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한반도에서는 문사들에 의한 고산 탐사 등산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당시에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언론사가 등산운동의 대중보급과 저변 확대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최남선, 안재홍, 이은상, 문일평, 황욱 등 쟁쟁한 문사들이 백두산, 묘향산, 설악산의 구석구석을 탐사하면서 역사, 지리, 문화 등을 소개하는 탐사산행기를 일간지의 지면을 통해 보도했고 대중계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이용대, <등산, 도전의 역사> 해냄출판사, 2017년, 100쪽) 한국 근대등반의 첨병이라 할 수 있는 김정태(1916~1988년, 대구 출생, 1934~45년 금강산, 백두산 지역 등반(초등반), 1946~55년 태백, 소백, 차령산맥, 울릉도, 독도 등 국토구명사업에 참여. 1956년 수도여자사범대학 총무과장. 1965년 한국산악회 30주년 공로상, 1978년 안나푸르나 원정대 대장, 1986년 대한스키협회 40주년 공로상 수상.)와 등산인 이용대(이용대, <등산, 도전의 역사> 해냄출판사, 2017년, 28쪽)는 1976년에 쓴 그의 자서전 <등산50년>에서, 민세 안재홍의 '백두산 등척기(白頭山 登陟記)'. 육당 최남선의 '백두산 근참기(白頭山 覲參記)'와 '조선의 산수(朝鮮의 山水)'. 노산의 '묘향산 유기(妙香山 遊記)'와 '설악행각(雪嶽行脚)', '한라산 등척기(漢拏山 登陟記)' 등은 조선시대의 유산기와 달리 우리의 명산을 구석구석 탐사하는 학술적 구명의 탐사등산기라고 평가했다. 산과 관련된 답사기는 등산의 대중보급에 많은 기여를 했으니, 이런 형태의 등산기가 한국근대등산을 발아시킨 선구적인 업적이라고 말한 것이다. 

▲ 영국의 스티븐이 쓴 책. '유럽의 놀이터'
▲ 영국의 스티븐이 쓴 책. '유럽의 놀이터'

이는 알프스 고봉에서 본격적인 등산 활동이 시작되기 전 알피니즘의 여명기에 자연과학자인 아가시, 포브스, 틴들과 같은 학자들이 빙하와 지질연구를 위해 탐사활동을 하며 산에 올랐고, 과학자뿐만 아니라 괴테, 바이런, 워즈워스, 러스킨, 쉘리, 레슬리 스티븐과 같은 문인들이 알프스의 산들을 답사하며 산을 찬미하는 저술을 펴낸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몽블랑 등정을 제안하여 근대등산의 계기를 마련했던 소쉬르와 같은 학자도 <알프스여행기>를 펴내 사람들의 관심을 산으로 끌어드렸다. 특히 당대 최고의 지성인인 영국의 스티븐은 <유럽의 놀이터(The playground of Europe)>와 같은 명저를 저술하여 책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유럽의 고봉으로 몰려오게 하였다.

노산은 해박한 역사지식과 유려한 문장으로 '설악행각', '묘향산기행', '한라산등척기', '해외 산악계 순방기'와 같은 기행문학의 압권이라 할 만한 글들을 남겼다. 노산의 일부작품들은 노산의 산시(山詩)에 매료된 스위스 문필가 쎄화가 불어로 번역을 하고 영국인 뺀느가 '천왕봉 찬가(the song of Chun Wang)'외 여러 편의 시를 영역하여 외국에 소개하기도 했다.(이용대, <월간 MOUNTAIN> 12월호, 시인과 산악인의 삶을 함께 산 노산 이은상 편(2012년))

12년간 '노산시대'를 이끌었던 최장수 산악회 회장 

노산은 1967~70년 4대 회장을 지냈는데 지금도 많은 산악인들에게 회자되는 '산악인의 선서'와 '산악인의 노래'를 작사하였다. 산악인의 노래는 한국산악회의 회가인데 이은상 작사, 김동진 작곡으로 씩씩한 행진곡풍이다. 

산으로 가자 산으로 가자

구름 안개 헤치고 저 산으로 가자

높고 멀어도 내 발 아래

크고 넓어도 내 품 안에

(후렴) 외치는 야호 울리는 야호 산과 나 둘이 아니다 나와 산 하나가 되다

산마루로 오르자 산마루로 오르자

온갖 고난 박차고 저 산마루로 오르자

천지가 온통 한눈 아래

우주의 섭리 한 가슴에

(후렴) 외치는 야호 울리는 야호 산과 나 둘이 아니다 나와 산 하나가 되다

(경남시조시인협회, <가고파, 내고향 남쪽바다>, 도서출판 경남(2017년), 171쪽)

▲ 1967년 노산이 작성한 산악인의 선서.
▲ 1967년 노산이 작성한 산악인의 선서.

100자로 된 선서는 1967년 9월 15일, 한국산악회장 취임 첫 해에 제정하였다. 다음 내용은 선서의 전문이다. '산악인은 무궁한 세계를 탐색한다.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정열과 협동으로 온갖 고난을 극복할 뿐, 언제나 절망도 포기도 없다. 산악인은 대자연에 동화되어야 한다. 아무런 속임도 꾸밈도 없이, 다만 자유 평화 사랑의 참 세계를 향한 행진이 있을 따름이다.' 충남 천안의 광덕산 입구에 우둥불산악회가 세운 선서비를 위시하여 전국의 명산명소에 세워져 있다.

노산이 한국산악회 회장에 재임 중인 1969년 2월에 히말라야 해외원정 등반훈련대가 설악산에서 훈련을 하다가 대원들이 죽는 국내 최초의 눈사태 사고가 발생하였다. 그의 재임기간 중에 일어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고로 10명의 젊은 대원들이 눈 속에 매몰된 채 최후를 맞았다. 대한산악연맹 이인정 회장도 훈련대의 일원으로 참가했었다. 당시 이 사건은 사회적인 물의를 빚었고 구조과정에서 여러 가지 잡음이 일었으며, 산악회는 비통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일명 설악산 '10동지 눈사태'로 불리우는데 조난 당시 한국산악회 회장으로 눈 쌓인 설악산을 오르던 노산 이은상을 기억하는 산악인들이 많다. 이 사건의 여파는 열정적으로 회무를 집행해온 그에게 좌절을 안겨주었고, 조직의 책임자로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스스로 사퇴를 했다. 그리고 2년 후 그는 회장직에 재추대되었다. 

▲ 히말라야 원정등반을 위해 설악산에서 1969년 2월 일어난 눈사태사고로 죽은 대원들을 위한 추모 조시.
▲ 히말라야 원정등반을 위해 설악산에서 1969년 2월 일어난 눈사태사고로 죽은 대원들을 위한 추모 조시.

다시 1973~82년까지 7~11대 회장으로 통틀어 12년 동안 최장수 한국산악회장을 역임하였다. 회장에 재추대된 1973년, 노산은 한국산악회의 국제적인 위상과 세계화의 흐름에 동참하고자 국제산악연맹(UIAA)의 일원으로 정식 가입하여 회원국이 되었다. 국제산악연맹 가입은 눈사태사고로 10명의 대원을 잃은 후 더욱 분발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희생자의 유지를 기리기 위해 국내활동에 한정되었던 산악회의 시각을 국제무대로 확대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구미(歐美) 선진국가의 대표적인 산악회를 탐방하여 국제적인 견문을 넓혔다. 회의 운영과 활동상황, 도서출간 현황 등을 살펴보고 정보를 교류하였다. 1973년부터 시작된 각국 산악단체 탐방 행보는 프랑스 산악회(1874년 창립)와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프랑스 국립 스키 등산학교, 등산의 국민화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스웨덴산악회(1923년 창립). 정통성과 폐쇄성을 함께 지닌 채 운영되고 있는 영국 알파인클럽(AC, 1857년 세계 최초로 창립)과 영국등반협회(BMC,1946년), 등산의 전도사를 자처하는 아메리칸 알파인클럽(AAC. 1902년)과 '미국의 자연은 미국의 귀중한 재산'이라고 외치며 환경보존운동을 펼치는 환경단체 시에라 클럽 등을 탐방하였다. 당시 그가 각국에서 교환해온 귀중한 자료와 도서들은 현재 한국산악회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선진 등산강국의 등반기술을 습득하기 위하여 경제여건상 해외진출이 어렵던 시기에 프랑스의 국립 스키 등산학교(ENSA)에 회원을 파견하여 체계화된 설빙벽 등반기술을 전수받아 국내에 보급하였다. 당초 이 계획은 노산이 회장 재임 시에 두 사람을 파견하기로 했던 일이 무산되자 이민재 회장에게로 이어져 결실을 본 것이다. 오늘날 각급 등산교육기관에서 기초기술로 활용하고 있는 '프렌치 테크닉'이 그 당시 도입된 기술이다. 1960년대 말 부산학생 산악연맹에서는 대구에 있던 이은상 회장(한국산악회)을 초청하여 300여 명이나 모이는 초청강연회를 하였다. 한국산악회 부산지부 창립기념식에도 참석하였고, 산악강연회에 초청되어 강연을 하기도 했다. 1968년에는 북한산 EMPOR산장에서 전국 20대 명산순례와 한국산악회 창립 20주년 행사를 하면서 기념사를 하기도 했다.

한국산악회 창립 30주년을 기념하여 실시한 안나푸르나 1봉 정찰원정은 한국방송공사와 공동으로 1975년 4월 16일 서울을 출발했다. 8명으로 구성된 정찰대에는 72세의 이은상 회장이 참여하였다. 그는 히말라야 고산등반에도 열정을 가지고 추진하여 1977년 대한산악연맹의 에베레스트 한국 초등에 이어, 1978년 안나푸르나 4봉(7525m) 등정을 성공시켰다. 이 등반은 한국의 히말라야 등반 개척기에 있었던 두 번째의 성과로 기록된다. 당시 이 등반대의 대장은 26, 27대 산악회장을 역임한 전병구(현재 한국산악회 고문)였다. 노산이 회장으로 재임 중에 등산인구의 저변확대, 산악지도자 배출을 위한 등산교육, 국제산악연맹에 정회원으로 가입, 히말라야 고산원정, 산악회의 법인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지금도 한국산악회는 노산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노산산악문화상을 시상하고 있다.

산악문화의 활성화를 위해 산악도서출간에 힘써다

노산은 산악단체의 수장으로 척박한 산악문화의 활성화에 역점을 두고 산악잡지와 도서출간에 힘을 기울였다. 산악인들이 모여 1968년부터 창간을 준비하던 중 1969년 설날, 한국산악회 설악산 10동지 조난사고가 생겼다. 산악문화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5월 말에 준비하여 창간호인 1969년 6월호가 2,000부 나왔다. 발행인 장남석, 편집인 최선웅이었다. 창간호의 특집은 조난사고였다. 처음에는 제호를 <山>으로 정했는데 한국산악회의 회장인 이은상에게 창간 제호를 써달라고 부탁했더니 <등산>이 더 좋지 않겠느냐고 제의해서 그렇게 바뀌었다. 10~11호를 어렵게 합본호로 내고 편집인 최선웅은 노산을 찾아가 재정형편을 이야기했고 노산은 우리나라의 최초 산악잡지인데 살릴 방안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당시엔 잡지가 1년에 3번 합본이 되면 자동 폐간되는 규정이 있었다. 그래서 6호를 납본용으로 급하게 40부를 만들었다. 당시에는 월간 <등산>과 월간 <山水>라는 두 월간지가 있었는데 월간 <山水>는 6월에 한 달 차이로 창간되었다. 그러나 월간 <등산>은 통권 6호를, 월간 <山水>는 통권 4호를 마지막으로 폐간 위기에 처했다.('산, 책으로 읽고 몸으로 올라라', <한국일보>, 2007년 11월 27일) 

▲ 월간 등산 창간호인 1969년 6월호 표지.
▲ 월간 등산 창간호인 1969년 6월호 표지.

결국 월간 <등산>의 운영은 노산이 돈을 대기로 하고 자신의 막내 동생인 이신상씨가 사장으로 왔다. 당시 이신상 사장은 영화잡지를 만들고 있었다. 사장과 함께 노산의 개인비서였던 오정방씨가 왔는데 그는 이신상의 사위였다. 그러나 편집원칙에서 갈등이 생겨 2월호를 발행하고 최선웅은 사표를 내었다. 결국 사장 이신상은 1년간 잡지를 발행하다가 더 이상 수익을 내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신우회에 월간 <등산>을 넘겼다. 신우회는 조선일보 방일영 회장, 신직수 법무부 장관, 노산 이은상 등 정계와 언론계의 인사들이 만든 친목 산악회였다. 노산과 친교가 돈독한 사회명사들의 모임이었다. 최선웅 역시 다시 편집장으로 근무하였다. 이후 월간 <등산>은 조선일보가 정식으로 인수하여 전문산악인이 참여하는 월간 <산>으로 현재까지 발간될 수 있도록 가교역할을 했다.(최선웅, <60 월간 산초대>, Daum카페 부동산연구소(cafe.daum.net/kbmcr) 2013년)

1975년부터 한국산악문고 시리즈로 7권을 발간하였다. 이 책은 읽을 만한 산악도서가 없던 시절 국내 산악인들의 지적갈증을 해소시켜주었다. 한국산악문고는 <노산 산행기(鷺山 山行記)>(이은상, 1975년), <별빛과 폭풍설>(가스통 레뷔파·김경호역, 1975년), <산악소사전(山岳小事典)>(김원모, 1975년>의 발간에 이어, <등산50년(登山 50年)>(김정태, 1976년), <8,000m의 위와 아래>(헬만 불·이종호역, 1976년), <암벽등반기술>(백영웅, 1976년), <산정수정(山情水情)>(이영희, 1977년) 등이 나왔다.

첫해에 노산의 <노산 산행기>를 첫 번째 문고로 출판하였다. 이 책에는 1933년 설악산 답파했던 기행문인 '설악행각', 1937년 제주도 기행문 가운데 한라산 부분만 실은 '한라산등척기', 1973년 유럽을 방문한 '해외산악계 순방기' 등 세 가지가 실려 있다.

▲ 1975년부터 전체 7권으로 출간한 한국산악문고.
▲ 1975년부터 전체 7권으로 출간한 한국산악문고.

설악을 이야기할 때는 노산 이은상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954년에 발간된 <노산문선(鷺山文選)>(산문선은 1942년에도 출판되었고 해방 후에는 1954년 9월 30일 영창서관에서 출판)중에 수록된 '설악행각'이 그것이다. '설악행각'은 본래 1933년 9월 30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춘천, 인제를 거쳐 지금의 남교리 탕숫골(12선녀탕)으로 하여 한계고성, 옥녀폭, 대승폭, 대승령에 올랐다가 흑선동으로 내려와 백담사를 거쳐 봉정암에 도착하고 중청, 대청으로 올랐다. 이후 다시 봉정암으로 내려와 오세암을 거쳐 마등령, 와선대, 비선대, 신흥사, 계조굴에 이르는 열흘간의 일정으로 설악산을 탐방했다. 울산바위 밑 계조암에서는 토왕성폭포와 흔들바위를 보았다. 가장 압권인 대목은 설악의 아름다움을 시조로 완성시키는 장면으로 그 어떤 산행기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형식이다. 노산은 중간 중간 멋진 계곡과 바위, 풀, 바람, 비를 느끼며 그 궁극의 아름다움을 시조로써 완성했다. 노산이 설악산을 온몸으로 느끼며 적은 산행기이다. 국한문 혼용 출판본과 한글 전용 출판본 2가지가 있다. 노산은 길을 안내해줄 현지 심마니와 짐승들로부터 보호해줄 포수들을 대동하여 15명 정도의 원정대를 꾸렸다. 산행을 마친 후 1933년 10월 15일부터 12월 20일까지 37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하였고 그 후 1942년에 발간한 <노산문선>에 수록하였다. 이 '설악행각'의 탁월함에 대해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이것만한 설악유람기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설악행각'은 설악에 관한 문학적 표현들로 가득 차 있다. 노산은 자신이 '설악행각'이라는 유람기를 남기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더욱이 저렇듯한 영구 명승으로서 사람마다의 근참은 그만두고라도, 조그마한 유기 일편조차 우리에게 없음을 깨달을 때, '우리네의 산악 순례에 대한 열성이 이렇게도 엷구나, 우리네의 산악 순례를 위한 여유가 이렇게도 없구나'하는 장탄과 아울러 얼른 이 기회에 대답하고 나선 것도 한 까닭입니다.'

설악산에 얽힌 일화도 있다. 설악산 대청봉은 노산이 옛 신앙에 근거하여 밝고 푸른 봉우리라는 뜻으로 청봉으로 불렀다는 설이 있다.('근교산과 그 너머 359, 설악산 단풍산행' <국제신문>, 2003년 10월 16일) 지리산에 대한 이야기도 전해져 오고 있다. '보라, 나는 천왕봉 머리에 올랐노라. 구름과 안개를 모조리 다 헤치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 되어 하늘 위에 올랐노라' 노산 이은상이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 온몸으로 감격하여 외친 말이다. 1953년의 휴전협정 이후 설악산은 과거의 금강산을 대신할 새로운 등산지로 주목을 받았다. 노산 이은상이 쓴 <산찾아 물따라>에도 '설악행각'이 실려 있다. <산찾아 물따라>는 1933년 설악산을 탐방하여 '설악행각'을 쓴지 30년 후에 강원도 동해안 일대를 탐방하고 적은 글이다. 1966년 출판사의 요청에 따라 그동안의 옛 산행기를 모아 출판한 것이다. 

죽는 날까지 산악문화 위해 노력했던 이은상

한국산악회는 1945년 조국이 광복되던 해에 사회단체로는 진단학회에 이어 두 번째로 정부에 등록된 단체이다. 1945년 9월 15일 YMCA 강당에서 창립총회를 가질 때는 명칭이 조선산악회였으며 초대 회장은 민속학자 송석하였다. 부회장은 최승만, 김상용, 총무는 김정태였다. 조선산악회의 창립주체는 일제 때부터 활동했던 백령회였지만 산악인들은 모두 간사진으로 합류하고 임원진은 학자, 언론인, 사회지도자로 구성하였다. 백령회는 한국 산악인들이 창립하여 활동 중이었던 금요회가 1937년에 명칭을 백령회로 바꾼 단체였다. 일제 강점기인 1931년에 일본인들끼리 모여서 창립하여 활동했던 조선산악회는 명칭만 같을 뿐 해방 후에 창립된 조선산악회와는 전혀 다른 단체이다. 한국산악회의 전신인 조선산악회의 초기 사업은 일제 하에서 유린되었던 국토를 밝히고 알아보자는 취지 아래 국토구명(究明)학술조사사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1955년, 마지막 제11차 국토구명사업인 수복지구 설악산 학술등반대의 회장은 홍종인, 부회장은 이숭녕이었다. 이들이 다닌 코스가 24년 전 1933년 노산이 걸었던 '설악행각' 코스를 조금도 빼놓지 않고 답사하였다.(노산문학회, <민족시인 노산의 문학과 인간>, 횃불사(1982년), 385쪽.) 이 등반대 활동은 노산의 글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학술탐사등산은 시대적 상황의 반영이기도 했다. 한국 근대 등산운동의 태두격인 김정태(1916~1988년)는 이 시기를 '기록적인 탐사 등산 시대' 라고 정의하면서 한국 근대 등산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했다.(이용대, <등산, 도전의 역사> 해냄출판사, 2017년, 100쪽)

해방 3년이 지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동시에 회 명칭을 한국산악회로 바꾸었다. 1953년에는 울릉도, 독도에 학술조사대를 파견하여 사상 처음으로 독도에 표식을 세웠다. 역대 회장을 보면 2대 현동완, 3, 5대 홍종인, 6대 인민재, 12, 13대 구자경, 14~16대 이숭녕 등이었다. 송석하와 현동완은 진단학회 회원이었다. 1967년 이은상이 4대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한국산악회는 문호를 개방하여 산악운동의 대중화를 여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그런데 이상과 같이 엄연한 정통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35년 동안 임의단체 취급을 받아왔다. 조직의 틀을 다지고, 좀 더 활성화하기 위해 1980년, 문교부로부터 사단법인 인가를 받았다. 당시 단체의 법인화등록이 어려운 시기에 회장 이은상의 끈질긴 집념이 이 일을 성사시켰다. 또한 그는 1969년의 산악조난사고를 극복하고, 1970년 창립 25주년을 맞이하여 활기를 되찾으면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체계적인 등산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등산 아카데미 강좌'를 개설하여 수년간 지도자급 산악인들을 양성하였다.

▲ 한국산악회가 1953년에 실시한 독도학술조사.
▲ 한국산악회가 1953년에 실시한 독도학술조사.

노산의 등산관은 요산요수에 바탕을 둔 자연애호가 중심이었다. 시인 묵객들의 자연관을 지닌 그는 산을 사랑하는 자연탐사적인 성격의 등산관을 지니고 있었다. 서구 근대등산의 바탕이 된 알피니즘의 행동양식인 눈과 얼음이 덮인 고봉의 곤란성에 도전하는 서구적인 개념과는 거리가 있었다. '해오라기 나는 산'이라는 그의 호처럼 노산은 변절자라는 욕을 먹으면서 북진통일, 독재권력과 함께 하며 평생을 시조시인으로, 산악인으로 살았다. 그가 12년 동안 최장수 한국산악회장을 역임하며 '노산시대'를 이끌어 온 일은, 어려운 시대를 함께 산악운동을 펼쳐온 사람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그는 산을 사랑하고 즐긴 사람이었다.

1982년에는 그가 와병 중에 정부지원금을 받아 파견한 마칼루 학술원정대의 등정 소식을 병상에서 전해 듣고 기뻐하다가 4개월 후 영면하였다. 노산은 평생 문인으로서의 길을 걸어왔지만 생애의 후반부는 산악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가 회장으로서 학문의 높이만큼 산의 높이를 쌓아나간 세월은 12년(1967~70, 1973~82년)이다. 그리고 생의 끝자락에서 산악회 수장으로 만년설에 쌓아올린 성과는 8,463m의 마칼루다. 노산은 비록 37년 전에 세상을 떠났으나, 그가 심은 씨앗은 지금 성목(成木)으로 자라고 있다.

한국산악회 회장으로 노산의 공적은 참으로 크고 뚜렷하다고 한다. 노산은 첫째 정, 재계, 언론계와 연고관계를 맺었고, 두 번째는 일반인을 위한 전국 명산순례를 개최하여 등산인구의 저변을 확대했고, 셋째 한국산악회 회원가입을 개방하고 가입단체와 지방지부를 전국적으로 확대하였다. 네 번째는 산악계 지도자들을 위한 지도, 훈련을 맡아서 진행하는 등산아카데미를 별도 기구로 조직하여 교육활동을 일괄케 하였다. 다섯 번째는 국토녹화운동, 식목등산회, 자연보호운동을 실시하였는데 70년대 후반에 이르러 자연보호운동은 정부차원의 국가적인 국민운동으로 발전되었다. 여섯 번째로는 해외 선진등반기술 도입하고, 히말라야 해외 고산 진출과 원정 성취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 외에도 산악문화 활성화를 위한 산악도서 발간, 국제산악연맹 가입, 구미 각국 산악회 순방, 산악보호위원회 위원 참여, 한국산악회의 사단법인 설립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노산문학회, <민족시인 노산의 문학과 인간>, 횃불사(1982년), 389쪽.)

평소 노산에게는 서원(誓願)이 세 가지 있었다. 첫째는 국토예찬이고, 두 번째는 우리 역사와 전통을 발양해보고 싶은 것, 세 번째는 구국행(救國行)을 짓고 있는 모든 동지들 앞에 경례해보고 싶은 것이라고 하였다.(이은상, <노산문학선>, 탐구당(1975년), 124쪽.) "내 생의 반 이상을 강산순례에 바쳤고, 내 문학작품의 반 이상이 강산에서 얻어진 것"이라며 "내 지식과 사상과 인간성이 온통 강산에서 이루어진 것이다"고 밝힐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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