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야구 100년사> 정리작업을 위해 많은 야구인을 만나고 있습니다. '올드 야구팬' 처지에서 그들 이야기 하나하나가 주옥(?)같이 다가옵니다. 그들의 기억 하나하나가 곧 이 지역 야구 역사이기도 합니다. 이번 달은 세 야구인의 옛이야기입니다. 

 

'1964년 체전 우승' 마산상고 최재출

마산상고(현 용마고) 야구부는 1964년 전국체전에서 우승 기염을 토했다. 당시 우승 멤버들은 어느덧 나이 칠십을 훌쩍 넘었다. 39회 졸업생인 최재출(73) 씨는 여전히 그 시절 기억을 어렵지 않게 떠올린다. 

최 씨는 선수 시절 키 168cm로 큰 체구에 속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발이 빠르고 수비 센스가 남달라 주전 좌익수로 활약했다. 그에게 가장 인상 깊은 장면 가운데 하나는 1964년 10월 '제18회 황금사자기대회' 2회전 배문고와의 경기다. 마산상고가 2-0으로 앞선 7회말 2사 주자 1·2루. 오늘날 '국민 감독'으로 불리는 김인식(72)이 타석에 들어서 좌익 선상으로 타구를 날렸다. 이때 좌익수 최재출이 다이빙캐치로 공을 잡아내며 위기를 모면했다. 

"당시 김인식은 공도 잘 던지고 방망이도 좋았어요. 그가 친 공이 레프트 라인으로 날아오는데 무조건 잡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온몸을 던졌어요. 다행히 글러브 안으로 들어온 거죠. 만약 이 공을 놓쳤다면 경기 흐름상 우리가 지는 경기였어요."

그의 활약 속에 마산상고는 이 대회 준우승을 차지했다. 마산상고 선수단은 지역으로 돌아와 카퍼레이드 등 시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1964년 전국체전 마산상고 우승 멤버인 최재출(73) 씨가 당시 대회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남석형 기자
1964년 전국체전 마산상고 우승 멤버인 최재출(73) 씨가 당시 대회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남석형 기자

그는 마산동중 시절 체육 선생에 발탁돼 야구를 시작했다. 사실 마산상고 진학 후 야구에 큰 뜻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박상권(작고)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던 2학년,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그는 4년 만에 졸업했는데 이유가 있었다. 

"1963년 3학년 때 졸업반 선수가 4명이었어요. 그때 나와 김차열만 실업팀으로 스카우트 되지 못했어요. 학교에서 '야구부를 제대로 한번 살려보자'며 한해 휴학하라고 해서, 저도 받아들인 거죠. 그렇게 1964년까지 1년 더 뛰면서 전국체전 우승과 황금사자기대회 준우승을 경험하게 됐습니다."

그는 마산상고 졸업 후 고려대 진학 제안을 뒤로하고 당시 실업 최강 중 하나였던 제일은행에 입단했다. 하지만 당시 올코리아(국가대표) 박현식·엄성식·진현주 등과의 주전 경쟁이 녹록하지 않았고, 발바닥 부상까지 겹쳐 2년여 생활을 정리하며 은퇴했다. 

최 씨는 현재 마산합포구 창동 고려당 건물 3층에서 소박한 맥줏집을 운영하고 있다. 전국체전 우승 당시 또 다른 주축이었던 정성국(73) 씨와 함께 가게를 꾸렸다. 지역 야구인들이 이따금 모여 옛이야기를 푸는 공간이기도 하다. 

 

1980년대 '롯데 안방마님' 한문연

한문연(58·현 NC 코치)은 1983년 프로 입단 후 1992년 은퇴 때까지 10년간 '롯데 안방마님'으로 활약했다. 롯데가 지금까지 한국시리즈 우승을 딱 2번(1984·1992년) 차지했는데, 한문연은 그 영광을 모두 경험했다.

그는 마산에서 태어나 성호초등학교 때 친구 추천으로 야구부에 들어갔다. 포수도 초등학교 때부터 맡았다. 그는 마산동중을 거쳐 마산상고에 진학했다. 박용성·임정면·박영태·박동수·엄태섭이 같이 뛰던 시절이다. 

그는 1983년 계약금·연봉 각각 1500만 원을 받고 롯데에 입단했다. 당시 대기업 월급이 20만 원가량 되던 때였으니,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롯데는 전년도 주전 포수였던 차동열을 MBC로 이적시키고, 1982년 세계선수권대회 우승 멤버인 한문연·심재원을 영입했다. 한문연은 입단 첫해 심재원과 주전 경쟁 속에서 정규리그 전체 경기의 절반가량 소화했다. 다만 최동원이 출전하는 경기에는 함께 호흡을 맞췄다.

"제가 최동원 전담포수였죠. 연배가 심재원·최동원, 그리고 저거든요. 최동원 입장에서는 선배보다는 후배인 저와 배터리를 이루는 게 좀 더 편했던 것 같습니다. 최동원은 공을 위에서 내리꽂는 스타일이에요. 당시 타자들이 '몇 층 되는 빌딩 위에서 던지는 것 같다'는 말을 하기도 했죠."

한문연(58)은 1983년 프로 입단 후 1992년 은퇴 때까지 10년간 '롯데 안방마님'으로 활약했다. 현재 NC다이노스 D팀 코치를 맡고 있다. /경남도민일보 DB
한문연(58)은 1983년 프로 입단 후 1992년 은퇴 때까지 10년간 '롯데 안방마님'으로 활약했다. 현재 NC다이노스 D팀 코치를 맡고 있다. /경남도민일보 DB

그는 역시 1984년 한국시리즈 우승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삼성과의 7차전. 롯데가 6-4로 앞선 가운데 9회 아웃 카운트 1개만 남겨놓고 있었다. 상대 타자는 장태수였다. 

"포수는 투수한테 사인을 자신감 있게 줘야 하거든요. 그때 장태수를 상대로 '에라 모르겠다, 행님 직구로 갑시다'라는 느낌으로 마지막 사인을 냈어요. 최동원 공이 매우 높았는데 장태수 방망이가 나오는 게 보였어요. 순간 '됐구나' 싶었죠. 그런데 장태수가 나가던 방망이를 멈추며 볼넷이라고 1루로 뛰어가는 겁니다. 하지만 이미 롯데 선수들이 더그아웃에서 경기장으로 뛰쳐나오는 상황이었어요. 그런 분위기니 심판도 스윙 아웃을 선언했죠. 실제 방망이가 돈 것도 맞고요. 35년 전 일인데, 그 순간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한문연은 이후 전성기를 보내다 1986년 말 어깨를 다치면서 주춤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꾸준히 경기에 출전했고, 1992년 플레잉코치로 활동하면서 또 한 번 우승을 경험했다. 

"사실 그때는 큰 희열까지는 아니었어요. 우리 투수진이 염종석·윤학길·윤형배·박동희까지 쟁쟁했거든요. 한국시리즈에서도 빙그레를 상대로 4승 1패로 비교적 쉽게 이겼어요. 1984년에는 모두가 삼성 우승을 예상했는데, 우리가 그걸 극복했기에 더 큰 감격을 느꼈던 거죠."

그는 프로시절 '마산 출신 야구인'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고 한다.

"롯데 경기에서 어떨 때는 마산상고 출신이 8~9명씩 뛰고 그랬습니다. '롯데는 마산상고 없으면 안 된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마산야구장에서 시합을 하면 부담도 컸어요. 워낙 관중 열기가 높아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압박감이었죠. 그래도 마산상고 출신들은 고향 사람들 정서를 아니, 동시에 힘이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원한 슈퍼스타' 진해 야구인 감사용

감사용(62)은 삼미슈퍼스타(OB 베어스에서 은퇴) 투수 출신으로, 1982년부터 1986년까지 프로 무대에서 활약했다. 5시즌 동안 통산 61경기에 나와 1승 15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6.20이라는 다소 초라한 성적을 거뒀다. 하지만 그의 '통산 1승' 과정을 영화화한 <슈퍼스타 감사용>이 지난 2004년 나오면서 유명세를 치렀다. 

그는 진해중학교에서 처음 야구를 시작했고, 삼미 진해 전지훈련 때 스카우트 되는 등 '진해'와 각별한 인연을 두고 있다. 

그는 김해 진영에서 태어났지만, 진해가 운명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진영대흥초등학교 시절 어깨가 좋아 '공 멀리 던지기' 대표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6학년 어느 날, 친척 집에 간다고 진해를 찾았어요. 진해역에서 내려 시가지를 바라보니까 김해 시골길하고는 차원이 다른 겁니다. 길이 깨끗하게 닦여있고, 이국적인 분위기랄까요, 그런 게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마침 공설운동장에서 진해대야초 야구부가 경기하는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그때 야구를 너무 하고 싶은 겁니다. 아버지한테 진해대야초로 전학 보내 달라고 했고, 뜻대로 됐습니다."

그는 야구를 하기 위해 나름의 전략을 짰다. 그 과정에서 시간이 조금 지연되기도 했다.

"진해대야초 바로 옆에 진해중이 있었는데, 이 학교 역시 야구부를 두고 있었습니다. 저는 진해중에 진학해서 야구를 시작하겠다는 마음이었죠. 성적이 안 돼 1년 유급 끝에 진해중에 입학했습니다. 야구부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선배들이 창고에서 후배들에게 기합주는 걸 봤습니다. 그때는 좀 그랬어요(웃음). 그래서 조금 늦춰 2학년 때부터 야구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공부랑 개인 훈련을 병행했어요. 밤에는 진해 탑산에 올라가 뛰고, 또 공도 던지며 준비했죠. 마침내 2학년 때 체육 선생님 권유 형식으로 야구공을 본격적으로 잡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진해중은 마산중·마산동중보다 실력 면에서 크게 뒤졌다고 했다. 전국대회에 나가고자 예선전을 치를 때마다 마산지역 양대 중학교에 번번이 가로막혔다고. 

감사용 씨가 야구를 시작한 진해중 시절 등 옛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는 현재 진해리틀야구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남석형 기자
감사용 씨가 야구를 시작한 진해중 시절 등 옛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는 현재 진해리틀야구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남석형 기자

감 씨는 그럼에도 당시 '진해 야구 저변'은 어느 정도 깔렸었다고 기억했다. 그 중심엔 해군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진해에 초·중학교에 야구부가 있었고, 특히 해군에서 야구를 많이 했어요. 사회인 야구팀이 있을 정도였죠. 진해공설운동장은 항상 야구하는 사람으로 붐볐습니다. 우리 진해중 야구부도 여기서 훈련을 많이 했어요. 당시엔 해군이 중학교 야구부를 밀어줬습니다. 한번은 중2 때 울산서 열린 도민체전에 진해 중학부 대표로 참가했는데, 돌아오는 차편이 없어서 성인 대표로 출전했던 해군 트럭을 얻어타기도 했습니다."

감 씨는 마산고 졸업 후 군 복무를 마치고 마산동중 감독직을 제안받았지만, "너무 이른 나이에 감독을 맡을 수 없다"며 고사했다. 그러다 야구에 대한 미련을 어느 정도 접고 창원 삼미특수강에 입사했다.

"삼미특수강에 들어와 보니 여기 직원들도 야구를 정말 좋아하더라고요. 입사 이후 창원공단 이사장기 대회에 자주 나갔습니다. 그런데 마침 삼미슈퍼스타즈가 진해로 전지훈련을 왔어요. 제가 진해 사정을 잘 아니까 길 안내도 하고, 같이 합숙하면서 하루에 연습구를 많이 던져줬어요. 하루 공 1000개씩 던져주고 그랬습니다. 당시 코치진이 왼손 투수가 필요하다고 해서 삼미슈퍼스타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뭐 일종의 파견근무였죠."

감 씨는 은퇴 이후에도 양덕초 감독, 김해내동중학교 창단에도 역할을 했다. 그리고 지난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진해를 연고로 한 국제디지털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으며 '고군분투'했다. 이후 진해리틀야구단 감독을 10년 넘게 맡고 있다. 

"당시 진해시가 국제디지털대 야구부 숙소 지원 등을 약속했는데, 팀이 꾸려질 무렵 관심을 거두는 바람에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진해 야구 부활' 노력을 거둘 수는 없습니다. 제가 진해리틀야구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진해는 야구로 맺어진 고향 같은 곳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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