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한국당이 천박한 언어를 쓰는 건 지지층 결집을 위해서라는 분석입니다. 천박한 언어를 써야 지지층을 결집할 수 있다고 보는 건 자기 지지층이 천박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천박한 인간 취급받으면서도 지지하는 건 자기가 천박하다는 고백입니다.”

역사학자 전우용 씨가 2019년 5월에 남긴 글이다. 정치인들이 공개석상에서 경쟁하듯 뱉어낸, 이른바 ‘망언(妄言)’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정치는 말과 글을 매개로 한다. 때문에 망언과 비어(卑語)가 판을 치면 정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그런데 2019년 한국사회는 품격이나 시비는 온데간데없고 온통 천박한 언어만 횡행한다. 원인은 바로 ‘당동벌이(黨同伐異·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뜻이 같은 사람끼리는 한패가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배척함)’다.

중국 삼국시대를 지탱한 한 축인 오(吳)는 양자강 유역을 근거지로 한 나라다. 오나라는 위나라와 촉한에 비해 늘 수세적이었는데, 이는 배후 산악지역에 있던 산월족 때문이었다. 법망이 미치지 않는 험준한 산속에 살던 그들은 오나라 뒤통수를 위협하는 큰 걱정거리였다.

오는 왕조가 존속하는 동안 모두 5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벌였으며, 그 외에도 수시로 군대를 파견하곤 했다. 이 토벌 작전은 장장 62년 동안 지속됐다. 토벌 규모나 기간을 종합하면 산월족이 오나라에 얼마나 큰 우환덩어리였는지 짐작이 간다.

비잔이란 사람이 한때 산월족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켰다. 손권은 육손을 파견해 그들을 진압하게 했다. 육손은 동쪽 3개 군(郡)단양·신도·회계의 군민들을 군사로 징발해 산월족을 평정했다. 그러자 회계태수 순우식이 글을 올려 육손을 비난했다.

“육손이 함부로 백성을 징발하는 바람에 그가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육손은 그러나 전투를 끝내고 돌아와 순우식을 훌륭한 관리라고 치켜세웠다. 손권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순우식은 그대를 고발했는데, 그대는 오히려 칭찬하니 어찌 된 일이오?”

육손이 답했다. “순우식은 맡은 바 임무가 백성을 어루만지는 데 있기 때문에 저를 고발한 것입니다.”

그러자 손권은 육손을 크게 칭찬했다.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정파적인 적대관계는 아니었으나 육손에게 순우식은 불편한 존재였다. 산월족 정벌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군사를 그러모아야 하는데, 순우식은 군사 징발이 백성들을 힘들게 한다며 사사건건 이에 반대했다. 하지만 육손은 순우식이 목민관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입장이 다를 뿐 순우식 또한 마땅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했다.

육손을 수식할 때 등장하는, ‘오나라를 지탱한 중신(重臣)’이란 찬사는 그저 생긴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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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선군 이하응.

19세기 말 안동 김씨 세도하에서 몰락한 종친으로 살았던 흥선군 이하응은 그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파락호 생활을 자처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상갓집 개’ 혹은 ‘거지 궁도령’이었다. 흥선군이 정권을 잡기 전 저자거리를 헤맬 때 청년 사관인 이장렴이란 이와 함께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이장렴은 이 자리에서 흥선군이 예에 어긋난 행동을 하자 그를 실컷 두드려 팼다.

그런데 흥선군이 어느 날 대원군이 되어 만기를 총람하게 되자 이장렴은 좌불안석이 되었다, 천하를 호령하는 대원위 대감에게 손찌검을 한 전력이 그냥 묻힐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장렴은 일단 사과를 하고 나서 무슨 처분이든지 받겠다는 각오로 대원군을 찾았다.

“면목이 없습니다. 처분만 기다릴밖에 어찌 감히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흥선군은 다소 노기 띤 목소리로 “이놈! 지금도 네가 나를 때릴 수 있을까?”하고 호통을 쳤다.

변변치 못한 위인 같았으면 당장에 머리를 싸매고 쥐구멍을 찾았겠지만, 이장렴은 통쾌한 장부인지라 이렇게 답했다.

“예 지금이라도 대감께서 기생집에서 무례한 일을 하시면 주저 없이 이 주먹을 쓰겠습니다.” 그러자 뜻밖의 대답이 들려왔다. “그래 네 말이 그럴듯하다. 물러가 있거라”

기사회생(?)한 이장렴이 대문을 나오는데 등 뒤에서 문득 큰 소리가 들렸다.

“금위대장감 나가신다! 길들 비켜라!”

이장렴은 실제로 금위대장에 올랐다.

이장렴에 대한 사감(私感)이 컸을 법도 한데, 대원군은 상대가 지닌 의기와 배포를 높이 평가했다. 이장렴 또한 또렷한 소신으로 자신을 어필했다. 멋진 대화가 오갔기에 투합(投合)은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품격있는 언어란 꼭 적대적인 관계에서만 빛나는 게 아니다. 상대를 헤아리는 언어는 친숙한 사이에서도 필요하다. 다음 두 가지 예화는 사안에 따라 필요한 ‘강(强) 스매싱’과 ‘약(弱) 스매싱’을 대표하는 문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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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희.

조선시대 6진(鎭) 개척에 빛나는 ‘백두산 호랑이’ 김종서는 북방 일을 마친 후 병조판서로 영전했다. 당시 정승 벼슬을 하던 황희는 이를 축하하기 위해 어느 날 병조를 찾았다. 그런데 황희는 정승이 찾아왔는데도 영접도 없이 자리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있는 김종서를 보게 된다.

김종서가 미처 못 본 것인지 보고도 못 본 체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 그의 태도에 자만하는 빛이 역력하자 황희는 김종서의 면전에서 병조 관리들에게 일갈했다.

“너희 판서께서 앉아 계신 의자 다리가 잘못된 것 같다. 한쪽이 기울어졌으니 속히 고쳐드려라!”

이 말을 들은 김종서는 깜짝 놀라 황희의 발밑에 꿇어 엎드리곤 “소인이 미처 대감께서 오시는 것을 뵙지 못하고 큰 실수를 범했습니다. 부디 용서하십시오!”하고 사죄했다.

사실 김종서에 앞서 북방을 살피고 돌아온 사람은 칠순에 가까운 황희였다. 또 세종이 6진 개척의 적임자를 하문할 때 김종서가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 그릇임을 알고 추천한 사람도 바로 그였다. 황희는 김종서의 성격이 다소 거칠고 자신감이 지나친 것을 경계하기 위해 짐짓 목소리를 높인 것이었다.

그렇지만 황희는 대놓고 상대의 무례를 힐난하지 않았다. 대신 애꿎은(?) 의자와 병조 관리들을 타깃으로 삼았다. 상대가 정신이 번쩍 들 정도의 강수였지만, 방식은 멋진 우회 전술이었다.

뒷날 김종서는 이를 두고 “내가 한창 북방을 경영할 때는 오랑캐의 화살이 코앞에 날아와도 두렵지 않았는데. 황 정승의 일갈에는 오금이 저리고 등에서 진땀이 다 흘렀다”고 회고했다.

중국 삼국시대를 이은 통일왕조는 진(晉)나라다. 통일 황제로 불렸던 무제 사마염은 오나라에서 투항한 손수라는 사람을 매우 총애했다. 처제 괴씨를 그에게 시집보냈는데, 부부간 금슬이 좋았다.

그런데 부인이 한 번은 투기를 하다가 손수에게 ‘오소리 새끼狢子(학자)라고 욕을 했다. 오소리 새끼라는 말은 당시 북방인이 남방인을 멸시하여 부르던 호칭이다. 즉 손수가 남방인 오나라 출신임을 비하해 한 말이다.

위의(威儀·격식을 갖춘 태도나 차림새)와 덕망을 자랑하던 손수는 이 소리를 듣고 몹시 불쾌해하며 다시는 부인의 방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자 괴씨는 크게 후회하고 자책하면서 무제에게 도움을 청했다.

당시 사면(赦免)이 시행됐는데, 신하들이 이를 축하하러 모두 황제를 알현했다. 무제는 신하들이 돌아갈 때 손수만 남게 한 뒤 조용히 말했다.

“천하가 대사면으로 크게 관대해졌으니, 괴부인도 그 예를 따를 수 있지 않을까?”

손수는 모자를 벗고 사죄했으며, 부부는 예전 관계를 회복했다.

무제가 던진 한마디는 열 마디 질책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황제라는 직위를 앞세워 손수를 꾸짖을 법한데, 무제는 그러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을 사려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무제는 대사면이란 상황을 적절하게 활용했다. 정중한 권고에 담긴 뜻을 파악한 손수는 순순히 자신을 굽혔다.

상대가 못마땅해 대놓고 깔 때에도 품격은 필요하다. 천박한 언어를 동원하면 감정적인 반응만 부른다. 하지만 적절한 격조를 곁들이면 대답 또한 달라진다.

중국 동진(東晉) 시대를 대표하는 일화로 ‘왕탄지(王坦之)와 범계(范啓)’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두 사람은 나란히 황제 사마욱의 초청을 받았는데 범계는 나이는 많았지만 지위가 낮았고, 왕탄지는 나이는 적었지만 지위가 높았다.

황제 앞으로 나아가려 할 때 서로 앞서라고 양보하다가 한참 뒤에 왕탄지가 결국 범계의 뒤에 서게 되었다. 그러자 왕탄지가 말하길 “까부르고 날리고 나니 겨와 쭉정이만 앞에 있네”라고 했다. 원문은 ‘파지양지(簸之揚之) 강비재전(糠秕在前)’이다. 황제가 보는 앞이라 자리를 양보했으나 앞에 선 범계가 못마땅해 한 말이었다.

범계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씻어내고 골라내고 나니 모래와 조약돌만 뒤에 있네”라고 응수했다. 원문은 ‘조지태지(洮之汰之) 사력재후(沙礫在後)’다. 왕탄지가 겨와 쭉정이로 공격하니 모래와 조약돌로 응수했다.

언중유골이란 바로 이런 대화를 두고 하는 말이다. 서로 상대를 깔아뭉개기는 했어도, 대구(對句)가 워낙 훌륭해 조금도 비루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품격을 갖춘 일화를 배열했지만, 사실 이같은 언어 품격은 그리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망언과 비어는 옛 시절에도 차고 넘쳤다.

다산 선생은 18세기에 ‘십어이칠황(十語而七謊)‘이란 말을 남겼다. 비록 고관대작들이 하는 말이라도 깊이 검토해보면 열 마디 중 일곱 마디가 거짓이더라는 뜻이다.

다산은 그런 후 ‘거관사설(居官四說)’이란 짤막한 글에서 말씨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보고 지도자의 자질을 판별할 수 있다고 했다. 다산이 예를 든 건 “이 지방은 인심이 고약하구나”라는 말이다. 그는 “영남이건 호남이건 사람의 마음과 살아가는 이치는 동일하다. 그러므로 아무리 작은 마을에도 충직하고 신의 있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공자가 살던 마을에도 역시 미치광이들은 있기 마련”이라고 하면서 특정 지역 인심만이 고약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이 말은 곧 편을 가르고 특정 지역을 비하하는 21세기 한국사회를 직접 꾸짖는 듯하다. 그는 유배시절 <아언각비(雅言覺非)> 3권을 완성한다. 다산은 여기서 “학(學)이란 무엇인가? 학이란 깨닫는 것이다. 깨닫는(覺) 것은 무엇인가? 깨닫는 것은 잘못을 깨닫는 것이다. 잘못을 깨닫는 것은 어떻게 하는가? 평상시 언어에서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말과 글이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한다.

“남의 잘못을 지적할 때에는 탐욕, 비루함, 음탕, 사치스러움만을 지적해야지 편파적으로 끼리끼리 의식에 의거해 당동벌이 식으로 (상대를) 함정에 몰아넣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원종 11년(1270년)에 고려에 온 몽골 다루가치 탈타아는 정복자 관리로서는 조금 특이한 인물이었다. 다루가치란 고려 국왕의 통치를 감시하는 관리로, 실질적인 고려 지배자였다. 통상 이 정도 권력을 가지게 되면 방약무인하거나, 사리(私利)에 매몰되기 마련인데 탈타아는 세계 제국 몽골의 기상을 한 몸에 체현한 인물이었다.

탈타아는 몽골을 반대하는 음모가 나와도 왕실에 대해 트집을 잡지 않았고, 고려 사람들이 약탈하는 몽골 군사들을 죽이고 모반해도 그들을 공정하게 재판하고 보복하지 않았다.

죽음에 얽힌 마지막 에피소드. 중병에 걸린 탈타아가 자리에 눕자 고려 의원이 약을 올렸다. 탈타아는 이를 거부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병이 깊어서 내가 아주 일어나지 못하게 됐소. 내가 지금 이 약을 마시고 죽는다면 ‘고려에서 독약을 먹여서 죽였다’고 당신의 나라를 얽어 참소하는 자가 반드시 나올 것이오!”

그리고는 끝내 그 약을 먹지 않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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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쉰.

근대 중국 문학을 대표하는 루쉰은 걸출한 지식인이었지만 스스로 지식인이라는 걸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다. 죽기 2년 전, 그가 쓴 글 중에 <門外文談>이 있다. 당시 루쉰은 이미 중국을 대표하는 문인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내가 어느 정도 고서(古書)를 들여다봤다는 이유로 나를 믿는 사람도 있고, 양서(洋書)를 약간 읽을 줄 안다는 이유로 나를 믿는 사람도 있다. 고서와 양서를 다 읽을 줄 안다는 이유로 나를 신용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같은 이유로 나를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 저 녀석은 박쥐라는 것이다. 내가 고문에 관해 언급하면 당송팔대가도 아닌 네 말을 어찌 믿느냐고 웃는 것이었다. 대중어에 대해 언급하면 근로 대중도 아닌 주제에 잘난 채 한다고 웃는 것이었다. 지당한 말이다.”

진정성을 담은 탈타아의 말, 그리고 겸손이 배인 루쉰의 글은 시대를 초월하는 품격이다.


참고자료

♣ 왕세정 산정(刪定), 김장환 옮김, <세설신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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