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이 7월보다 훨씬 더 뜨겁다. 날씨가 아니라 일본을 규탄하는 목소리를 일컫는 말이다. 그동안 한국과 선린관계로 포장돼온 일본을 까발리는 글과 영상이 도처에 넘쳐난다. 감정에 치우친 것들이 많지만, 개중에는 일본의 본질을 꿰뚫는 수작도 더러 보인다. 온 국민이 일본 공부 하나는 확실하게 하는 듯하다.

'일본의 퇴행'을 이야기할 때 빠트릴 수 없는 게 있다. 역사가 브루스 커밍스가 한 말이다. 

"국제 전쟁에서 차지하는 일본의 대미종속적인 위치가 변하지 않는 한 일본의 전후는 끝나지 않는다!"

<일본 전후사>를 쓴 나카무라 마사노리는 "일본의 전후는 언뜻 평화로워 보이지만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걸프 전쟁, 이라크 전쟁으로 이어지는 미국의 전쟁에 끊임없이 관여해왔다. 이는 일본의 정치 경제 외교 상태를 규정했으며, 앞으로 일본의 국가 형태까지도 결정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이게 무슨 말일까? '배후국'인 미국이 일본과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알지 않고서는 현대 일본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다.

1945년 9월 2일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가 USS 미주리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1945년 9월 2일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가 USS 미주리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1945년 9월 2일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가 USS 미주리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1945년 9월 2일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가 USS 미주리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태평양 전쟁이 종료된 1945년 8월. 미군이 맞닥뜨린 가장 큰 문제는 300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키는 일이었다. 마지막까지 옥쇄(玉碎) 운운하며 본토 결전에 대비한다는 이야기가 일본군 사이에 공공연히 나돌았기에 미국은 무장해제 과정을 숨죽여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무장해제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일에는 50만 대군을 거느린 관동군이 소련 최고지휘관 바실레프시키 원수와 정전협정을 맺고 즉각 무장해제를 실행하기로 약속했다. 참모총장 가와베 도라시로는 마닐라로 날아가 연합국 최고사령관에게서 항복 문서와 일반명령 제1호를 수령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항복선언과 함께 무장해제를 명령한 일왕이었다. 누구도 승조필근(承詔必謹·왕의 명령을 받들어 모심)을 거역하지 못함을 알아차린 미국 정부와 통합참모본부는 '천황제를 지지하진 않지만 활용한다'는 방침을 굳히게 된다. 패전에도 불구하고 당시 일본인들의 80%가 천황제를 지지하는 현실도 한몫했다.

곧이어 일본에 상륙한 GHQ(연합국 총사령부)는 전범 재판을 필두로 전 분야에 걸친 일본 개조작업에 돌입한다. 쇼와 일왕이 책임 추궁 대상에서 빠진 것은 물론이다.

맥아더(왼쪽)와 쇼와 일왕 히로히토(오른쪽).
맥아더(왼쪽)와 쇼와 일왕 히로히토(오른쪽).

하지만 논리적으로 아시아에서 2천만 명, 일본에서 310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대원수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게 말이 되는 걸까? 쇼와 일왕도 한때는 퇴위를 생각한 적이 있었던 모양이나 '자신의 대에서 황실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선조존숭주의를 내세워 계속 자리에 머물렀다. 총사령관인 맥아더 또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본 통치를 성사시키고 싶었다. 그렇게 하려면 쇼와 일왕의 협력을 제공받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이렇게 해서 맥아더와 천황의 정치적 공생이 시작되었다. 

쇼와 일왕이 퇴위도 하지 않고, 또 전쟁 책임에 대해 이렇다 할 말 한마디 없이 입을 씻어 버린 일은 전후 일본사, 특히 일본인의 정신사에 헤아릴 수 없는 마이너스 영향을 미쳤다. 일본인들의 전쟁책임의식을 희박하게 했을 뿐 아니라 지도자들이 정치적 책임과 도의적 책임을 회피하는 전례가 됐다.

전시 중 일왕의 권위에 부화뇌동하여 "니미츠야 맥아더야 어서 나오너라. 나오는 대로 지옥불에 처박아 줄께"라고 노래 부르던 일본인들은 패전 후 몇 개월도 지나지 않은 사이에 태도를 180도 바꿔 최고사령관인 맥아더 앞에 바짝 엎드렸다. 그러나 일왕이 책임을 추궁당하지 않으니 그들의 정신세계 또한 인지부조화를 느끼지 못했다.

일본에서는 1945년 미국의 일본 점령을 패전으로 보는 시각과, 패전이 아니라 종전에 불과하다고 보는 시각이 양립하고 있는데, 종전을 주장하는 이들은 주로 우익이다. 그들은 천황제란 국체가 유지 보존됐기 때문에 일본이 진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일왕에 대한 책임 면탈이 지금에 이르도록 일본의 침략을 호도하는 무기로 사용되고 있음을 잘 일러주는 말이다.

평론가 다케우치 요시미는 동양이 유럽의 침략에 대한 저항을 계속함으로써 근대를 이뤘다고 말한다. 비록 그것이 패배로 점철된 역사이기는 하지만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것, 혹은 패배를 망각하는 것에 대한 저항을 통해 독자적인 길을 개척한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일본문화에 대해서는 "혁명이라는 역사의 단절을 경험하지 못했다. 잘못된 과거를 절단함으로써 새롭게 태어나고 옛것의 의미를 되살리는 운동을 경험하지 못했다. 즉 역사를 새로 쓰지 못했다. 그래서 새로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1951년 대일 강화조약에서 일본은 미국에 완전히 종속되는 '국제적 위치'를 부여받는다. 저널리스트인 마쓰모토 시게하루는 그래서 전후 미군이 시행한 민주개혁을 '져서 얻은 민주주의'라고 표현한다. 

GHQ에 의한 '위로부터의 혁명'은 전전 일본의 국가체제,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위생 등 전 분야에 걸친 장대한 일본 개조계획이었다. 이 혁명은 미국에서 이루지 못한 '뉴딜의 꿈'을 일본에서 실현하고자 노력한 GHQ 내 자유주의자들의 의지가 반영된 까닭에 일본의 좌파나 진보세력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과격했다. 더욱이 그 계획은 대부분이 실현되었다.

전후 일본에서 보수정권이 장기집권을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위로부터의 혁명'이 혁신정당의 혁명을 대행했기에 일본의 민주주의는 '패전에 의한 민주주의'라는 본질적 약점을 갖고 있었다는 말이다. 시민들이 스스로 혁신을 한 것이 아니기에 일본의 민족성은 '주는 과일'에 만족하는 온실 속 화초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주체적 시민역량이 부족하다는 본질적 결함에 더해 거저 얻은 민주주의는 치열한 자기반성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평화헌법을 위협하고, 피침략국을 대놓고 멸시하는 우익들이 아직도 활개를 치는 까닭이다.

한편 대대적인 민주화 작업에도 불구하고 일본경제는 그리 좋지 못했다. 특히 1949년부터 불어닥친 도지 불황으로 서민생활은 매우 어려웠다. 이때 한국 전쟁이 터졌다. '가문 하늘의 단비'와 같은 소식이었다.

일본에 기지를 둔 미군은 군수물자(마대 모포 면사 트럭 포탄 강재 등)와 서비스(트럭 전차 함정의 수리, 기지의 건설 및 정비)를 일본에 발주했다. 1950년에서 1953년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일본에서 소비한 금액은 30억 달러에 달했다. 미국 정치학자 찰머스 존슨은 한국 전쟁이 일본에 끼친 영향은 미국이 유럽에 퍼부은 '마샬 플랜'과 같은 효과를 낳았다고 진단한다.

미국에 종속된 댓가로 엄청난 부를 획득했다는 이야기다. 60년대에 터진 베트남전 또한 마찬가지다. 베트남전은 일본이 70년대 고도성장을 이루는 데 큰 발판이 됐다.

미국은 한때 서로 총을 겨눴던 일본을 생각만큼 가혹하게 다루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자 오히려 아시아 그 어느 나라보다 일본을 싸고돌았다. 패전 후 일본이 미국의 실력을 인정하고 종속적 위치를 기꺼이 감내한 것도 한 원인이지만, 기본적으로 아시아에서 홀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을 높게 평가하면서 일본을 아시아를 움직이는 지렛대로 활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전략적 목표 때문에 미국이 일본에 깊이 경도된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일본이 서구인들이 동양에 대해 가지는 감정, 즉 오리엔탈리즘을 잘 충족시켜주는 나라라는 사실이다. 

친일 성향이 강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친일 성향이 강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20세기 초로 거슬러 가보자. 1905년 러일전쟁 해전에서 일본이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이것은 세계가 이제까지 봐온 것 중 가장 위대한 사건이다. 트라팔가 해전도 여기에는 못미친다. 최초의 소식이 도달했을 때 나 자신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제2, 제3의 보고가 들어오자 나는 흥분된 나머지 일본인이 된 기분이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고 말했다. 불과 몇십 년 후 교전국이 될 나라에 대해 미국 대통령이 이런 표현을 했다는 건 믿기 힘들다.

러일전쟁이 벌어졌을 때 미국의 분위기는 압도적인 친일이었다. 당시 루스벨트가 가장 주의를 기울인 부분도 러시아와의 평화교섭을 어떻게 하면 일본에 유리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는 러시아가 불성실하면서 교활하다고 비난한 반면 일본에 대해서는 "당신들 일본인은 위대한 전쟁의 최후를 위대한 강화로 장식했다"고 부추길 정도였다.

가쓰라 태프트 밀약의 주인공, 가쓰라 다로 일본 총리.
가쓰라 태프트 밀약의 주인공, 가쓰라 다로 일본 총리.
가쓰라 태프트 밀약의 주인공,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미국 대통령(밀약 당시 전쟁부 장관).
가쓰라 태프트 밀약의 주인공,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미국 대통령(밀약 당시 전쟁부 장관).

일본과 한국의 운명을 극명하게 가른 가쓰라 태프트 밀약도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온 것이다. 1905년 6월 러일강화회의가 열리게 되자, 그해 7월 루스벨트 대통령의 직접 지시를 받은 국무장관 태프트는 일본 외상인 가쓰라를 만나 미국의 대필리핀 권익과 일본의 대조선 권익을 상호 교환조건으로 하는 비밀협정을 체결했다. 즉 미국은 20세기 초에 이미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을 용인했던 것이다.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은 "1900년 이래 한국은 자치할 능력이 없으므로 미국은 한국에 대해 책임을 져서는 안 되며,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여 한국인에게 불가능했던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능률 있게 통치한다면 만인을 위해 보다 좋은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이 비밀협정을 통해 조선문제에 미국이 개입할 가능성을 차단한 일본은 같은 해 8월 제2차 영일동맹, 9월에 포츠담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한국에 대한 국제적 지배권을 획득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의 국권을 빼앗는 을사조약을 강행한다. 

루스벨트의 언동을 보면 마치 '타고난 친일파'라는 생각이 든다. 루스벨트를 위시해 많은 서구인들이 일본으로 기울어진 분위기는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20세기 초 일본인 니토베 이나조가 영문으로 <무사도>를 발간하자 서구 사회는 이 책에 열광했다. 서구문화에서 찾기 힘든 사무라이 덕목이 그들을 흡인한 때문이다. 당시 이 책에 반응한 서구인들은 일본인들이 예외 없이 칼을 휘두르고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는 줄 알았다고 한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통해 국제적 위상을 드높인 일본은 서구 열강들에게서 단연 주목받는 존재였다. 여기다 <무사도>가 가져다준 환상, '이키'로 일컬어지는 일본의 미의식 등이 결합해 일본은 동경의 대상이 됐다. 거기다 일본은 서양을 찬양하면서 따라 배우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모범생이었다. 오페라 <나비부인>으로 대표되는 오리엔탈리즘은 그렇게 해서 곧 친일 현상으로 굳어진다.

만약 미국이 아닌 다른 서구 열강이 미국을 대신했더라도 결과는 같았으리라. 일본은 근대사를 통해 모방과 학습을 가장 열심히 했던 나라로 첫 손꼽힌다. 그리고 힘 있는 자를 숭배하고 약자를 멸시하는 태도를 또렷하게 체화시킨다.

그 바탕에는 '이것이 일본인이다' 혹은 '이것이 일본문화다'라고 할 만한 주체적 의식, 또는 사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게 일치된 의견이다. 

대표적인 예로 기리시단(크리스천·16세기 일본에 등장했던 기독교인들)이 있다. 포교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기독교는 일본에서 선교사 자신이 경탄할 정도로 세를 불렸다. 단순히 신자만 많아진 게 아니다. 신학적 이해의 정도도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마치 썰물처럼 힘을 잃어버리고, 사상사라는 흐름에서도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렸다.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는 이를 두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관계를 통해 외래사상을 위치시켜주는 중핵 혹은 좌표축에 해당하는 사상적 전통이 일본에는 없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우치다 타츠루는 이런 심성을 재미있게 표현한다. 

"어느 시대, 어느 분야에서도 '시류를 타고 잘난 체하는 사람'과 '시류를 타고 잘난 체하는 사람에게 휘둘리는 사람'이 눈 깜짝할 사이에 대다수를 차지해버린다. 겉보기에는 꽤 달라 보이지만 그들의 반응은 어떤 패턴을 공유한다. 그것은 뭐가 뭔지 잘 모르는 것에 맞닥뜨리면, 되는 대로 유화적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뭐가 뭔지 모르는 것을 만나면 판단을 유보하고 시간을 들여 음미하여 그것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일단 무조건 유화적 태도를 드러낸 다음 그대로 멍하게 방치해둔다. 그리고는 누군가가 '야! 이거 대단한데!'하면 다짜고짜 집단 전체가 그것에 감염되고 만다."

미국은 이런 일본을 잘 파고들었다. 아니 미국이 파고들었다기보다는 힘 있는 미국을 일본이 늘 그러하던 대로 잘 받아들였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 논리를 확장시키면 일본이 인근 아시아 국가를 계속해서 멸시하고, 강자인 미국에 대해 끽소리 한마디 못하는 심성 구조가 이해된다. 태평양 전쟁이 끝났을 때 일본인들 사이에 미국에 졌다는 의식은 있을지언정 중국의 항일 전쟁에 패했다는 의식이 희박했다는 사실은 이런 심성을 잘 증명한다. 

그래서 8월에도 망언은 계속된다. 이중 압권은 DHC라는 화장품 회사의 CEO가 했다는 말이다. "일본인은 아시아에서 유일한 유럽인이다!"

한일 갈등이 표면화된 원인을 아베 수상에게서 찾는 사람들이 많다. 우익 정치인인 그가 대치 국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시각이다. 그런데 현대사를 훑어보면 '상왕'인 미국을 제쳐놓고 독단적인 행동을 할 '멘탈'이 일본에는 없다. 미국의 용인이 있지 않고서는 어떤 일도 벌이지 못한다. 

2019년에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건 미국의 제1 파트너가 일본이라는 사실이다. 역사가 입증했듯이 한반도는 여전히 종속변수에 불과하다.

참고자료

♣ 나카무라 마사노리 지음/유재연 이종욱 옮김, <일본전후사>, 논형

♣ 마루야마 마사오 지음/김석근 옮김, <일본의 사상>,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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