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4년에 찍은 금강산 만물상의 모습 /전점석
지난 2004년에 찍은 금강산 만물상의 모습 /전점석

조선시대 문인들이 찬양한 금강산

일찍이 우리 조상들은 산수 다니기를 즐겨하였고 산수기(山水記) 읽기를 좋아하였다. 와류산수(臥遊山水)라는 말도 있다. 중국 당나라의 미술사가 장언원(張彦遠)의 <역대명화기>에는 ‘화가인 종병(宗炳)이 자신의 늙고 병듦을 슬퍼하면서 산수를 즐기고 싶으나 그곳으로 갈 수 없을 때, 산수화를 감상하는 것으로 그 느낌을 대신할 수 있겠다’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와유(臥遊)라는 말이 이에서 유래되었다. 강세황은 그의 ‘유금강산기’에서 ‘금강산을 그림으로 남긴다면 훗날 누워서도 볼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17세기 조선의 시인 묵객 사이에는 산수 유람이 일종의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첫손에 꼽히는 유람지가 바로 금강산이었다. 조선시대 명산 탐방의 정점에 있던 금강산의 경우 ‘금강산 문학’이라고 할 만큼 각양각색의 수많은 문학작품을 탄생시켰다. 금강산만큼은 아니지만 이른바 명산이라 불리는 곳은 어디든지 흠모와 묘사의 대상이 되어 많은 작품을 낳았다. 명산 탐방은 일종의 구도 행위였다.

옛사람들의 금강산 기행문 제목에는 ‘유(遊)’자가 많다. 남효온(1454~1492년)의 ‘유금강산기’, 김창협(1651~1708년)의 ‘동유기’, 이정구의 ‘유금강산기’, 법종의 ‘유금강록’, 이이의 ‘금강산관유기’, 홍여하의 ‘유풍악기(遊楓嶽記)’, 이옥의 ‘중흥유기(重興遊記)’, 이광수의 ‘금강산유기(金剛山遊記)’, 문일평의 ‘동해유기(東海遊記)’ 등 거의 대부분 ‘기(記)’ 앞에 ‘유(遊)’가 붙었다. 전국시대 송나라 출신으로서 노자와 더불어 도가사상의 대표작인 <장자>의 1편은 소(逍), 요(遙), 유(遊)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세 글자 모두 놀다는 뜻이다. 도를 터득한 초월자의 생활이다. 장자는 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노니는 것이 자기 철학의 핵심이었다. 우리나라의 옛 문인들에게 있어서도 ‘유(遊)’는 그냥 노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편안하게 자적(自適)하며 함께 어우러지는 것을 의미했다. 전통시대 문인들은 좋은 글을 짓기 위해 호연지기를 길러야 하고, 먼 곳으로의 여행이 필수적인데 이를 원유(遠遊)라고 했다. 한국과 중국문학의 전범인 사마천의 문장이 뛰어난 이유가 ‘먼 곳에 노닐어 그 기를 웅장하게 하였다(遠遊以壯其氣)’는 데서 찾았다.

15세기 금강산은 동아시아에서 조선을 대표하는 명산이었다. 중국, 일본의 사신들도 금강산 유람을 간절히 원할 정도였다. 금강산 인기는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1919년 일본 오사카에서는 기행문 <만선유기(滿鮮遊記)>가 출판되었는데 ‘후지산에 올라본 자는 공히 산수를 말하기에 부족하지 않다고 하는 시대는 이미 과거가 되었고 …… 이제는 금강산에 오른 자는 공히 산수를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하는 시절’이라고 할 정도로 일본은 조선의 명승지유람단을 모집하고 학생들의 수학여행을 권장하였다. 서양인으로는 한영수교를 맺은 지 6년이 지난 1889년, 주한 영국영사관 부영사인 Cambell의 ‘서양인 최초의 금강산 기록’, 선교사인 F.S.Miller의 ‘비숍과 동행한 선교사 밀러의 1894년 금강산’, I.B.Bishop의 ‘금강산 가는 길, 금강산의 여러 사원들’, 영국인 기자 Hamilton의 ‘1903년 금강산 절과 불교’, 선교사 James Gale의 ‘1917년 금강산’ 등이 있다. 서양인들의 눈에는 금강산의 절경보다 공공노역에 동원된 가난한 사람들, 외출하는 스님의 차림새, 사찰의 예불과 종 치는 모습, 종소리, 염불소리 등에 관한 인상 깊은 묘사가 많다. 캠벨은 당시 ‘서울에서 금강산을 여행하는 것은 유행의 첨단을 가는 것’이었으며 ‘금강산을 다녀와야만 진정한 여행자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절’이었다고 하였다. 여행에 필요한 것은 말과 지도였으며 동행인은 요리사, 통역관, 심부름꾼 등이었다. 미술평론가 이종수는 금강산 열풍이라고 표현했다. 

조선시대 문인들의 금강산 유람에는 일정한 탐승 코스가 있었다. 옛 금강산 기행문을 보면 내금강으로 들어가는 길은 대개 서울에서 양주(의정부)-포천-철원-김화(金化)-창도(昌道)까지를 기본적으로 거치게 되어 있었다. 여기까지가 닷새 거리였다. 그리고 창도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단발령을 오르고 여기서부터 30리를 더 들어가면 금강산 장안사 입구에 다다른다. 장안사에서 만폭동을 거쳐 안문재(내무재령)를 넘어 유점사에 이르기도 했다. 금강산 내산의 명승지를 먼저 살펴보고 동해안으로 나아가 관동팔경 중 일부를 보고 다시 금강 외산으로 들어갔다가 서울로 돌아가는데 대략 2, 30일 정도 걸렸다고 한다.박은순, <금강산 일만 이천 봉>, 보림출판사(2005년), 11쪽 외금강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회양, 통천, 고성, 신계사, 유점사를 가는데 신계사에서는 옥류동, 구룡폭이 추가되기도 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시조를 쓴 양사언은 금강산을 자주 유람하였으며 자신의 호를 봉래라고 할 정도로 좋아하였다. 봉래는 여름 금강산의 다른 이름이다. 양사언은 신선처럼 살다 간 사람인데 금강산 신계사 인근과 휴전선 군사분계선 바로 북쪽, 금강산이 바라다 보이는 감호에 집을 짓고 살았다. 양사언은 금강산 만폭동 입구에 바둑판을 바위에 새겨서 놀았다고 하는데 이곳을 삼산국(三山局)이라고 한다. 양사언은 우리 역사에서 금강산을 가장 사랑하였으며, 일생을 금강산에서 살고자 했던 진정한 금강산인이었다. 그가 회양군수로 있을 때, 만폭동에 있는 200미터 크기의 너럭바위 위에 용이 승천하려고 꿈틀거리는 듯한 힘찬 필치로 휘갈겨 쓴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 ‘봉래도(蓬萊島)’라는 초서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원화동천’이란 ‘신선들이 살고 있는 비경’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광수는 그가 쓴 <금강산유기>에서 양사언에 대하여 ‘나는 그러한 사람을 숭배도 아니 하고 도리어 사회에 대한 의무를 도피하는 자라 하여 공격도 하고 싶지마는 그가 이 대자연의 미를 이해하고 열애한 아름다운 심정은 사모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풍악기유, 금강예찬, 백두산근참기 등 최남선이 쓴 기행도서 /전점석
풍악기유, 금강예찬, 백두산근참기 등 최남선이 쓴 기행도서 /전점석

이광수의 <금강산유기>와 최남선의 <금강예찬> 

일제시대의 금강산 답사 열기는 1914년 9월 4일에 개통한 경원선 철도와 1931년에 개통한 금강산 철도를 이용했다. 총연장 223.7km의 경원선 공사를 할 때, 민간인과 의병들의 저항과 습격이 잦았고 일본인 측량대가 헌병대의 비호 아래에서도 한복으로 위장해서야 측량을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금강산 철도는 철도사업과 함께 발전소 건설을 통해 전원개발과 전력공급이 주력 사업이었다. 이 회사는 전원개발을 위해 금강산에 댐을 쌓고, 수로를 통해 동해로 물을 흘려보내는 유역변경식 발전소를 건설하기도 했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1917년에 이미 금강산탐승회(金剛山探勝會)를 개최하였다. 신문에 게재된 광고에 의하면 5월 14일부터 1주일간 진행되는데 참가비는 18원이며 남문역에서 출발한다고 하였다.

경원선 철원역에서 시작되는 금강산 철도는 김화를 거쳐 내금강역에 이르기까지 총연장 116.6km로 1919년에 착공하여 1924년 일차로 철원-김화 간이 개통되고 1931년 철원에서 내금강까지 전 구간이 완공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적어도 한 달 이상이 걸렸지만 근대적인 교통수단인 철도, 자동차의 도입 이후에는 5일 내지 일주일이면 가능하게 됐다. 특히 철도개설로 인하여 일반인들의 접근이 훨씬 쉬워졌다. 선연(仙緣)이 있어야 찾을 수 있다는 신비로운 곳이 아니라 누구나 갈 수 있는 유명한 관광명소의 하나가 된 것이다. 이광수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으로 악명 높은 데라우치도 금강산을 방문했으며, 만물초 삼선암에 오르는 길의 철제 난간은 그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관광안내서인 <금강산 탐승안내>에 의하면 당시 10일 예정의 일주 코스에 60원에서 100원의 비용이 책정되어 있었다. 비슷한 해인 1922년 당시 이광수가 자신의 강사료와 원고료 등을 합하여 예상했던 월수입은 150원가량이었고 이는 유학간 아내의 학비와 자신의 생활비로 쓰기에 그리 군색한 금액은 아니라고 했다. 이로 미루어보면 당시의 일본인들에게 금강산 탐승은 만만찮은 비용이 소요되는 관광 코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광객들은 해마다 꾸준히 늘어나 1920년에는 연간 7백여 명에 머물렀던 것에서 금강산 철도가 완전 부설된 1931년 이후에는 연간 4만여 명으로 늘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비록 1930년대 후반의 전시체제로 전환함으로써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금강산을 국립공원화하려는 계획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관광을 즐기는 계층은 일본인과 조선인 일부 계층에 한정되었고 볼거리 또한 일본의 시각과 의도대로 개발되었다. 이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금강산이 식민지 지배권력에게는 관광과 여흥의 장소였지만 대다수 조선인에게는 여전히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육당과 춘원의 금강산 기행은 경원선을 타고 시작하였다. 금강산 기행은 춘원 이광수가 먼저였다. 춘원은 1921년 여름과 1923년 여름 두 차례에 걸쳐 금강산에 올랐다. 첫 번째는 부부동반의 신혼여행길이나 마찬가지였고, 두 번째는 방학 중에 석전(石顚) 박한영, 이병기, 박현환과 함께 다녀왔다. 육당 최남선은 1924년 가을이었다. 춘원의 두 번째 기행과 육당의 기행에는 모두 최고의 안내자인 영호노사(映湖老師) 곧 석전과 함께 다녔다. 육당의 ‘풍악기유’가 연재되던 <시대일보> 지면에는 석전의 한시 ‘중유풍악시초(重遊楓岳詩艸)’가 나란히 연재되고 있었다. 석전은 춘원이 쓴 <금강산유기>의 제사(題辭)의 필자이며, 육당의 시조집 <백팔번뇌>에 붙은 네 개의 발문의 첫 번째 필자이기도 하다. 1924년의 금강산 기행 이후로 육당의 국토순례는 1925년의 ‘심춘순례’와 1926년의 ‘백두산 기행’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에서도 석전은 육당의 동반자가 된다. <백두산 근참기>의 서문에서 육당은 석전과의 여행을 일컬어 ‘순례(巡禮)의 선지식(善知識)인 석전노사(石顚老師)를 시배(侍陪)’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육당은 금강산 속에서 숨 막히는 환희와 법열의 순간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그 순간 아름다운 자연이었던 금강산은 배례의 성스러운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춘원은 달랐다. 순례자의 마음으로 출발한 것 같지만 시종일관 근대의 합리적인 시민이자 객관적인 관광객의 시선으로 금강산이라는 명소를 바라보았다. 육당의 경우는 순례로, 춘원은 여행으로 접근하였던 것이다. 내금강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망군대는 헐성루와 더불어 내금강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금강예찬’에서 육당은 이곳에서의 전망에 대해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 곳’이고 ‘말 못할 중의 더 말 못할 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춘원은 봉우리의 형상과 배치에서부터 그 사이로 형성되는 계곡들의 구성과 전체적인 조화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분석적이고 관찰의 태도였다. 춘원에게 금강산은 관리하고 보호해야 할 미적 대상이고, 육당에게 금강산은 신화적 힘이 보존되어 있는 숭고한 대상이다. 춘원에게 금강산은 민족적 상징이 아니고 그냥 심미적 감상의 대상이었다. <금강산유기>의 춘원은 모범적인 근대 시민이고, 금강산에 대해서도 모범적인 관광객이었다. 그러나 육당은 금강산의 자연미를 숭고의 차원으로 고양시키고, 이를 발판삼아 조선 정신이라는 신화적 실체에 접근하였다. 태자성 바로 곁에 있는 명경대(明鏡臺)에서도 두 사람은 전혀 반대였다. 죽은 사람들이 명부에 들었을 때 삼생에서의 죄과를 낱낱이 드러낸다는 염라전의 명경설화와 연관되어 있는 곳이다.

 

노산이 다녀온 금강산 태자성과 비로봉

다음은 이곳을 지나던 노산이 태자성에 대하여 쓴 시조 ‘태자궁지(太子宮址)’의 전문이다.

 

마의(麻衣) 초식(草食)하되 님이시니 님인 것이

님이 계오시니 막이라도 궁(宮)인 것이

높으신 그 뜻을 받들어 섬기올까 하노라

 

풀이 절로 나고 나무가 절로 썩고

나고 썩고를 천년(千年)이 넘었으니

유신(遺臣)의 뿌린 눈물이야 얼마인 줄 알리오

 

그 모른 외인(外人)들은 경(景)만 보고 지나가네

뜻 품은 후손(後孫)이라도 해만 지면 가는 것을

대대(代代)로 예 사는 새들만 지켜 앉아 우나니

 

오늘은 비 뿌리고 내일은 바람 불어

계오신 대궐은 터 쫓아 모를노다

석양(夕陽)에 창태(蒼苔)를 헤치니 눈물 앞서 흐르네

 

궁(宮) 터를 홀로 찾아 초석(礎石)을 부드안고

옛날을 울어내어 오늘을 조상(弔喪)할 제

뒷시내 흐르는 여울도 같이 울어 예더라

 

‘풍악기유’에서 육당은 이 설화들이 지니고 있는 숭고함을 천착하느라 이곳을 떠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춘원은 사바 세계와는 달리 염왕(閻王)은 죄인을 심문하거나 애써 수사할 필요가 없으니 편리해서 좋겠다는 식으로 표현하였다. 현실적이며 실용적인 태도였다. 그러나 금강산에 들어온 지 8일 만에 비로봉 정상에 오른 춘원은 운무가 걷히면서 금강산의 연봉들의 모습이 하나씩 드러나고, 동해 바다까지 손에 잡힐 듯 다가서는 놀랍고도 장엄한 장면을 목격하였다. 형언할 수 없는 벅찬 감격과 황홀을 그는 ‘천지창조의 기쁨에 참여했다’고 표현했다. 그런 벅찬 감흥의 순간마다 터져 나오는 것이 9편의 시조였다. 노산도 비로봉에서 여러 수의 시조를 지었다. 다음은 ‘비로봉(毘盧峰) 기일(其一)’의 전문이다.

 

금(金)길, 은(銀)길 밟고 올라 상청궁(上淸宮)에 높이 서니

일성(日星) 운한(雲漢)과 벗하는 오늘이라

천풍(天風)은 무수(舞袖)를 날리며 몸 가으로 돌더라

 

백운대(白雲臺) 여기로다 청벽(靑壁)을 만지노라

팔황(八荒) 운물(雲物)이 발 아래 다 깔리니

내 몸이 어디 섰는지 분별(分別) 못해하노라

 

춘원의 <금강산유기(金剛山遊記)>는 1922년 잡지 <신생활> 3월호부터 8월호까지 연재하였다가 1924년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뒤이어 육당이 1924년부터 집필한 첫 번째 금강산 기행문은 <시대일보>에 ‘풍악기유(楓岳記遊)’라는 제목으로 연재하였는데 처음에는 행장을 꾸리고, 경원선 열차를 타고 철원을 지나 평강역에 내리는 등의 일상적인 기행의 과정을 평범하게 적었다. 그러다가 내금강의 초입인 영원동 골짜기에서 고대사의 흔적들을 온몸으로 감수하면서부터 그 희열에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결국 금강산 기행문이면서도 금강산 안쪽으로는 들어가 보지도 못한 채 내금강의 첫 번째 골짜기인 영원동과 시왕백천동에서 그쳐버려서 결과적으로 내금강 입구에서 멈춰버린 기형적인 형태가 되고 말았다. 그의 말을 빌리면 ‘美의 제국(帝國)’에 압도당하였던 것이다. ‘풍악기유’에 의하면 육당이 금강산 기행을 나서면서 가지고 간 것은 ‘<여지승람(輿地勝覽)>과 <와유록(臥遊錄)> 등 수권서(數卷書)와 내의 한 벌’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라는 지리사전과 <와유록>에 수록된 산수 기행문들은 금강산에 관한 수백 년의 역사가 축장되어 있는 최고의 가이드북이었다. 육당의 금강산 기행은 ‘한편쪽 기둥 받침이 수백척(數百尺) 내리박혔음을 보고 옳지 저것이 구리기둥으로 버티었다는 보덕굴(普德窟)이로군 하는 생각이 납니다’와 같은 대목에서 보이듯 일차적으로는 미리 읽어보고, 마음속에 담아 둔 생각과 실제를 맞추어 보는 것으로 기행을 시작했던 것이다. 춘원도 마찬가지였다. 미술평론가 유홍준은 겸재 정선의 금강산 그림사진을 가져가서 비교해보기도 했다. 육당과 춘원은 생각과 실제를 비교했고, 유홍준은 그림과 실제를 비교해 보았다.

‘풍악기유’는 전체 27장으로 구성된 장편 기행문인데 제목을 보면 ‘인류의 미적 재산’, ‘운투무시(雲妬霧猜)의 반일(半日)’, ‘호장(豪壯)한 고원미(高原味)’, ‘대자연의 교향악’, ‘준령유곡(峻嶺幽谷)의 백여리’ 등 조선의 신비를 탐승한 기행문이다. 이를 보완하여 1927년에 <금강예찬>이라는 제목으로 단행본으로 발간하였다. <금강예찬>은 대중적인 관광안내서에 가깝다. 그는 <금강예찬>을 1924년에 시작하여 만 3년 동안에 걸쳐 썼다. <금강예찬>의 첫 장에서부터 금강산을 ‘조선정신의 표식(標識)’이라고 일컬으면서 금강산은 결코 구경의 대상이 아니라 참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1925년에 쓴 기행문 ‘심춘순례’ 역시 <시대일보>에 연재한 후 1926년에 단행본을 냈고, 1926년 ‘백두산근참기’ 역시 <동아일보>에 연재한 후, 1927년에 단행본으로 냈다.

일제가 1931년에 완전 개통한 금강산철도 교량이 현재 끊겨져 있다 /전점석
일제가 1931년에 완전 개통한 금강산철도 교량이 현재 끊겨져 있다 /전점석

노산의 방랑심으로 금강산에서 시작된 국토순례

한반도에서 불교가 전성기를 이루던 시절, 금강산에는 108개의 사찰과 수많은 암자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도량이었다. 요즘도 금강산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도 어릴 때는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봉’을 불렀고 전래동화 ‘나무꾼과 선녀’를 읽으면서 자랐다. 청소년이 되어서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을 사용하였고, ‘강원도 금강산 1만 2천봉 8만 9암자’로 시작하는 ‘강원도 아리랑’과 ‘그리운 금강산’이라는 가곡을 부르기도 했다.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린 소설가 정비석의 금강산 기행수필 ‘산정무한(山情無限)’을 읽기도 했다. 그러나 가보기는 딱 한 번뿐이다.

노산의 <나의 인생관>에 의하면 ‘가난한 선비요 매달린 직업인이면서도 금강산 경치가 하도 좋아 다섯 번을 들어갔던 것으로써 내 국토순례는 시작되었다고 하였다.’고 하면서 평생 동안 이어지는 자신의 국토순례는 1930년, 금강산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1975년에 출판한 <노산 산행기>에서도 자신이 국내에서 큰 산을 밟아 본 것은 1930년에 금강산을 답파한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또 다른 책에서는 자신의 방랑심이 일본에서 귀국하여 국토순례로 전환되었다고 적고 있다. 세 번은 공적으로 금강산을 방문하였고, 한번은 음악가 안기영과 함께, 또 한번은 백낙준과 함께 다녀왔다. 1934년 금강산 비로봉에서 안기영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 있다.

노산은 금강산을 다녀와서 108수의 금강시를 써서 발표함으로써 당시 놀라운 반향을 불러일으켜 자신의 지명도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108은 금강산 사찰수이다. 노산은 1930년 7월 20일, 금강산에 가서 꼬박 여드레 동안 근참(觀參)하고 시조 41편, 119수를 썼다. 시인 이근배는 이 시조를 보고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를 떠올렸다고 한다. 1932년 4월에는 금강시를 위주로 지금까지 지은 시조를 한데 묶어 <노산시조집>을 발간하였다. 겸재의 금강산 그림과 노산의 금강산 시조를 함께 감상하는 것은 분단시대의 아픔과 함께 눈앞에 정말 멋진 광경이 펼쳐질 것 같다. 다음 시는 노산의 멋진 작품인 ‘금강귀로’이다.

 

금강이 무엇이뇨 돌이요 물 일러라

돌이요 물 일러니 안개요 구름 일러라

안개요 구름 일러니 있고 없고 하더라

 

금강이 어디더뇨 동해의 가일러라

갈적엔 거닐러니 올제는 가슴에 있네

라라라 이대로 지녀 함께 늙고자 하노라

 

<금강예찬>은 천하의 명작, <동행산수기>는 기품 있는 글

금강산에 관한 아름다운 글은 이외에도 많다. 정인보는 1933년 8월 초부터 두 달 동안 금강산 일대를 여행하고 조선일보 1933년 8월 3일~9월 7일자에 ‘관동해산록(關東海山錄)’을 연재하였다. 1934년에 박한영은 스승인 난곡 이건방, 이희종, 성완혁 등과 같이 다녀와서 단발령, 만폭동, 표훈사, 마의태자 릉, 신계사, 해금강 등에 관한 금강산기행시를 썼다. 정지용은 박용철과 함께 금강산을 다녀와서 조선일보 1937년 2월 10일~17일에 ‘내금강 소묘(內金剛 素描)’ 1, 2, ‘수수어(愁誰語)’를 게재하였다. 금강산을 두 번 다녀왔는데 ‘수수어’에서 ‘꽃같이 스러진다 해도 아프지 않을 만’하게 산과 하나가 되었으며 ‘내 골수에 비치어 사라질 수 없는’ 금강산이 되었다고 하였다. 만해 한용운도 경원선을 타고 금강산을 다녀와서 ‘만 이천 봉! 무양(無恙)하냐, 금강산아, 너는 너의 님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모르지’라고 노래하였다. 조선 말기에 태어나 팔도를 방랑하며 수많은 시와 일화를 남긴 난고(蘭皐) 김병연(1807~1864년)), 속칭 김삿갓도 세도정치가 극성을 부리던 시절을 살면서 유독 자주 들렸던 곳이 금강산이라고 한다.

미술평론가 유홍준은 허균, 이황, 이이, 송시열, 이상수, 김창협, 박지원, 김정희, 김삿갓, 최남선, 이광수, 문일평, 이은상, 정비석, 이만부(1664~1732년)의 금강산기 등 수많은 답사기 중에서 특히 어당 이상수의 <동행산수기(東行山水記)>와 육당 최남선의 <금강예찬>은 기행문학의 고전이고, 백미라 할 천하의 명작이라고 하였다. 둘 중에서도 육당의 <금강예찬>이 최고의 명문이라고 극찬하였다. 육당이 <금강예찬>을 쓰던 시절은 사실상 그의 학문과 문학이 절정에 달한 최고의 경지였다고 한다. 심지어 유홍준은 친일한 ‘육당은 육당이고, 금강예찬은 금강예찬이다’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고 한다. 육당은 자신이 창간한 <시대일보> 사장직을 사임한 직후인 1924년 가을에는 금강산에 올랐고 1925년 봄에는 백암산과 변산, 무등산, 조계산 등을 거쳐 지리산에 올랐다. 이상수의 <동행산수기>는 가장 자세하기도 하고, 경험한 바를 섬세하고 기품 있게 표현한 글로 평가받고 있다.

미술평론가 유홍준은 금강산을 다섯 번 다녀왔다. 1998년부터 2년간 현대금강호를 타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모두 보고 왔다. 그는 ‘글로서 다할 수 없고 그림으로도 얻을 수 없다’(서부진 화부득, 書不盡 畵不得)는 옛말을 생각하며 걱정을 하였으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5권-다시 금강을 예찬하다>를 해박한 지식과 멋진 문장으로 출판하였다.

 

 

참고 자료

이종수, <옛 그림 읽는 법>, 도서출판 유유(2017년), 36쪽

이종수, <옛 그림 읽는 법>, 도서출판 유유(2017년), 65쪽

이종수, <옛 그림 읽는 법>, 도서출판 유유(2017년), 62쪽

안대회, <선비답게 산다는 것>, 푸른역사(2007년), 137쪽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5. 다시 금강을 예찬하다>, ㈜창비(2011년), 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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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 정창현, <제국의 억압과 저항의 사회사>, 민속원(2011년), 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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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순, <서사, 연대성 그리고 문학교육>, 푸른사상(2013년), 3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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