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당 입구 /이종현 기자
고려당 입구 /이종현 기자

마산 창동은 ‘경남의 명동’이라 불릴 정도의 번화가였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급격하게 쇠락했고, 지금은 도시재생 사업의 모델로 여러 사업의 지원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창동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가게가 있다. 군산의 이성당이나 대전의 성심당 같은 지역 대표 빵집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빵집, 고려당이다. 1959년 개업한 고려당은 60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현재 고려당을 운영하고 있는 건 창업주나 그 가족이 아니라 이곳 제빵사 출신 강성욱(49) 대표. 고려당 60년의 역사, 그리고 강 대표가 고려당을 운영하게 된 배경과 청사진 등을 묻기 위해 창동으로 향했다.

 

“여기가 아직도 있네.”

약속보다 조금 이른 시각 고려당을 찾았다가 들은 말이다. 말한 이는 옆 테이블의 흰머리가 지긋한 노신사. 조심스레 얘기를 들어 보니, 고향 친구를 만나러 오신 분이었다. 친구와 창동이 번화가가 되기 전의 옛 모습을 묘사하는 모습은 번화가였던 창동을 그리워하는 것과 결이 다른 향수를 느낄 수 있었다.

강성욱 대표가 오기 전 가게 전경을 담아볼까 했지만, 계속해서 밀려오는 인파 탓에 사진 찍기도 조심스러웠다. 오후 2시쯤이었지만 점심때 얼마나 많은 손님이 찾았는지, 빵이 진열된 곳에도 듬성듬성 빈자리가 보였다. 계속해서 새 빵이 나오는 데도 그렇다.

그렇게 가게를 구경하던 차에 도착한 강 대표. 고려당의 역사 탓일까. 자연히 나이 많은 장인의 모습을 연상했던 것과 달리 상당히 젊은 이였다. 아직 현장에서 밀가루를 반죽하고 연구하는, 젊은 기술자의 얼굴. 가벼운 잡담을 하다 소개를 부탁하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강성욱이라고 합니다. 마산이 고향입니다. 석전동에 살았죠. 빵 공부를 하러 서울로 갔던 기간을 빼면, 쭉 마산에서 생활한 마산 토박이입니다.”

원래 빵을 좋아하던 그였지만, 처음부터 빵을 공부한 건 아니다.

“원래는 평범한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IMF 이후 회사가 어려워져 그만뒀죠. 이후 개인 사업을 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어떤 아이템이 좋을까 고민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빵집을 운영하는 분을 소개받았어요.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소개받아서 곧바로 서울로 수련하러 갔죠. 서울에 있는 코른베르그입니다.”

빵을 수련하는 기간은 고단했다. 설거지를 시작으로 하는, 전통 도제제도를 따랐다.

“요리점에서는 칼이나 불 쓰기 전까지 설거지만 몇 년 한다, 그러잖아요? 제과제빵에도 그런 게 있었어요. 몇 개월은 설거지만 했죠. 그러다가 반죽, 이후에 성형. 이런 단계를 거쳤어요. 그런데 요즘은 안 그럽니다. 노동환경이 바뀐 것도 있지만, 업무를 세분화해 효율적으로 바뀐 측면이 있어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그가 마산으로 돌아온 것은 모친 때문이다.

“어머니가 마산에 계셨어요. 어머니를 모시려면 결국 제가 마산에 있어야겠다고 생각해서 마산으로 돌아왔죠. 그러다 일하게 된 게 고려당이었어요. 고려당의 제빵사였죠.”

 

고려당 강성욱 대표 /이종현 기자
고려당 강성욱 대표 /이종현 기자

강성욱의 고려당

강 대표가 고려당을 운영하게 된 배경도 궁금했다. 어쩌다 타인인 그가 고려당의 사장이 됐을까.

“고려당의 창업주는 김순연 할머니입니다. 거리에서 풀빵을 팔던 할머니가 1959년 창업한 게 고려당의 시작이죠. 할머니께서 나이가 있으시다 보니, 계속 운영하긴 어려우셨을 거예요. 제빵이 생각보다 고된 일이거든요. 자연히 자녀들께서 운영하게 되셨는데. 시기가 안 좋았어요. 2000년대 들어서 창동이 확 무너졌거든요. 그 시기를 못 버텨서, 결국 가게를 내놓을 상황이 됐습니다. 당시 신발가게로 내놓는다든지 하는 얘기가 나왔었는데. 고려당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남다르잖아요. 그냐 없어지는 게 아쉬워서, ‘제가 해보겠습니다’ 한 게 2009년입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영업이 어려워 폐업하는 가게를 재단장한다는 것. 또 그 가게가 기대치가 높은 유명 가게라는 것 등. 강 대표는 영업 초기를 떠올리며 “처음부터 잘 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가게를 인수하고 첫날 매출이 13만 원이었어요. 순수익이 아니라 매출이요. 턱없이 부족했죠. 그래서 일단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바꾸기 시작했어요. 즉석빵 위주로 하자, 좋은 재료를 쓰자, 친절하게 대하자 등. 운이 좋았습니다. 노력한 게 매출로 돌아왔거든요. 점점 더 나아져서, 이제는 손해 보고 장사하는 일은 없습니다.”

즉석빵 위주로 하다 보니 손이 더 간다. 계량하는 사람, 반죽하는 사람, 반죽 분할하는 사람, 성형하는 사람, 굽는 사람 등. 거기에 매장 손님 응대까지. 20명 넘는 인원이 일하고 있다.

“아침 6시 30분에서 7시 정도에 출근해요. 발효 빵은 작업 시작해서 완성까지 대략 4시간 정도 걸립니다. 그래서 고려당의 갓 만든 빵은 11시쯤에 나와요. 발효가 없는 빵은 9시 정도고요.”

요식업계에서는 ‘대표 메뉴’ 따위의 개념이 있다. 주요 상품과 브랜드를 동일시하는 거다. 대전 성심당의 튀김소보로, 부추빵이나 군산 이성당의 단팥빵, 야채빵 같은. 고려당을 대표하는 빵이 있을까.

“의도적인 건 아니지만, 가게를 대표하는 빵은 없어요. 빠다빵이나 센베이, 꿀빵 같은 건 옛날부터 해오던 메뉴긴 한데. 이 빵들이 가게 주력상품이라고 할순 없거든요. 저희 고려당은 메뉴가 참 다양해요. 지금 진열대에 있는 빵만 해도 180종 이상이죠. 메뉴 개발도 수시로 하고. 잘 안 나가는 빵이 있으면 매대에서 빼고. 언젠가는 가게를 대표할 수 있는 그런 메뉴가 생겼으면 좋겠네요.”

수시로 메뉴가 바뀌다 보니 새로운 메뉴를 구상하는 것도 어려운 일일 듯하다. 고려당의 신메뉴는 어떻게 나올까.

“가장 많이 참고하는 건 책입니다. 두 번째는 세미나고요. 재료회사에서 새 재료가 출시되면, 기술자들이 모여서 세미나를 하곤 합니다. 거기서 정보를 공유하고, 이걸 토대로 고려당에 어울리게 변형해서 내고 있습니다.”

가게는 생각보다 넓었다. 아니, 길었다. 진열대 뒤로 있는 카운터. 그리고 카운터 뒤로 긴 주방이 이어졌다. 고려당이 쭉 이 자리에 있었다고 하는데, 처음부터 이런 모습이었을까.

“아닙니다. 처음은 지금의 반 정도 크기였습니다. 지금 있는 건 뒤의 집까지 사서 확장공사를 한 거예요. 그리고 오래된 가게다 보니 리모델링도 2번 했습니다.”

고려당 매장 내부 모습 /이종현 기자
고려당 매장 내부 모습 /이종현 기자

“빵쟁이라는 표현이 좋아요”

2010년 방영된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는 대한민국에서 전국 시청률 50%를 돌파한 마지막 드라마다. 그야말로 빵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제빵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도 이때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제빵사라는 직업에 대해 조명하는 콘텐츠는 적다. 대중에게 익숙한 요리사의 영어 표현 ‘셰프’, 커피를 내리는 사람인 ‘바리스타’, 과자 전문가인 ‘파티시에’ 등에 비해 제빵사를 지칭하는 영어 표현 ‘베이커(Baker)’나 프랑스어 표현 ‘블랑제(Boulanger)’도 조금 생소하다. 왜 제빵사를 다루는 콘텐츠는 적을까, 또 조금은 딱딱한 제빵사라는 표현 말고 다른 표현은 없을까, 하는 의문도 있다. 강 대표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아무래도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TV에 유명 셰프들이 나와 경연하는 프로그램이 참 많죠. 1시간, 2시간 정도 시간을 주는 프로그램도 있고. 15분 내에 요리를 내야 하는 프로그램도 있는데. 빵은 이게 안 되요. 그러다 보니 방송 콘텐츠로 다루기 어렵죠. 그리고 베이커나 블랑제 같은 표현은 저도 안 써요.(웃음) 저는 ‘빵쟁이’라는 표현을 좋아해요. 단어 뒤에 쟁이를 붙이면, 정감 가고 좋아 보이거든요. 저를 소개할 때도 빵쟁이라고 합니다.”

빵 사랑 때문일까. 그는 아직도 기능장 자격증을 취득하지 않았다. 기능사, 기능장, 명장까지 이어지는 제빵 자격증 중에서는 시작 단계. 합격률 15% 수준의 높은 난이도 때문일지, 혹 다른 이유가 있을지.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7년 이상 지나면 기능장 시험 요건이 충족돼요. 저는 요건은 충족됐는데 시험은 안 치르고 있습니다. 시험이 어렵다거나 하는 건 둘째 문제고. 기능장이 되면 기능장협회 같은 단체에 소속돼서 이런저런 활동을 하게 되는데. 이게 부담스러워요. 저는 그저 즐겁게 빵 만들고, 팔고, 먹고 싶은 일개 빵쟁이인데. 아직까지는 외부로 나가기보단 현장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빵을 만들 때 고집하는 게 있는지도 물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고려당에서 파는 빵들은 대부분 즉석빵이에요. 그날 만든 빵을 그날 파는 형태죠. 앞으로도 즉석빵을 고집할 생각입니다. 즉석빵이라는 게 강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해요. 강점으로는, 아무래도 건강한 맛이라는 걸 내세울 수 있을 거 같아요. 자세히 얘기하려면 효모, 발효 이런 걸 얘기해야 하는데. 쉽게 표현하자면. 먹고 탈 날 일 적은 빵이라는 거죠. 방부제나 발색제 같은 걸 안 쓰고, 좋은 재료만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왜 단점이기도 하냐면. 방부제가 안 들어가니까, 당연히 방부제 들어간 빵보다 빨리 상해요. 종종 ‘빵을 사갔는데 상했다’는 항의가 들어옵니다. 여쭤보니 그냥 거실에 3일 정도 뒀다가 드시려 했다고 하더라고요. 방부제가 안 들어간 빵은 그렇게 오랫동안 두시면 안 되는데…. 다른 빵은 바깥에 오래 둬도 괜찮았으니, 하는 마음에 그러시는 거겠지만. 이건 단점인 거 같습니다.”

고려당 매장의 빵 /이종현 기자
고려당 매장의 빵 /이종현 기자

창동, 창동, 창동

창동과 고려당.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인 듯하다. 고려당을 얘기할 때 창동이 빠질 수 없다. 마산 출신인 강 대표는 예전의 창동을 어떻게 기억할까.

“저도 어린 시절을 창동에서 보냈습니다. 창동의 전성기를 보고 자랐죠. 창동에 오면 길바닥이 안 보였어요. 보이는 건 온통 사람밖에 안 보일 정도였습니다. 이런 과거를 기억해서일까요. 지금처럼 한산한 창동거리가 안타까워요.”

예전에 비해 찾는 사람이 줄었다곤 하나 여전히 옛 향수를 떠올리며 창동을, 고려당을 찾는 이들이 많다. 오랜만에 지인을 만나러 창동을 찾아 옛이야기를 하는 노신사, 어린 딸에게 옛 창동거리를 설명하는 어머니. 인터뷰 내내 저마다의 이야깃거리를 품고 고려당을 찾는 이들로 붐볐다.

“옛날 기억 때문일까요. 아무래도 연령대가 높은 분들이 많이 찾으셔요. 주로 40~60대 정도죠. 평일에는 주부들이 많이 찾으시고. 주말에는 가족이 함께 오곤 하십니다.”

고려당이 장소를 옮기지 않는 이유. 쭉 그 자리에서 운영해왔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1959년 마산에서 고려당이 생기기 전, 1945년 서울 압구정에 고려당이라는 같은 이름의 가게가 있었다. 상표권 따위의 개념도 없었고, 지금처럼 통신망이 갖춰진 시기도 아니었으니 두 가게의 이름이 겹친 건 우연이다. 그럼에도 서울 고려당의 창업이 빨랐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이 문제를 한참 뒤에야 알았습니다. 2015년 재판까지 갔고요. 그쪽에서 저희 간판을 바꿨으면 좋겠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는 1959년부터 이 자리에서 이 이름으로 운영해왔다. 갑작스레 이름을 바꾸기는 어렵다’고 했고. 결국 잘 마무리되서 고려당이라는 이름을 계속 쓸 수 있게 됐어요. 그런데 만약 자리를 옮기게 된다면, 서울 고려당에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게 됩니다. 자리를 옮기게 된다면, 로열티를 지불하며 고려당이라는 이름을 쓰거나. 아니면 이름을 바꾸거나 할 텐데. 옮기고픈 마음이 없어서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은 없습니다.”

고려당처럼 오랫동안 창동을 지키는 가게가 있는가 하면, 축소된 상권 탓에 폐업한 곳도 많다. 거리를 둘러보면 빈집이 참 많다.

“창동거리에는 여러 문제가 산적해 있습니다. 그중 가장 심각한 건 부동산 가격이에요. 매매가격이나 임대료요. 고려당도 월세를 내고 있는 상황인데. 2009년 제가 들어올 때부터 지금까지, 3배 올랐습니다. 차라리 무리해서라도 건물을 사고 싶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습니다. 그래도 이 자리가 가지고 있는 의미가 남다르다 보니. 부담스럽더라도 지키려고 하는데. 이런 식으로 계속 상승하면….”

점점 높아지는 임대료. 인건비. 재료값. 가게를 경영하는 입장에서 부담이 크다고 토로한다. 그리고 창동거리에 관련한 행정적 문제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장사하는 입장에서, 시에서 창동을 생각해주는 건 정말 고마워요. 그런데 너무 아쉬운 부분이 많습니다. 창동거리를 살리겠다고 투자한 돈이 정말 어마어마하거든요. 이런 걸 잘 모르시는 일반인이라면 놀라 자빠질 금액일 거예요. 그렇게 투자한 것에 비해 성과가 적습니다. 돈이 부족해서일까요? 아니면 돈을 쓰더라도 살리지 못할 만큼 경쟁력을 잃은 걸까요? 그렇게 생각지는 않아요. 정비하기 전 낙후된 창동을 찾는 분들도 쭉 있으셨거든요. 그렇다면 뭐가 문젤까요? 저는 도시재생을 주도하는 사람, 기관이 자꾸 바뀌는 탓이라 생각해요. 한 기관이 도맡아서. 전체적인 조감도를 그리고. 또 그걸 실현하기 위해 논의하고. 차근차근 해야 한다고 봐요. 예술촌을 살려서 이 거리를 부흥시키겠다면. 시보다는 문화예술 전문 식견을 가진 기관이 여러 목소릴 들으며 사업을 이끌어나가는 거죠. 그런데 앞 사람이 바닥을 건들고. 또 다음 사람이 바닥을 건들고. 또 다음 사람이 바닥을… 끝이 없죠.”

인터뷰를 한 건 6월 7일이었다. 그런데 6월 12일, 창원시는 ‘불종로 차도 블록 포장 구간 정비계획 주민설명회’를 열었다. 불종로 바닥에 깔린 블록 대신 아스팔트 포장을 한다는 거다. 아이러니하게도 또다시 바닥이다.

행정에 대한 불만을 표시했지만, 그 엄격함은 스스로에게도 향했다.

“들인 노력에 비해 성과가 안 나와서 그렇지, 시에서 창동을 어떻게 살려보려 노력하는 건 참 좋아요. 그런데 거리가 살아나려면, 행정에서 예산 써서 잘 꾸민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저 같은, 이 거리에서 영업하는 상인들도 노력해야죠. 사람들이 창동을 찾을 때 제일 불편해하는 게 주차공간입니다. 요즘은 다들 차를 타고 다니잖아요. 주차 공간 없는 곳은 안 가요. 그런데 창동은 주차공간이 너무 협소합니다. 그래서 창동에 공용 주차장도 지었죠. 그런데 주차장이 생기니까 상인들이 다 거기 주차하는 거예요. 상인들이 주차해 버리니, 창동을 찾는 사람들이 주차할 곳은 여전히 없어요. 저는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포함해 고려당 직원들은 모두 멀리 차를 대고 걸어서 와요. 창동거리, 걷기 좋은 곳이잖아요. 손님을 맞이하는 사람으로서. 자기 편의보다 손님을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려당 강성욱 대표 /이종현 기자
고려당 강성욱 대표 /이종현 기자

손님들 사랑에 보답하는 빵 만들 것

강성욱 대표가 고려당을 맡은 지 10년 됐다. 60년 된 고려당과 10년 된 강 대표. 그 속을 살펴보니 썩 어울리는 조합이다. 그가 그리는 미래의 자신, 고려당은 어떤 모습일까.

“10년으론 이룰 수 없는 꿈이겠지만. 언젠가는 대전 성심당처럼 해보고 싶어요. 더 많은 사람이 고려당 빵을 맛봤으면 합니다. 또 지금 저랑 7년째 새벽 6시 30분에 나와서, 밤 12시에 퇴근하고 하는. 이런 식구들이 많아요. 만약 고려당이 좀 더 잘 돼서 확장하면. 이런 친구들한테 2호점, 3호점을 맡기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게 참 만만치 않아요. 실제로 어느 대형마트에 빈자리가 생겨서, 작게나마 2호점을 내보려고 했었습니다. 저나 그 마트에서는 얘기가 잘 됐는데. 그쪽 상권에서 가게 하시는 분들이 엄청 반대해서요. 금전적인 문제도 있지만, 이런 것 때문에 외연확장이 조심스럽습니다.”

한참 빵과 위생을 더 철저히 관리하겠다고 한참 말을 덧붙였다. 큰 줄기의 이야기를 추리다 보니 그의 빵에 대한 열정이 잘 전달되지 않았을까 걱정이다.

60년 된 빵집과 10년 된 사장. 신구의 조화.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노력하는 강 대표를 보면, 고려당은 20년 뒤도 거뜬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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