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야구 100년사> 정리작업을 하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마산용마고(옛 마산상고)를 빼놓고 이 지역 야구 역사를 논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변곡점마다 마산용마고 야구부, 그리고 그 출신들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이 학교 출신 세 사람을 만나 봤습니다. 야구인 못지않은 열정을 쏟는 동문, 전 감독, 그리고 스타 선수 출신입니다.  

▲ 변종민 전 마산용마고 총동창회 사무총장이 모교 야구부 저력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이창언 기자
▲ 변종민 전 마산용마고 총동창회 사무총장이 모교 야구부 저력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이창언 기자

변종민 전 마산용마고 총동창회 사무총장

창원 고교야구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마산용마고(옛 마산상고) 야구부. 

경남을 넘어 전국적으로도 이름난 마산용마고지만, 메이저 대회 우승컵은 한 차례도 들지 못했다. 경남고나 덕수고, 휘문고, 광주제일고, 장충고 등 다른 명문에 비하면 다소 아쉬운 성적. 하지만 그 누구도 마산용마고를 명문 반열에서 제외하거나 깎아내리지 않는다. 마산용마고가 명문 야구학교로 성장하고 남을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 있을까.

변종민(59) 전 마산용마고 총동창회 사무총장은 '한국 야구에 이름을 깊게 새긴 모교 출신 선수'를 그 이유로 꼽았다.

"초창기는 이호헌을 빼놓을 수 없죠. 1949년 쌍룡기 쟁탈 전국고교대회(현 화랑대기)에서 주장을 맡아 선수단을 이끌었던 그는 졸업 후 한국 야구 발전에 엄청난 공을 세웠어요. 기록 보편화에 앞장섰고 프로야구 탄생을 견인했죠. 1981년 프로야구 창립계획안을 만들어 고교 동창인 우병규 전 정무제1수석과 청와대를 60여 차례 들락거린 건 유명한 일화입니다."

변 전 총장은 김계현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김계현은 마산상고에서 야구를 시작해 '외길 인생'을 걸었다. 은퇴 이후 한전·국가대표 지도자로 존경받았다. 특히 '일본 아닌 한국만의 야구'를 강조했다. 대표팀 훈련용 야구 교본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 그는 존재만으로 '마산 야구'를 전국에 각인 시켰다.

이런 가운데 1960년대 재건한 마산용마고 야구부는 전국체육대회 우승, 황금사자기 준우승을 따내며 성적 반등을 맞기도 했다. 고대했던 '메이저대회 우승'은 끝내 없었으나 마냥 고개 숙일 필요도 없었다.

"김차열이라는 스타를 배출했죠. 전국체전 우승을 이끌었던 김차열은 어깨 좋은 선수로도 이름을 날렸는데, '외야 수비를 보는 김차열이 1루로 공을 던지면 관중석까지 뻗어간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어요. 18회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감투상과 타격상 받기도 했던 김차열은 훗날 실업야구를 풍미하는 선수가 됐고요."

1970년대도 마찬가지였다. 우승컵은 안지 못했으나 김용일(26회 황금사자기 미기상), 이효헌(30회 청룡기 타격상), 임정면(30회 황금사자기 타격상) 등은 한국 야구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프로야구가 출범하고 나서도 이 같은 흐름은 이어졌습니다. 1983년 유두열·박영태·한문연이 롯데에 입단하며 모교 위상을 높였고 박동수·공필성·장원삼·조정훈·정훈·김민우 등이 선배 뒤를 이었죠. 그 사이 모교 후원회도 출범,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요."

물론 메이저 우승을 '한'으로 여기는 동문도 있다. 그들에게 변 전 사무총장은 최근 10년을 주목하라고 당부한다.

"5~6년 사이 팀 성적이 많이 올라왔어요. 지역팀 한계를 극복하고 전국대회 4강 이상에 수시로 얼굴을 비췄습니다. 프로선수 배출도 매년 이어왔고요. 오늘날 고교야구는 성적과 지역 야구 발전 기여, 프로 진입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봐요. 그런 면에서 마산용마고는 진짜 전성기를 맞은 것인지도 모르죠."

▲ 이재문 경남야구협회장이 용마고 감독 시절 얘기를 풀고 있다.  /이창언 기자
▲ 이재문 경남야구협회장이 용마고 감독 시절 얘기를 풀고 있다. /이창언 기자

이재문 전 마산용마고 감독

이재문(64) 경남야구협회장은 1987~1993년, 1999~2007년 마산용마고(마산상고 시절 포함) 감독을 맡았다. 

그는 용마고 지휘봉을 잡으면서 1989년 전국체전 3위, 1993년 대붕기대회 준우승, 1999년 무등기대회 4강 등을 기록했다. 그러다 2001·2004년 대붕기대회 우승까지 거머쥐었다. 4대 메이저대회(청룡기·황금사자기·대통령배·봉황대기)에서 우승을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용마고 야구부 전성기 초석을 닦았다. 

이 회장은 마산성호초등학교 5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이유는 '유니폼이 멋있어서'였다. 그는 이후 마산중을 거쳐 마산상고에서 주로 내야수로 활약했다. 1973~75년 시절이다. 동기가 유두열이었고, 한해 위 선배가 정학수, 한해 아래 후배가 임정면·박용성이었다. 

멤버에서 짐작되듯, 마산상고는 당시 성적면에서 약진을 이뤘다. 하지만 4강 문턱에서 번번히 좌절했다.

"우리 고3 때 '4강 제도'가 도입됐어요. 전국대회 4강 안에 들어야 대학 진학이 가능한 거죠. 그런데 우리가 8강까지만 3번 진출했던 거로 기억합니다. 어쨌든 당시 고교야구 열기는 엄청났죠. 전국대회 4강만 올라도 카퍼레이드를 할 정도였으니까요. 대회가 서울서 열리면, 마산상고 재학생들도 수업 빼먹고 자비로 그 먼 곳까지 응원오곤 했습니다."  

▲ 이재문 경남야구협회장이 용마고 감독 시절 얘기를 풀고 있다. 오른쪽은 역시 이 학교 출신인 원로 야구인 김성길 옹. /이창언 기자
▲ 이재문 경남야구협회장이 용마고 감독 시절 얘기를 풀고 있다. 오른쪽은 역시 이 학교 출신인 원로 야구인 김성길 옹. /이창언 기자

그는 그래도 진학에 성공하면서 영남대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다 1979년 모교 마산중을 시작으로 지도자 삶을 살았다.

이 회장은 한때 광주일고 지휘봉을 잡기도 했다. 박재홍·이호준·김종국 등이 선수로 뛰던 시절이다. 

"당시 광주일고 인기가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완도로 전지훈련을 갔는데, 기자들이 함께 숙식하며 상주를 했습니다. 이태일(전 NC다이노스 대표) 씨가 기자로 활동할 때였습니다. 당시 이 기자와 가볍게 얘길 나눴는데, '광주일고 올해 목표 우승 세번'이라는 기사가 나가 난처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허허허."

그는 선수·감독을 거치는 동안 하나 느낀 게 있다고 한다. 근성 하나만은 마산을 따라올 데가 없다는 것이다.  

"마산상고 선수 시절 광주일고와 붙어 8강서 떨어졌어요. 그날 저녁 식당에서 서로 마주쳤는데요, 우리가 완전히 으르렁으르렁했죠. 우리 기에 눌려서 이 친구들이 꼼짝도 못 하고 가버리더군요. 마산 선수들이 유독 기가 세고 악착같은 근성이 있는 건 분명하죠."

조정훈 마산용마고 출신 다승왕

프로야구 출범 이후 '마산 야구'는 숱한 프로선수를 배출하며 위상을 떨쳤다. 일일이 나열하기도 벅찬 이름들이나, 그사이 유독 빛나는 별도 있다. 전 롯데자이언츠 소속 조정훈(35)이다.

마산양덕초-마산중을 거쳐 마산용마고에서 야구를 이어간 조정훈은 고교 시절 크게 주목받는 선수는 아니었다. 포수에서 투수로 전향한 게 고교 2학년 때였다. 중간에는 부상으로 1년 유급도 했다. 마운드에 본격적으로 오른 게 고교 3학년 때였던 셈이다. 짧다면 짧은 그 시기 조정훈은 무궁무진한 잠재력으로 자신 가치를 조금씩 높였다. 

2004년 3학년 시절 동산고와 맞붙었던 제26회 대붕기 고교야구대회 결승. 이 경기에서 동산고 좌완 금민철과 선발 대결을 펼친 조정훈은 12이닝 8피안타 11탈삼진 4실점(투구 수 175개)을 기록했다. 결승전까지 3경기에서 19.2이닝을 소화하며 305개 공을 던진 점을 고려하면 그야말로 철완을 과시한 것. 조정훈 호투 덕에 마산용마고는 대회 공동 우승 영광을 안았다. 조정훈은 금민철(결승전 12이닝 9피안타 11탈삼진 4실점 완투, 투구 수 173개)과 함께 우수투수상을 받았다.

롯데는 이런 조정훈을 눈여겨봤다. 롯데 구단은 '체격조건이 굉장히 좋아 대성 가능성이 크다'는 스카우트 팀 의견을 전해 들었다. 이에 2005년 2차 지명 전체 1순위로 조정훈을 선택했다.

▲ 조정훈은 마산용마고 졸업 후 롯데에 입단해 프로야구 다승왕에 올랐다. 그는 현재 모교로 돌아와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다. /연합뉴스
▲ 조정훈은 마산용마고 졸업 후 롯데에 입단해 프로야구 다승왕에 올랐다. 그는 현재 모교로 돌아와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다. /연합뉴스

 

조정훈은 프로 입단 첫해 19경기에 출전해 1승을 거뒀다. 주로 2군에서 제구력과 구위를 가다듬으며 때를 기다렸다. 유망주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며 성장한 조정훈은 2008년 6월 22일 잠실 LG전에서 프로 데뷔 첫 선발승이자 프로 2승째를 '완봉승'으로 장식하며 자신 이름을 전국에 알렸다. 그해 조정훈은 14경기에서 5승 3패 1홀드 평균자책점 3.15를 기록, 포스트 손민한 등장을 예고했다.

2009년 조정훈은 최고 전성기를 맞았다. 130㎞ 초·중반 빠르기에 날카롭게 떨어지는, '당대 최고 포크볼'을 앞세운 조정훈은 롯데 선발 한 자리를 꿰차더니 14승(9패)을 거두며 공동 다승왕에 올랐다. 

하지만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100이닝을 넘겨 182.1이닝을 소화한 후유증은 컸다. 팔꿈치 통증에 신음하던 조정훈은 2010년 6월 13일 한화이글스 경기를 끝으로 그라운드를 떠나야 했다. 조정훈은 이후 세 번의 팔꿈치 수술을 받으며 긴 재활에 들어갔다. 7년의 기다림 끝에 2017년 돌아온 조정훈은 롯데 불펜진으로 활약하며 26경기 4승 2패 8홀드를 평균자책점 3.91을 남겼다. '안되더라도 끝까지 해보자'는 스스로 다짐이 제대로 통한 한해였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2018년 부상 여파로 출발이 늦었던 조정훈은 그해 7경기에 등판해 4.1이닝을 소화하는 데 그쳤다. 그렇게 조정훈은 13년간 몸담았던 롯데를 떠났다.

프로 무대와는 작별을 고한 조정훈은 올해 고향 마산에서 제2 야구 인생 첫발을 내디뎠다. 모교 마산용마고 코치로 합류한 것이다. 조정훈 가르침 속에 성장한 마산용마고 투수 김태경은 2020 KBO리그 신인 1차 드래프트에서 NC다이노스 선택을 받기도 했다.

숱한 위기에도 야구를 절대 놓지 않았던 조정훈은 이제 말한다. 서툴지만 천천히 새 목표를 잡아가겠다고.

"프로시절에도 마산을 찾을 때면 뭔가 마음이 편안했어요. 학창 시절부터 운동하고 경기한 곳이 마산이다 보니 마치 놀이터 같기도 했죠. 마산 팬 응원 속에 오히려 편하게 던진 기억이 있어요. 이렇게 다시 돌아오게 됐네요. 아직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우선 주어진 위치에서 노력하면서 자리를 잡아가야겠다는 생각이에요."

그러면서도 조정훈은 후배들이 자신을 뛰어넘는 더 큰 선수로 성장하길 당부한다.

"마산 고교야구는 2000년 이후 진짜 전성기를 맞은 듯해요. 각종 대회에서 성적을 거두고 좋은 선수도 많이 나왔죠. 올해 역시 마산용마고는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기도 했고요. 모교에 재능있는 선수들이 많아요. 앞으로 힘든 시간도 있겠지만 끝까지 버티며 열심히 하다 보면 분명히 무언가를 얻으리라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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