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추적 이은상 20

신아출판사에서 발간한 최남선의 심춘순례 책표지 /전점석
신아출판사에서 발간한 최남선의 심춘순례 책표지 /전점석

조선어사전편찬위원을 그만두고 국민문학파의 시조부흥운동에 참여

김봉천은 자신의 저서인 <노산 이은상 선생>에서 노산이 계명구락부 조선어사전 편찬위원을 그만둔 1929년 10월 이후 새로운 변신을 꾀하는 시기라고 한다. 사전편찬을 하기 위해 사무실에서 카드를 작성하고 어휘를 모으는 것보다 그의 활달하고 다재다능한 소질은 문인들과 함께 시조부흥운동과 가요협회 활동 그리고 외국작가 소개, 국토사랑이 더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특히 직접 삼천리 금수강산을 밟아 보겠다는 국토 순례 대장정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하였다. 스승 이윤재의 권유로 시작한 조선어사전 편찬위원을 그만두고 국토대장정으로 변신한 것은 노산의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그런데 이 전환점은 이미 조선어사전 편찬 일을 그만두기 전부터 참여한 국민문학운동의 영향이었다. 조선어사전 편찬 일을 그만둔 1929년엔 월간 <新生>지 편집장을 하였고 1931년부터는 이화여전 문과 교수를 1년간 하였다.

3.1운동 이후에 민중들의 급속한 성장과 사회주의 사상의 전개 그리고 민족개량주의의 대두는 소부르주아 지식인들로 하여금 현실을 새롭게 보고 그에 대한 대응방향을 모색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KAPF가 결성되는 1925년 8월에 이르러 두 가지로 정리되었다. 식민지 현실과 민중의 고통을 자각하고 표현하는 문학인들은 카프를 중심으로 결집하였고 민요조 서정시운동, 시조부흥운동을 전개하는 민족주의계열의 문학인들은 국민문학파를 형성하였다. 

국민문학파는 노산이 일본 유학에서 귀국하기 전인 1925년의 계급문학 시비론 이후 프로문학의 계급주의에 대항하여 시작되었다. 국민문학이라는 용어는 최남선의 ‘조선국민문학으로의 시조’라는 글에서 비롯되었다. 민족혼, 조선심의 회복을 내세우는 국민문학파는 일제의 침탈에 의해 생존이 위협받고, 카프의 결성으로 인해 문단적 지위를 위협받고 있던 소부르주아 문인들이 결집할 수 있는 빌미가 되었다. 서구시의 여러 가지 사조를 무분별하게 도입하고 그것을 실험하는데 몰두하고 있던 대부분의 문인들은 쉽게 국민문학파가 표방한 민족주의 기치 아래 결집하였다. 특히 최남선, 이광수 등이 국민문학파의 중심 인물로 등장하여 시조부흥운동에 앞장 서고, 김억 등이 민요조 서정시운동을 주도하였다.

최남선이 앞장 선 시조부흥운동은 그의 시조집 <백팔번뇌>의 발간과 함께 시적 가능성을 확신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도달하였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찾아다니는 국토 순례에서 느낀 감상을 적은 <백팔번뇌>의 시조들은 시적 대상으로서의 ‘님’을 노래하였다. 1920년대 ‘단군론’을 쓰고 국토를 순례하던 최남선은 뜨거운 민족주의적 열정을 내뿜고 있었다. 해방 후에 이은상이 종교로서의 조국을 당신이라고 부르면서 다녔던 국토순례와 <피어린 육백리>, <기원>과 최남선의 <백팔번뇌>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국민문학운동으로 전개된 역사소설과 국토순례기

국민문학운동은 시조부흥 뿐만 아니라 국토순례와 예찬, 역사소설의 창작 등 여러 방면에서 시도되었다. 이에 따라 최남선의 ‘심춘순례(尋春巡禮)’, ‘백두산 근참기’, 안재홍의 ‘백두산등척기’, 호암 문일평의 ‘동해유기(東海遊記)’, ‘근교산악사화(近郊山岳史話)’ 등의 유적지 탐방문이 나오고 조선정신의 고취에 초점을 맞춘 역사소설이 씌어졌다. 이광수의 ‘마의태자’, ‘이순신’, ‘단종애사’, 김동인의 ‘젊은 그들’, ‘운현궁의 봄’, 박종화의 ‘금삼의 피’, ‘대춘부’ 등이다. 식민지시대의 대표적인 역사소설은 대원군과 민비를 소재로 한 김동인의 <젊은 그들>과 <운현궁의 봄>이다. <젊은 그들>은 1930년부터 1931년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한 장편인데 역사소설이라기보다 통속소설이었다. <운현궁의 봄>은 1933년에 조선일보에 발표하였다. 이 두 소설에서 대원군은 영웅이며 민비는 문란, 패악하여 나라를 망하게 한 장본인으로 묘사하였다.

1905년 이후에도 개화자강운동의 일환으로 역사전기소설이 창작되었다. 대표적인 작품은 <을지문덕>(신채호, 1908년), <강감찬전>(우기선, 1908년), <이순신전>(신채호, 1908년), <최도통전>(신채호, 1909년), <천개소문전>(박은식, 1911년) 등인데 일제에 의해 판금조치를 당하였다. 이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1920년대 후반부터 많이 씌여진 역사소설의 성격은 많이 달라졌다. 이광수는 최초의 근대적 역사소설로 평가받는 ‘마의태자’를 1927년부터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이 소설은 신라 망국의 울분보다는 궁중생활의 추악한 애욕 다툼에 치중하여 통속적인 흥미만을 만족시키는 데 그쳤다. 이후에 씌여지는 역사소설들이 궁중야사나 여인애사류 등의 통속 소설에 머무르게 되는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어서 춘원은 ‘단종애사’를 1929년 동아일보에 연재하여 큰 인기를 모았는데 조선일보에는 홍명희의 임꺽정이 연재되기 시작하여 두 작품은 역사의식과 서술방법 면에서 뚜렷한 대조를 보여주었다. 노산이 동아일보에 입사했을 때였다. 단종애사에 이어서 1932년에 쓴 ‘이순신’은 충신 이순신과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비열함이 극도의 대조를 이루고 있다. 민중을 우매한 대중으로 경시하는 작품 ‘흙’을 쓰면서 자신의 민족개조론이 갖고 있는 민족개량주의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광수는 자신이 소설을 쓰면서 항상 조선의 모습을 염두에 두고, 시대상을 여실히 묘사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조선과 조선민족을 위하는 봉사의무의 이행’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의 민족문학론은 결국 문화적 준비론을 가장한 자기 체념적 이론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가 강조했던 조선주의와 민족주의는 일제의 식민통치를 인정하는 대가로 이른바 비정치적인 민족보존 즉 문화, 생활, 관습 등의 보존만을 얻어내자는 것이었다. 민족문제에 우회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역사소설 창작은 민족개량주의자들의 구미에 맞았다. 특히 춘원의 소설은 공공연히 민족개량주의 노선의 타당성을 역사적으로 뒷받침하고, 민족운동의 급진화 경향에 제동을 걸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 민족이 가진 열등한 기질 또는 우수한 성품으로 역사와 인물을 해석하는 빈곤한 역사의식을 드러내고 있었다.

국민문학파는 한글에도 많은 관심을 쏟아 한글연구에 힘쓰는 한편 한글날(가갸날)을 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민족주의 성격은 계몽주의, 복고주의, 보수주의, 국수주의적 편향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의 현실에 대해 타협적, 순응적, 현실도피적, 감상적 태도를 취해 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발간한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 책표지 /전점석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발간한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 책표지 /전점석

종교적 순례자인 최남선이 쓴 <심춘순례>와 <백두산 근참기>

최남선은 지리산을 정점으로 백제에 대해 쓴 <심춘순례> 서문의 첫머리에서 ‘조선의 국토는, 산하(山河) 그대로 조선의 역사며, 철학이며, 시며, 정신입니다. 문자 아닌 채 가장 명료하고, 정확하고, 또 재미있는 기록입니다. 조선인의 마음의 그림자와 생활의 자취는 고스란히, 똑똑히 이 국토 위에 박혀 있어, 어떤 풍우라도 마멸(磨滅)시키지 못하는 것이 있음을 나는 믿습니다. 나는 조선 역사의 작은 한 학도요, 조선 정신의 어설픈 한 탐구자(探求者)로, 진실도 남 다른 애모(愛慕), 탄미(歎美)와 한가지 무한한 궁금스러움을 이 산하(山河)대지에 가지는 자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라 잃은 식민지의 지식인인 육당은 자신을 조선역사의 학도요 조선정신의 탐구자라고 하였다. 여행기이면서 동시에 민속학적 보고서인 <심춘순례>는 1925년 봄. 최남선이 석전사(石顚師) 박한영(朴漢泳)과 함께 호남(湖南)일대를 순례하며 쓴 글이다. 본래 지리산 기행문의 전편으로 쓴 글인데 전주에서 시작하여 정읍, 고창, 장성, 광주, 순천, 화순, 구례에 이르기까지 각 지역의 민속과 풍습, 명산대찰에 대한 기록이다. 후편을 따로 쓰겠다고 하였으나 책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박한영(1870~1948년)은 법명은 영호스님인데 자기보다 여섯 살 아래인 만해 한용운과 함께 일본의 조동종과 우리의 불교를 연합하려는 움직임을 저지하기도 했고, 불교개혁을 추진하기도 했으며 1930년대에는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불교전문학교 교장을 지내기도 했다. 당대 최고 수준의 학승으로 명승을 떨쳤던 인물이다. 육당은 <풍악기유(楓嶽記遊)>, <심춘순례(尋春巡禮)> 두 책 모두에서 ‘이 작은 글을 영호당 석전대사께 드리나이다’라고 감사의 뜻을 적어 놓을 정도로 존경하였다.

이 무렵의 많은 사가, 문인들은 명소, 고적에 담긴 겨레의 역사와 정신을 일반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국토 순례를 하였다. 최남선과 이광수가 직간접으로 편집에 간여했던 동아일보는 백두산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1925년 6월 동아일보 무산지국에서 백두산 탐승단을 모집하였으나 남부지방의 수해 때문에 신청자기 탈퇴하는 바람에 중단되었다. 다음해인 1926년 6월 22일 자에 동아일보는 사고를 통해 전조선, 전동양의 역사적 대조명과 조선의식의 비약적 발전을 위해 백운향도(白雲香徒) 최남선과 석고산인(石顧山人) 박한영 두 사람을 백두산 참관대로 7월 중순에 출발한다고 홍보하였다. 이 날짜의 동아일보 1면 사설란에는 ‘백두산의 신비-동방운명의 암시자’라는 최남선의 글이 실려 있으며 이는 이후 사흘 동안 연재되었다. 그 밑으로 4단부터는 역시 최남선의 단군론 50회가 5단 크기로 게재되어 있다. 지면 편집상으로 최남선과 단군, 백두산이 삼위일체가 되어 있는 모양새였다.

최남선 일행은 백두산에 오르기 위해 조선교육회에서 주관하는 백두산과 압록강 유역에 대한 박물 탐사단의 일원이 되어야 했다. 탐사단은 교직자들을 중심으로 60명의 단원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대부분이 일본인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26년 7월 24일 기차로 서울 남대문역을 출발하여 원산선과 함경선을 갈아타고 속후(당시 함경선의 종점)에 도착, 거기에서 다시 자동차를 타고 북청, 풍산, 갑산 등을 거쳐 혜산에 도착했다. 이곳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혜산은 압록강 상류 남안에 자리잡고 있는 국경도시로 뗏목사업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일본인들이 백 가구 정도 들어와 있는데 대개가 요식업자와 매춘업자들이었다. 수시로 독립군들과 마적단들이 국경을 넘나들고 있어서 일본군의 경계가 삼엄했다. 더욱이 혜산에서부터는 자동차길이 없어 백두산 탐사단은 도보로 행군을 하며 야영을 해야 했고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40명의 일본군 호위대가 따라붙었다. 이러한 활동은 민족의식, 민족독립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탐사일 뿐이었다. 백두산 탐사단 58명과 호위대와 치중대 그리고 혜산에서 따라나선 사람들과 짐꾼들을 합해 도합 200여 명의 사람들, 그리고 식량, 군막 등의 장비를 실은 50여 마필이 깃발을 나부끼며 행군을 하였다. 7월 29일부터는 도보로 혜산을 떠나 허항령을 넘어 천리 천평을 지나 무두봉에 도착하여 베이스캠프를 차렸다. 8월 3일 새벽 2시에 기상하였다. 민족사의 발원지라고 생각하는 성스러운 땅의 엄청난 기운 속에서 망국의 유민인 최남선은 피맺힌 속울음을 삭이고 있었다. 장군봉을 향해 올라가는 길에서는 엄청난 비바람을 만났다. 이제 백두산은 못난 자식들을 향해 눈물의 채찍을 든 어머니가 되었다. 최남선은 몸을 가누기 힘든 비바람 속에서 산등성이를 기어오르며 수없이 뉘우치고 용서를 빌었다. 그는 백두산과 천지를 가리켜서 우리 어머니라고 했다. 어머니의 얼굴을 보기 위해 백두산을 찾은 것이다. 빗속에서 백두산정을 향해 오르며 어머니 국토를 향해 애끓는 속죄의 기도를 드렸다. 드디어 아침 7시, 백두산 천지에 이르렀다. 비는 그쳤지만 천지는 안개에 싸여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얼마간의 기다림 끝에 마침내 천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부터 <백두산근참기>는 거칠 것 없는 천지 예찬으로 가득 찼다. 안개 속에서 얼굴을 드러냈다 사라지곤 하는 천지의 신비로운 모습은 창세의 장면에 대한 상상과 겹쳐지고 뒤이어 동서고금의 창세 신화들이 모두 등장하였다. 왔던 길을 되돌아서 8월 7일 혜산으로 돌아왔다. <백두산 근참기>는 서울을 떠난 7월 24일부터 혜산에 돌아온 8월 7일까지의 기록이다.

최남선과 박한영을 백두산 참근대에 파견한다는 내용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최남선과 박한영을 백두산 참근대에 파견한다는 내용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전점석

이즈음 최남선은 동아일보에 4개월 넘게 연재하고 있던 ‘단군론’에서 여섯 명의 일본 역사학자들에 의해 30년 가까이 축적된 단군 부정론에 대항하여 필마단기로 맞서고 있었다. 한 해 전에 씌여진 불함문화론과 더불어 이 단군론에서 최남선의 치열한 단군연구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단군론은 그의 백두산 기행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1926년 7월 28일 자부터 ‘백두산 근참(覲叅)1–광명은 동방에서’라는 제목으로 시작해서 이듬해인 1927년 1월 23일까지 전체 89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1927년 7월에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육당이 쓴 최초의 금강산 기행문인 <풍악기유>에는 정작 금강산 안쪽의 내용이 없고, <금강예찬>은 대중적인 관광 안내서에 가깝다. 또 <심춘순례>에는 핵심이라고 할 지리산 기행 부분이 빠져 있다. 그런데 <백두산 근참기>는 허항령과 신무치 등의 전개과정과 무두봉과 장군봉에서의 위기를 지나 장군봉과 천지의 경험에서 절정에 이르는 전형적인 등산기의 서사 구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노산 이은상은 동아일보 1927년 9월 8일 자부터 ‘육당의 근업(近業), 백두산기(白頭山記)를 읽고’란 글을 5회 게재하였다. 그는 육당이 쓴 <백두산 근참기>는 신화와 전설, 사화(史話)와 인물담이 교과서 노릇을 할 수 있고, 우리의 정신을 북돋움에 이바지됨이 많다 할만한 책이라고 하였다.

육당에게 국토기행은 민족의식을 함양하고 민족주의자로서의 정신적 동력을 만드는 종교적 순례였다. 금강산과 지리산에 대해서는 순례라는 말을 썼고 백두산에 대해서는 근참이라 했다. ‘근참(覲參)’이라는 말은 존경하는 이를 삼가 절하고 뵈옵는다는 말이다. 종교적 외경심이 밑바탕에 깔려있다. 백두산은 그에게 단군조선의 성지였다. 그는 종교적 태도로 국토기행에 임했다.육당은 평소 깊은 관심을 가지던 백두산과 단군사 관계에 대하여도 백두산 등척(登陟)을 통하여 새로운 깨달음을 갖게 되었는데 자신의 소감과 아울러 백두산 부근 일대의 지지와 민속·방언 등까지도 조사 연구하여 <백두산 근참기(覲參記)>를 썼다. 육당은 1926년 여름에 백두산(白頭山)에 올라가, 민족의 슬픈 사연을 아래와 같이 시로 호소하였다.

천상에서 인간으로 즐겨 오신 우리 단군,

영광의 산정(山頂)에서 고뇌(苦惱)뿐의 세상으로

다시 또 나려가려 하시네.

그 아니면,

그 안 가면,

헤매는 무리 어찌하리까.

길 모르는 저희들이 절로 오기 바라올가,

손 잡아 못 걸으면, 업어라도 드리려 해

이제 또 보려 가려 하노라.

내 아니면,

내 안 가면

헤매는 우리 어찌하리까.

저희들이 부림 받아 드리신 길 텄나이다.

- 최남선(崔南善)이 지은 <백두산근참기(勤參記)> 중 귀명가(歸命歌)

일반 국민들이 길을 몰라서 헤맨 것이 아니라 육당 자신이 방황한 것 같다. 방황은 길을 몰라서가 아니라 어느 길로 갈지를 판단하는 기준을 선택할 용기가 없어서 더욱 괴로웠을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이 나아갈 길은 누구나 독립운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육당은 그 길은 자기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당연히 이 세상에는 고뇌뿐이다. 그 후 육당은 조선 총독부 산하의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갔다. 편수회에서 적극적으로 친일을 하면서도 기회 있을 때마다 전국의 명소 고적을 순방하고 신문, 방송 등을 통하여 ‘조선의 명산’, ‘조선의 강하(江河)’, ‘조선의 삼해(三海)’ 등을 발표해서 국토와 조국 예찬의 정신을 고취하였다. 일본인들에게도 유익한 정보였다. 또 북의 백두산에서부터 남의 한라산(漢拏山)에 이르는 명소 고적을 노래하는 ‘조선유람가’를 짓기도 하였다. 이은상은 1936년에 ‘조선산수가’를 지었다. 국민문학파의 주축이었던 최남선, 이광수의 적극적인 친일로 인하여 국민문학파의 시조부흥, 국토순례는 지식인의 유랑이 되고 말았다. 물론 지식인으로서 조선의 역사와 강산을 예찬하는 행동은 친일을 하지 않는 한 비난받을 이유는 없으나 그 자체가 항일은 아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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