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선 소장·장종완 사무국장

밀양은 올해 3·1운동 10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에 더해 의열단 창단 100년을 맞았다.

이에 밀양시는 지난 2018년 의열기념관을 개관하고 올해 의열기념공원을 조성하며,

오는 11월 10일 의열단 창단 기념일에 맞춰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 ‘독립운동 성지 밀양’을 만드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이하 ‘밀독연’)가 눈에 띈다.

지난 7일 밀양시 내이동 밀성제일고 교장실에서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윤일선(62·밀성제일고 교장) 소장과

장종완(44·태화출판인쇄 대표) 사무국장을 만나 밀독연 개소 배경과 사업, 앞으로 할 일 등을 들어봤다.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 알리기 위해 출범

인터뷰는 주로 윤일선 소장이 답변하고 장종완 사무국장은 부연설명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Q. 지난 2008년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가 개소했는데, 만들어진 동기는 무엇인가요?

“저는 밀독연 회원 가입을 늦게 했습니다. 창립 단원은 아니었습니다. 밀양은 독립운동을 한 인원이 많은 것보다 의미 있는 활동을 한 사람이 많습니다. 의열단 창단 멤버 구성이 (약산 김원봉) 단장을 비롯해 밀양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외에도 윤세복 같은 대종교 3대 교주가 만주 쪽에서 학교를 만들고 교육 사업을 했습니다. 임시정부 수립 때 김대지 선생 등도 참여했고요. 밀양 지역 청년 운동도 많아서 독립운동과 관련한 거리가 많은 곳이 밀양입니다. 처음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개소 때 발기인은 12명이었습니다. 손정태(현 밀양문화원 원장) 초대 소장은 역사 전문가는 아니지만 밀양 역사와 문화 부분 공부를 많이 하신 특별한 분입니다. 그분을 중심으로 학교 교사들이 많이 참여했습니다. 현재 최필숙(밀양나노마이스터고 교사) 부소장도 창립할 때부터 참여했습니다. 발기인은 12명이었지만 2008년 4월 개소식 때 회원은 40여 명 정도로 늘었습니다.”

20190515010213.jpeg
▲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윤일선 소장(왼쪽)과 장종완 사무국장(오른쪽). /박일호 기자

Q. 개소한 지 11년 지났는데, 그동안 가장 핵심적으로 해온 사업은 어떤 것들입니까?

“독립운동가를 발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사업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전홍표 선생입니다. 전홍표 선생은 묻혀 있다가 발굴됐고, 늦게라도 서훈을 받을 수 있게 된 인물입니다. 이후 서너 분 연구소에서 발굴해 선양했습니다.을강 전홍표 선생은 밀양의 옛 군관청(군관들 집무소로, 현 밀양택시 주변으로 추정) 터에 설립된 동화학교 교장으로서 일제 억압 속에서도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교육을 해 많은 독립운동가를 양성했다. 밀독연의 발굴로 2018년 3월 건국공로훈장(건국포장)을 수훈했다. 두 번째 사업은 회원들이 교사가 많다 보니 나라 사랑 정신과 의열 정신을 젊은이들에게 알리는 교육 활동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진행해 왔습니다. 수능 시험을 치른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에게 ‘찾아가는 독립운동사 교실’을 열어 뮤지컬 독립극을 만들고 공연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교육은 학생들에게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지금은 하지 않고 있어 안타깝지만 ‘항일 독립운동지 역사 탐방’ 행사를 해오다가 지난해 여름부터 못 하고 있습니다. 예전엔 다른 단체나 개인이 후원을 해줘서 역사 탐방이 가능했는데, 지금은 후원이 없어서 의미 있는 행사임에도 행사가 끊어진 상태입니다. 중국 항일 독립운동지는 갈 때마다 다른 느낌을 갖게 됩니다. 최 부소장은 매년 한 번씩은 꼭 가서 10번 이상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Q. 역사 탐방 행사는 밀양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없나요?

“약산장학회 김태영(약산 김원봉 장군 조카) 회장이 개인적으로 후원을 해줘서 역사 탐방이 이뤄졌습니다. 밀양시, 밀양교육지원청과 연계 사업을 해보려 했는데 잘 안 됐습니다. 밀양교육지원청에서 고등학생 대표 1명을 유럽 여행 보내기에 우리 연구소가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도 가면 좋겠다고 건의해 밀양시로부터 5000만 원 지원을 받아 가보자고 구체적으로 논의도 했는데 결국엔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라도 시, 교육청과 연계해 지속적으로 항일 독립운동지 역사 탐방 행사가 이뤄졌으면 좋겠습니다.”

Q. 밀양초등학교(옛 밀양공립보통학교) 출신 독립운동가 명예졸업장 수여도 밀독연이 이뤄낸 매우 뜻있는 일이죠.

“명예졸업장은 지난 2018년 2월 김원봉, 올해 2월 김상득·한봉삼 선생 등 3명에게 수여했습니다. 졸업장 수여할 사람을 찾다 보니, 한 해는 졸업자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뭔가 졸업자가 없었던 계기가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밀양에서는 1919년 3·13 만세운동이 가장 큰 운동이었는데, 당시 만세 운동 후 태극기를 들고 다니다 학교에도 던져 놓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만세 발발지 근처에 밀양공립보통학교가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학교에 있던 태극기를 주워서 만세 운동에 참여한 것 같고, 그것을 처분받아 졸업을 못 한 게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입학한 기록이 있는 학생들은 발굴해서 졸업장을 수여하자는 게 우리 연구소의 취지입니다. 나머지 기록이나 자료들을 찾아볼 필요가 있는데 그 작업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년 2월엔 명예졸업 해당자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명예졸업장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이기종 전 밀양초교 교무부장과 최필숙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부소장의 도움이 컸다. 이들은 학교 자료를 모두 뒤져 3·13 밀양 만세운동 당시 밀양공립보통학교 전교생(1~4학년) 160명의 졸업대장을 확인한 결과 140명이 3·13 밀양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것으로 분석했다. 하지만 1919년엔 한봉삼 선생을 포함한 학생 59명 중 아무도 졸업장을 받지 못했으며, 다음 해에는 38명 중 5명, 그다음 해에는 35명 중 8명만 졸업장을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411.jpg
▲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는 정신적 유산인 의열정신을 계승하고자 매년 8·15 광복절 기념 뮤지컬 공연에 고등학생들을 일부러 참여시켜 독립운동 성지 밀양을 각인시키는 교육을 하고 있다.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2018년 개관한 의열기념관

Q. 지난 2018년 개관한 의열기념관 건립에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도 많은 역할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의열기념관 개관은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가 요청했었습니다. 지난 2016년 의열기념관 터 매입 전부터 요구했었죠. 터 매입 선정도 안 되고, 생가지를 팔려는 가격이 안 맞아서 매입을 못했습니다. 해천 건너편에 의열기념관을 지으려 했다가 땅 주인이 팔려는 의향이 있어서 현재 자리에 건립하게 됐습니다. 밀양시가 12억 원을 들여 건물을 사고 시설을 투입했죠. 땅 매입 과정에서 밀양시 지원의 한계가 있어서 밀양에서 사업을 하는 독지가가 7000만 원을 기증해서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Q. 의열기념관 내부 자료들은 알차고 볼거리도 많더군요.

“대구대 사학과 김영범 교수와 최필숙 부소장 등 몇 분이 의열관 내부 자료에 대한 자문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김영범 교수는 근대사 쪽 논문 많이 썼고 국내에서는 의열단 논문 최고 권위자로 꼽힙니다. 지금 의열기념관 관장은 따로 없고, 이준설 학예연구사가 상주하면서 해설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 학예사는 시청 주민생활지원과 직원입니다. 이 연구사도 주말에 쉬어야 하니까 주말엔 밀독연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자원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연구소가 돈이 많으면 의열관 운영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아쉬운 부분입니다.”

Q. 초대 손정태 소장, 2대 이성영 소장에 이어 2017년 3월 3대 소장을 맡으셨는데, 소장을 맡은 큰 뜻이 있습니까?

“이성영 소장은 제 친구입니다. 저는 사실 밀독연 존재도 몰랐습니다. 이 소장이 밀독연 소장 임기가 2년이니까 저에게 소장을 권했습니다. 윤세주 열사 후손이고 하니 (소장을) 해야 한다는 주변 얘기도 있었고요. 저도 ‘선열들께서 희생했는데 내가 밀양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분들 일을 알리는 게 소명’이란 생각이 들어 맡게 됐습니다. 알고 보니 우리 집안이 무송윤가인데, 전라도 고창서 태생한 성씨였습니다. 어찌하다 집안 사람들이 밀양으로 넘어와서 독립운동 서훈받은 사람이 7명이나 됐습니다. 윤세주, 윤세복, 윤치형, 윤창선, 윤보훈, 윤방우 등. 윤세주는 밀양 3·13 만세운동 주도했고, 윤세복은 만주 쪽에서 이름을 떨친 대종교 3대 교주였습니다. 밀양 사람들은 만주에 가면 주로 윤세주 쪽으로 많이 갔습니다. 독립 운동을 많이 할 수 있도록 정신적 역할을 했던 모양입니다. 내가 너무 모른다, 늦었지만 공부를 더 하면서 의열정신이라도 후세에 알려야겠다, 나한테 주어진 사명감인가보다, 받아들이다 보니 이 자리에 온 것 같습니다.”

Q. 윤세주 열사 후손인 것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나요?

“자랄 땐 후손인 줄 몰랐습니다. 안타까운 것이, 후손들이 먹고살 만해야 조상을 찾고 하죠. 윤세주 열사 장조카가 사업에 성공해서 할아버지 찾아야겠다 생각하고 손정태 초대 소장에게 얘기를 했고, 제 선친과 얘기 끝에 중국에 가서 윤세주 열사의 흔적을 찾게 됐습니다. 저도 선친께 귀동냥으로 윤세주 열사 얘기를 듣게 됐죠. 아버지 세대와 이분들은 아버지와 같은 항렬인데 나이 차는 많이 났습니다. 아버지는 27년생인데 그분들은 감옥갔다 풀려난 시점이니 서로 알지 못했습니다. 집안이 여유가 있었다면 당시에 찾았을 건데…. 하지만 전부 밀양시 내이동 해천 밑에 살았습니다. 선친과 윤세주 열사는 촌수로는 10촌이 넘습니다. 10촌 넘어도 멀지 않은 친척입니다.”

Q. 현재 밀독연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사업은 무엇인가요?

“갈수록 개인주의가 심해지고 먹고사는 데 큰 지장이 없어지고 있죠. 그러다 보니 옛날의 어려움을 잘 모릅니다. 그런 정신을 잘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교직에 몸담고 있으니까 의열정신은 꼭 물려줬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고3 대상으로 해마다 11월에 뮤지컬 독립극을 만들어 공연하고, 8·15 광복절 행사에도 학생들을 일부러 참여시킵니다. 강제가 아니고 봉사 점수도 주고. 먼 미래에 정신적 유산은 크게 영향을 미칠 겁니다. 의열정신 계승 교육은 지속적으로 할 계획입니다. 올해도 논란의 중심에 있습니다만 김원봉 장군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길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정치 이념 문제가 걸려 있지만. 어쨌든 목숨 바친 공을 제대로 인정하도록 힘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밀독연이 큰 힘이 안 되더라도 지속적으로 마음을 갖고 있어야겠단 생각이 듭니다.”

Q. 김원봉 장군 독립운동 서훈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지금은 사회가 양쪽으로 편 갈려졌다고 할까, 이념적으로 정치적으로 연결되니까 저희들(밀독연 회원들)은 뭐라고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저희 회원들은 교사가 많습니다. 자칫 한쪽 편향이라는 말을 들으면 문제니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도 어렵고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니다 싶고. 밀독연 개소하고 김원봉 장군 서훈을 2번 신청했지만 안 됐습니다. 올해 들어서 갑자기 나타난 것이, 이것도 부담되는데, 지금 (문재인) 정권에서 너무 푸시(Push)한달까 그러니까 한쪽 편에선 극렬히 반대를 하고. 어느 쪽 편을 들 수 없는 거죠. 공과(功過)가 있다면 과(過)도 알리면서 공(功)도 인정해주면 좋겠습니다. 해방 이전 독립운동만 얘기하면 되지 않느냐는 사람들도 있던데, 그 이후도 사람이 사는데 없어지는 역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해방 이전 운동이 탁월하다면 그 부분도 생각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남북통일이 된다면 당연히 없어질 갈등인데, 대한민국 역사에서 숙제입니다.”

20190515010219.jpeg
▲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윤일선 소장. /박일호 기자

“독립운동의 정신적 유산 공유했으면···”

Q. 올해 3·1운동 100년, 의열단 창단 100년을 맞아 밀양이 독립운동 성지로 더욱 부각되고 있습니다. 밀양을 독립운동 성지로 더욱 브랜드화해 성장시키고 전국 명소로 만들고자 밀독연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유산은 물질적 유산도 중요하지만 정신적 유산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의열정신은 밀양뿐 아니라 누구든지 가져가야 합니다. 불의를 보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일어날 수 있는 게 의열 정신입니다. ‘정의’라는 꼭 필요한 정신. 유형 자산은 항일 테마거리, 의열기념관, 시립박물관 안에 있는 독립기념관 등 기존 있는 자산에다가 올해 시가 의열기념공원도 조성한다고 합니다. 독립기념관에 가면 독립운동가 흉상이 있는데, 다른 지역엔 독립운동가가 한 명만 있어도 조각상을 만들고 합니다. 밀양은 꺼리는 많은데 시설이 부족한 느낌입니다. 아곡산 광산에서 3·13 만세운동 때 등사기로 태극기를 만들던 장소가 있는데, 거기를 기념공원화하면 한 번씩 구경할 수도 있을 겁니다. 태극기를 숨겨뒀다가 만세 운동을 한 현장이니까 의미가 있죠. 밀양관아 앞에 만세 운동한 곳이라고 팻말이 붙어 있지만 기념화하고 성역화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만세운동 장터를 평소에도 늘 각인시키는 방안. 밀독연만의 일은 아닌데….”

Q. 밀독연이 역사 기록을 남기고자 책 발간도 많이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밀독연 이름으로 만든 책은 손정태 초대 소장이 집필한 2권과 최필숙 부소장이 쓴 책 1권이 있습니다. 그것 말고도 회보가 있는데, 회보라기보다 학술강연회가 끝나면 강연회와 관련한 독립운동가를 1명씩 조명해 책자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김대지, 김병완, 최수봉 등 약 10명 정도를 조명했습니다. 이밖에 지난해 김영범 교수가 의열단 창립단원 관련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고요. 학술강연회는 지난 2012년부터 매년 1회 개최하고 있습니다.”

Q. 밀독연 회원은 몇 명이고,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습니까?

“전체 회원은 90명이고 회비로 월 1만 원을 냅니다. 유료 회원은 80명 좀 더 됩니다. 이사들은 연 5만 원 더 내서 모임 식삿값으로 활용합니다. 이사는 10명가량입니다. 김영범 교수 등 10여 명은 특별자문위원으로 무료 회원입니다. 다른 지역 회원 중 유료 회원도 10명 정도 있습니다. 좋은 일 한다며 후원하는 회원들입니다. 젊은 층 회원도 많고 밀양향토청년회 회원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향토청년회가 3·13 만세운동 행사를 주관하고 있어서 밀독연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사단법인 밀독연은 연간 1000만 원 정도로 운영합니다. 기부금도 받지만 일반적 기부보다 목적 사업(탐방, 학술대회, 독립뮤지컬 제작 등)에 기부하는 형식입니다. 소장 임기는 2년인데, 저는 올해 연임돼 2020년 3월까지 맡습니다. 소장은 회원들이 추대하고 총회에서 선임하는 형식입니다.”

Q. 밀양시 지원을 받는 행사도 있습니까?

“뮤지컬 독립극을 제작할 때 제일 많이 받습니다. 3500만 원 드는데, 시에서 600만 원 지원해줍니다. 그래도 모자라니까 독지가들께 찬조를 받아서 극을 제작해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공연합니다. 뮤지컬 제작은 극단 밀양이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학술강연회 때는 시로부터 200만 원을 지원받습니다.”

Q. 올해 약산기념사업회도 창립하고, 밀양시가 오는 11월 의열단 창립 100주년 기념행사도 열 예정입니다. 밀독연은 어떤 역할을 맡습니까?

“11월 10일 의열단 창립일에 기념행사를 합니다. 현재는 약산기념사업회(회장 김태영)와 밀독연이 연결돼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밀독연에 김태영 회장이 후원을 많이 해줘서 연관이 있습니다. 나중에 약산기념사업회 만들어지고 김 회장이 부탁하거나 요구하는 부분이 있다면 도와줘야 되지 않겠나 싶습니다.”

Q. 김태영 회장이 최근 모친상으로 밀양에 왔을 때 서울과 밀양에서 이원 체제로 약산기념사업회를 꾸려갈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밀양지역 구심점 역할을 밀독연이 하게 되나요?

“의열단 창립 100주년 기념행사는 시가 주최·주관합니다. 밀독연은 어시스트 역할을 하게 될 겁니다. 시가 행사만 만들어놓으면 콘텐츠는 밀독연에서 하는 형태가 될 것 같습니다. 현재로는 시에서 하는 사업을 밀독연이 그냥 도와주는 형태입니다.”

Q.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는 일반 봉사단체와 명칭부터 의미가 다릅니다. 연구하려면 말 그대로 연구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회원 전부 개인 자격이고 주업이 있는 분들입니다. 전문 연구소로서 역량이 부족합니다. 대체적으로 최필숙 부소장한테 의존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손정태 초대 소장이 중추적 역할을 하다가 회원 탈퇴를 했고요. 연구소 역량 강화가 쉽지 않아 아쉽습니다. 또 회원 80~90명이 회의를 해서 결집 의견을 내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이념적 부분 때문에 흔들리다 보니 회원들 간 갈등이 있어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연구소가 해야 할 일만 할 수 있는 단체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시 지원을 받으니까 시와 관계도 생각해야 하죠. 자치단체가 정당과 연결돼 있으니까 활동이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순수하게 연구소 일만 했으면 좋겠습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