 시절 극복해" 양미선 "치유가 되는 느낌"

외출을 자제하는 요즘,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그럴 땐 책을 베껴 쓰는 필사(筆寫)를 해보면 어떨까.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명시나 명문장을 골라 공책에 그대로 적으면 된다. 괜히 필사한답시고 처음부터 두껍거나 어려운 책을 선택하지 말고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선택하자. 사각사각 쓰고 스르륵 책을 넘기는 그 소리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필사 어떻게 할까 = 헌책방 소소책방을 운영 중인 조경국 작가는 지난 2016년 <필사의 기초>를 썼다. 그가 필사를 시작한 지는 10여 년. <천자문>은 열 번 넘게 베껴 썼다. 그에게 필사는 출구가 보이지 않았던 시절을 견디게 해줬고 "책과 펜과 노트를 동무 삼아 '삶을 정제'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그가 밝힌 필사의 즐거움은 이렇다. 첫 번째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고 두 번째 차분한 마음을 얻을 수 있고 세 번째 기억이 오래가고 네 번째 돈이 거의 들지 않는다. 마지막 즐거움은 경쟁할 필요가 없다.

"남에게 보여 줄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쫓길 필요도 없습니다. 아주 천천히 문장을 곱씹으며 쓰는 동안 누리는 즐거움은 한정이 없습니다."

필사를 하려면 베껴 쓸 책, 펜, 노트가 필요하다.

그는 책에서 반듯한 글씨를 쓰기 위해서 10칸 공책, 방안(모눈) 공책, 유선 공책, 무선 공책 순으로 넘어가라고 추천했다. 악필이 아니라면 유선 공책부터 시작해도 무방하다.

펜은 연필, 샤프, 볼펜, 만년필 등 선택이 다양하다. 펜을 사기전 지인에게 물어보거나 인터넷 리뷰를 참고하면 좋다. 어느 정도 정보를 수집한 뒤 문구점에 가서 펜을 직접 써보고 자신에게 편한 걸 고르면 된다.

▲ 소소책방 주인 조경국 작가가 <침묵의 세계>를 필사한 모습, /조경국 작가
▲ 소소책방 주인 조경국 작가가 <침묵의 세계>를 필사한 모습, /조경국 작가

조 작가는 만년필을 추천했다. "만년필로 쓰면 손에 힘을 빼는 연습을 할 수 있어요. 대신 만년필로 쓸 땐 종이가 너무 얇은 것보다는 어느 정도 두께가 있는 공책을 선택하는 게 좋아요."

이젠 옮겨 쓰고 싶은 책만 고르면 된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나 마음속 울림을 준 책을 선택하면 좋다. 필사를 갓 시작한 사람에겐 짧은 작품이 좋다. 예를 들어 시나 짧은 산문이다.

◇쓰고 생각하고 공유하고 = 양미선(45) 마하어린이도서관 대표관장은 고(故) 허수경 시인 작품 필사 모임 '모아쓰다' 멤버다. 지난해 7월 필사를 시작했다. 예닐곱 명이 모여 허 시인의 책을 직접 공책에 썼다. 작품 제한은 없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허 시인의 시, 소설, 에세이 등을 고르면 됐다. 문구류 선택도 자유로웠다.

양 관장은 "각자 마음에 들어오는 구절을 필사했어요. 각자 그날그날 필사한 것을 온라인에 올려 공유하고 오프라인 모임 때 서로 생각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어요"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필사의 매력은 무엇일까. "함께 모여서 30~40분 동안 필사를 하는데 사각사각 소리만 나요. 일상의 여러 가지 생각을 내려놓고 그 순간과 내가 쓰는 글귀에 몰입할 수 있어서 좋죠. 그렇게 옮겨적고 나서 마음에 닿는 구절을 다시 보면 필사 명상까진 아니어도 치유가 되는 느낌입니다."

허 시인 1주기 추모 모임이 열린 지난해 10월 진주문고 2층 여서재에서 '모아쓰기' 회원이 필사한 작품이 전시되기도 했다.

혼자 꾸준히 필사하기를 어려워하는 이들을 위한 필사 모임도 있다.

▲ 기자가 <마주보기>를 필사한 모습.  /김민지 기자
▲ 기자가 <마주보기>를 필사한 모습. /김민지 기자

진주에 있는 읽고 쓰는 공간 '글곁'은 달마다 필사 모임을 진행한다. 매달 첫째 주 월요일에 첫 만남을 하고 마지막 주 금요일에 만나 마무리한다. 회원들은 매일 한 문장 이상 직접 적어보는 1일 1필사를 목표로 한다. 참여 비용은 2만 5000원이며 1일 1필사를 완성하면 1만 원 상당의 식사권을 준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김선미(39) 대표는 "필사는 단순히 글을 옮겨적는 것을 넘어서 그 시절의 기억과 추억을 담을 수 있는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는 책을 다 읽고 인상 깊은 구절을 정리하는 용도로 필사를 하는데 오늘 어떤 노래를 들었는데, 가사가 마음에 들면 그대로 적어보기도 하고 필사를 하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방식은 다릅니다"고 말했다.

◇직접 필사해 보니 = 창원 독립서점 '업스테어(Upstair)'에서 구매한 <마주보기>를 다시 폈다. 이 책은 독일 문학가 에리히 캐스트너(1899~1974)가 썼는데 우리나라엔 1988년 초판본이 나왔다.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더울 때 시원한 맥주를 마시는 느낌이랄까. 손끝으로 두피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마사지하는 느낌, 초밥을 먹을 때 고추냉이가 톡 쏘는 느낌 같은 게 들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문구점에서 산 유선 공책과 플래티넘 프레피 만년필을 꺼냈다. 프레피 만년필을 조 작가가 추천했다. 그에 따르면 이 만년필은 저렴한 가격에 카트리지 교체가 가능하고 필기감이 우수하다. 만년필 하면 비쌀 거로 생각했는데 오프라인에서 2000원대 구입했다. 책을 펴 그중 마음에 드는 시를 찾는다.

55쪽, 제목은 '봄이 왔다', 부제는 봄이 가까이 왔을 때. 눈으로 먼저 읽고 공책에 손글씨로 베껴 써본다.

'그렇다/ 벌써 봄이 왔다/ 나무들이 한껏 기지개한다/ 바람은 깃털처럼 부드럽다/ 수캐들은 새색시를 찾는다/ 포니 휴토렌은 말했다/ 태양은 작고 따뜻한 손으로/ 내 피부를 쓰다듬는다고/(중략)/ 빛바랜 푸른색 빨간색 초록색들에/ 이제는 봄이 왔다/ 세계가 온통 다시 채색된다/(중략)/ 해마다 똑같이 되풀이되는 일이건만/ 언제나 마치 처음 있는 일과 같이/ 봄이 왔다'

한 줄 한 줄 펜이 지나간다. 내 마음이 공책이 된 것처럼 한 구절 한 구절이 가슴에 새겨진다. 지금 이 순간, 세상엔 나와 책만 있는 것 같이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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