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산 문선> 발간에 관한 편지로 인해 체포

노산이 1942년 12월 경 백운산 백운암에 있을 때였다. 광양경찰서 경찰을 앞세우고 함경도 형사 3명이 집안으로 들어섰다. “네가 여기 숨어있는 것을 모르고 우리가 두 달이나 찾아다녔다”고 하면서 다짜고짜 욕설을 퍼붓고 발길로 찻다. 이렇게 은둔지인 광양에서 체포되어 온갖 고문과 체형을 받은 후 순천과 서울을 거쳐 함경도 홍원경찰서로 이송되었다. 경찰서 유치장은 일반 잡범들과 어학회 사건과 관련되어 끌려온 함흥영생학교 여학생들로 만원이었다.

4년간 은둔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노산이 뒤늦게 체포된 것은 환산 이윤재와 주고받은 편지 때문이었다. 경찰이 환산의 가택수색을 하다가 노산과 주고받은 편지를 발견하고 주소지를 알게 되었다. 노산이 광양에 있는 동안에 환산에게서 온 편지에는 ‘자신이 사전편찬을 해주기로 하고 영창서관에서 원고료를 가져다 쓴 일이 있는데 수년이 지나도록 원고를 넘겨주지 못하니까 주인이 와서 실랑이를 하다가 책상머리에 노산의 글을 모아둔 신문 발췌 철이 있었는데 그것이나마 넘겨달라고 하여 어쩔 수 없이 넘겨주었으니 양해해 달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노산은 흔쾌히 동의하는 답장을 보내었고 이로 인해 노산의 첫 작품집인 <노산 문선>이 1942년 2월,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다.

한편, 이희승의 회고에 의하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 유치장에서 한방에 같이 있었는데 ‘노산이 검거된 것은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의 발기취지문 때문인데 그것을 노산이 지었던 것이다’고 한다. 두 가지를 종합해보면 노산을 체포하는 이유는 발기취지문 때문이며 환산과 주고받은 편지에서 비로소 주소지를 확인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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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산의 두번째 저서인 <노산문선>은 1942년, 영창서관에서 나온 시문집, 해방후에 펴낸 재판. /전점석

6인의 조선인 형사는 인간백정이라고 불리우는 구문의 명수

홍원경찰서에서 처음 조사를 시작할 때는 제법 신사적으로 했다.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은 분들이니 신사적으로 대접해 주겠다’고 공손하게 대했다. 그러나 곧바로 사상범을 다루는 데는 자칭 백전노졸(百戰老卒)이라는 고등계 형사의 마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붙들려 간 분들은 몽둥이로 맞는 육전(陸戰), 물을 코와 입에 퍼붓는 해전(海戰), 공중에 매달아 때리는 공전(空戰) 고문 등 심한 고문을 당했다.

외솔 최현배는 <나의 학문의 길>에서 ‘나는 삼십여 명의 동지들과 한 일 년 동안 홍원경찰서에서 비행기를 타고 기절하였고 물을 먹고서 까물어 쳤으며 목총으로 머리를 두들겨 맞고 유혈이 낭자하였고 곤장을 맞아 등과 궁둥이가 터졌으며 발길로 종아리를 채여서 워낙 상하였기 때문에 40도의 신열이 나고 앓았으며 이러한 찰초(札抄·기본으로 하는 사항)에 짝하여 갖은 모욕과 천대를 받았다. 이것이 나 하나만의 겪음이 아니라 삼십여 동지들이 똑같이 겪은 바이며 그 밖에 우리들의 가족과 친구들까지 불려 와서 모욕과 박해를 당하였다’고 하였다. 1942년 12월부터 본격적인 취조가 시작되었다. 주로 홍원경찰서에 있는 무덕전(武德殿)이라는 곳에서 이루어졌는데 평소에는 경찰관들이 유도와 검도를 수련하는 곳으로 바닥에는 다다미가 깔려 있었다. 이곳에서 함경남도 경찰부와 홍원경찰서의 고등계 형사들이 연합하여 취조하였다. 이 과정에서 함흥경찰서와 홍원경찰서를 합하여 10명의 경찰이 담당하였는데 그중에 6명이 한국인이었다. 고문의 명수로 ‘인간백정’이라고 불리웠다. 감방에서 한 사람씩 불러내어 조사를 하는데 ‘조선의 독립을 획책하기 위하여 상해 임시정부 지령에 따라 조선어사전을 만들고 있었다’는 내용이 될 때까지 고문하였다.

길다란 나무 판대기 걸상에 반듯하게 뉘고 묶은 뒤에 커다란 주전자로 콧구멍에 물을 붓는 것이 이른바 해전이다. 콧구멍으로 들어간 물은 기관을 따라 폐부에 스며들고 입으로 들어간 물은 위로 들어가 삽시간에 만삭의 여자처럼 배가 불러진다. 그러면 누구든 기절을 하고 마는데, 저들은 기절한 사람을 감방에 처넣고 주사를 주고 약을 먹여 정신이 들게 한다. 그다음에는 공전을 내보낸다. 두 팔을 위로 묶어 팔 사이에 작대기를 지르고는 양쪽 끝을 밧줄로 묶어 천장에 달아맨다. 처음에는 짚단을 발밑에 괴어 주지만 저들이 지어낸 물음에 모른다고 대답하면 짚단을 빼버린다. 그러고는 달아맨 두 줄을 마치 그넷줄 꼬듯 한참 꼬았다간 풀어 놓는다. 팔이 떨어져 나갈듯한 고통과 심한 어지러움으로 누구든 10분도 안 되어서 혀를 빼물고 기절하고 만다.

한결 김윤경에 의하면 물을 먹이러 할 때에는 나체 행렬을 지어 악형장(무도장 옆에 붙어있는 목간을 이용함)으로 가게 되는데 먼저 당하는 이를 보이면서 공포심을 느끼도록 하였다. 한글학자 정인섭은 ‘새로 잡혀간 나는 시멘트 바닥에 깔린 다다미 위에 이은상, 안재홍, 서승호, 장현식과 함께 다섯 사람이 두 개로 쪼개진 기다란 통나무에 다섯 개 구멍을 만들어 거기다가 다섯 사람이 한쪽 다리씩 끼우고 그래서 그 통나무 양쪽에 자물쇠를 채워 꼼짝 못 하게 했다. 이윤재 선생이 경찰서 체육장 옆 목욕탕에서 온몸을 벗기운 채 목과 허리와 다리를 나무 걸상에 묶고서 주전자 찬물을 코와 입에 들어붓는 고문을 당하는 모양을 내가 보았다’고 하였다.

이윤재는 시바다(본명 김건치)라는 제자에게 갖은 모욕을 받아 가면서 취조를 당했는데 처음에는 시바다가 “이 선생 웬 일이십니까?”하고 인사까지 했으나 며칠이 지나자 자기 담당이 아닌데도 이윤재 선생이 취조 받고 있는 곳까지 쫓아가서 “윤재야! 네까짓 놈이 선생이냐? 개* 같은 놈 같으니, 맛 좀 봐야 바른대로 대겠느냐?”고 마구 팼다고 한다.

홍원경찰서에 잡혀간 모든 사람들이 고생을 했지만 그중에서도 조선어학회 대표인 이극로를 3일 동안 물고문을 하여 첫날에는 두 번, 둘째 날에는 세 번, 셋째 날에는 두 번 모두 일곱 차례나 기절시켰고, 무려 열두 차례나 ‘비행기 태우기’라는 고문을 하여 초주검을 만들었다. 이극로는 이외에도 혹독한 난타로 말미암아 손톱과 발톱이 빠져서 병신이 되었으며 몸에 흠집이 생기었다. 늑막염도 걸렸다. 볼기와 사지는 피투성이가 되었고 부르터서 돌작밭 처럼 된 일도 있었다. 그리고 몇 달을 두고 계속적으로 날마다 난타를 많이 당한 이는 이윤재, 한징 두 분이다. 이윤재는 여섯 번 물고문과 난타를 당하였고 한징 역시 물고문과 날마다 난타를 당하였다. 이들 중에서도 가장 악명을 떨친 자는 박정옥의 일기장에서 불온(?)한 글귀를 찾아내 조선어학회사건을 야기시킨 야스다(안정묵)와 함경남도경찰부 고등경찰과에서 파견된 시바타(김석묵)였다. 야스다는 1933년 홍원경찰서 순사, 1934년 홍원경찰서 희현주재소 순사, 1937년 용원주재소 순사를 지냈고, 1940년에는 함경남도로부터 지금의 모범공무원 표창장이라 할 수 있는 정근증서(精勤證書)를 받기도 했다. 1943년 무렵 야스다는 홍원경찰서 고등계 순사부장으로 가장 악질적인 방법으로 회원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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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9년 6월 12일에 첫모임을 가진 십일회 사진. /전점석

소극적이었던 노산의 조국애가 저항정신으로 발전

이극로는 함흥형무소에서 5수의 옥중음(獄中吟)을 썼는데 그중에 한 수를 보면 ‘초가을 깊은 밤 (고문)소리 어지러워 / 감옥에 갇힌 이들은 잠 못 들며 불안해 하네 / 어린 자식과 허약한 아내는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 책임감에 마음이 편하질 않네’라고 하였다. 형무소에서 재판을 기다릴 때에 쓴 시조이다.

함께 징역살이한 외솔 최현배는 옥중시 '임 생각'을 지었다. ‘…… 임이여 어디 갔노 / 어디메로 갔단 말고? / 풀나무 봄이 오면 / 해마다 푸르건만 / 어찧다 우리 임은 / 돌아올 줄 모르나 ……’ 가람 이병기의 옥중시조 ‘홍원저조(洪原低調)’ 25구 가운데는 부모님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몹시 기다리다 아이들 편지 보니 / 팔순(八旬)된 아버지 주야로 염려하시며 / 차디찬 방에 겨오셔 이 겨울을 나신다고’ 라고 썼다. 정태진은 1943년 1월, 옥중에서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한시를 적었다. ‘망국한 섧다커널 아비 또한 돌아가니 / 망망한 하늘 아래 내 어디로 가잔말고 / 한 조각 외로운 혼이 죽잖고 남아 있어 / 밤마다 꿈에 들어 남쪽으로 날아가네’라고 임종을 보지 못한 심정을 슬퍼하고 있다. 노산도 홍원경찰서 유치장에서 ‘어머님께 드리는 편지’를 썼는데 역시 감동적이다.

노산이 쓴 옥중시조 ‘내가 아직 살았는가?’를 보면 그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 수 있다. ‘깊은 밤 찬 마루에 누워 / 숨소리를 들어본다 / 내가 아직 살았는가 그래도 못 미더워 / 손목에 뛰는 맥박을 슬그머니 짚어본다 / 한 바다 물거품 하나 눈 앞에 떠오른다 / 웃어본다는 게 어째 씁쓸한 표정이냐 / 주먹을 힘주어 쥔 양 / 언제 그대로 잠이 든다’ 시조 ‘ㄹ자’에서는 경찰서에 끌려온 이야기를 하고 있다. ‘평생을 배우고도/ 미쳐 다 못배워 / 인제사 여기 와서 / ㄹ자 받침 든 세 글자 / 자꾸 읽어 봅니다 / 제 말 지켜라 / 제 글 지켜라 / 제 얼 붙안고 / 차마 놓지 못하다가 / 끌려와 / ㄹ자 같이 / 꾸부리고 앉았소’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홍원경찰서에 수감되기 전에는 일제에 대한 노산의 저항이 미온적이었고 불가항력적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견해가 있다. 그래서 일제 치하의 현실을 도피하여 때를 기다리기 위하여 은거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김용섭 교수에 의하면 옥중에 수감이 되면서부터 잠자고 있던 그의 저항정신은 머리를 들고 일어났다고 한다. 홍원경찰서 유치장 안에서 ㄹ자 같이 꼬부리고 앉아 있으면서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이 강해진 것이다. 시조 ‘저 예루살렘아’에 나타난 저항정신은 확고해져 있다.

원수 앞에서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다니

손가락은 동강을 내고 혀는 씹어서 빼앗자꾸나

아니면 손과 혓바닥이 돌덩이처럼 굳어버리자

삼척공업전문대학 김용섭 교수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된 뒤부터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은 강해졌고 그때까지의 소극적으로 성숙되던 조국애는 적극성을 띠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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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29는 최초의 전략폭격기로서 1942년에 첫 비행을 하였고 고도 9,000m까지 상승하여 대공포의 공격도 받지 않고 비행을 하였다. /전점석

노산의 구수한 음담패설은 옥중생활의 활력소

1943년 1월 하순부터 조서를 쓰기 시작하여 경찰의 조사가 끝난 것은 1943년 3월 15일이었다. 검사조사를 받고 난 다음에는 몇 달이 지나도록 그냥 내버려두었다. 모두들 하루속히 기소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희승은 처음엔 이윤재, 한징과 함께 같은 방에 있다가 나중에는 이희승, 김윤경, 이병기, 정인승, 이은상, 김선기, 이석린 등 일곱 명이 같은 방에 있었다. 이 유치장을 칠불당(七佛堂)이라고 불렀다. 무료하고 답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은상은 말재주가 좋아 동료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고 한다. 은근한 재담과 음담을 잘 들려주어서 심심하면 노산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조르곤 했다고 한다. 노산이 들려준 구수한 음담패설은 동료들의 지루한 옥중생활에 활력소가 되었다. 노산은 서민호와도 같은 감방에 있었다고 한다. 이 무렵 미 공군의 일본 본토 폭격이 한반도까지 확대되어 함흥 상공에도 B-29 폭격기가 출몰했다. 이오(硫黃)섬이 미군에 점령되었고 오키나와에서도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형무소의 조선인 간수들은 이런 상황을 알려주면서 이들을 격려하였다.

검사 단계에서의 구류 기한인 1년을 끌어온 조사의 결과는 치안유지법 제1조의 내란죄였다. 이극로,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정태진, 김양수, 김도연, 이우식, 이중화, 김법린, 이인, 한징, 정열모, 장지영, 장현식 등 16명은 기소, 이강래, 김윤경, 김선기, 정인섭, 이병기, 윤병호, 서승효, 이은상, 서민호, 이만규, 권승욱, 이석린 등 12명은 기소유예가 되었다.

함흥형무소로 이감된 것은 9월 12, 13일 양일간이었는데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12명은 일단 형무소 감방에 갇혔다가 며칠 후 9월 18일에 모두 석방되었다. 이 당시에는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내란죄, 사상범은 기소가 되면 곧바로 재판에 회부되는 것이 아니고 중간에 예심을 먼저 받도록 되어 있었다. 결국 기소된 16명은 옥중생활을 그만큼 더 오래 있어야 했다. 결국 함흥지방재판소의 예심종결 결정문에 따라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를 적용하였는데 함흥지방법원 결정문에 보면 ‘조선 민족의 문화와 경제력을 양성, 향상시키는 동시에 민족의식을 환기, 앙양하여 독립의 실력을 양성한 다음 정세를 보아 무장봉기 그 밖의 적당한 방법으로 독립을 실현시키려는 운동’이라고 하였다.

형무소의 급식은 말이 아니어서 옥수수, 피, 기장, 콩깻묵 등 잡곡 한 덩이와 시레기국으로 연명하였는데 그나마 부족해서 콩깻묵 한 덩이로 하루 끼니를 때우는 날도 많아서 젊은 수감자들이 굶어 죽은 몸으로 실려 나가는 일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10월과 11월 두 달 사이에 함흥형무소에서 약 350명이 죽어 나갔다. 12월 8일은 일본이 이른바 대동아전쟁을 일으킨 날이었다. 날씨가 몹시 추웠다. 이윤재는 함흥형무소에서도 갖은 고문을 당하였는데 결국 기소된 지 3개월 만에 12월 8일, 독방에서 옥사하였고, 2개월 후인 1944년 2월 22일에는 한징도 기한(飢寒)으로 옥사하였다. 이윤재는 심문을 받으러 끌려갈 때도 몇 번인가 도중에서 쓰러지기도 했다. 몸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있었다. 뒤늦게 가족들이 가매장된 시체를 찾아내어 수의를 갈아입히려고 죄수복을 벗겼는데 벗겨진 옷에는 온통 핏자국으로 얼룩졌고 피가 엉겨 맺힌 곳이 있었다고 한다. 이윤재는 두 눈을 부릅뜬 채로 있었다. 분명 그의 죽음은 타살이었다. 미일전쟁이 일본에게 불리해지면서 일본연합함대의 주력이 미드웨이 방면에서 반 이상 고기밥이 될 무렵에 일어난 억지 조작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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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8월 13일자 조선어학회 사건 경성복심법원 판결문. /전점석

고문형사 안정묵, 김석묵은 해방 후에도 버젓이 경찰로 근무 중

해방 후 환산의 장남 이원갑은 아버지를 고문 치사시킨 안정묵(安禎黙)이라는 형사가 경기도 광주경찰서에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1946년 10월 20일 동료들과 함께 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사건이 있었다. 일제말기에 호랑이 형사로 유명했다고 한다. 해방 후 홍원에 사는 청년들이 안정묵을 잡아 코를 꿰고 등에 ‘나는 애국지사들을 악질적으로 고문한 개놈’이라는 글을 쓴 널빤지를 맨 채 시내를 한 바퀴 돌게 한 다음 때려죽였다고 한다. 수사계 주임이었던 오하라(본명 주영훈)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간신히 홍원을 빠져나와 노숙자로 살고 있었는데 우연히 1945년 여름, 서울 을지로에서 만난 정인승이 직장을 구해주었다고 한다. 이윤재와 한징을 매질한 함흥경찰서 고등계 형사부장 김석묵(金錫黙)이 역시 해방 후 서울 본정경찰서 경무계 차석주임으로 근무하였다고 한다. 김석묵은 1943년 조선어학회 사건 수사의 공로로 경기도 경찰부로 영전하였다. 그는 4월에 독직죄(瀆職罪)로 구속되어 서울지방법원에서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한편 동아일보 1946년 2월 21일 자에는 경기도 경찰부에서 민족반역의 좋은 표준이 되는 본정서(本町署·지금의 서울중부경찰서)의 경부보를 구속하고 조사 중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구속된 김성점(金成點·芝田健次郞)은 일제강점기에 10여 년 동안 고등계 형사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선열들의 운동을 방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모진 매와 고문으로 가장 못되게 굴던 자라고 하였다. 김성점이 함경북도 경찰부에서 조선어학회 사건을 직접 맡았을 때 어찌나 심하였던지 이윤재, 한징 두 분을 죽였을 뿐더러 이극로와 어학회 회원들을 반신불수가 되게 한 자이다. 이후 함북에서 경기도로 옮겨 齊賀 경부 밑에서 온갖 친일을 다 하였는데 해방 후 버젓하게 본정서에서 경부보로 근무하다가 시내 森이라는 일인 전당포 주인을 협박하여 30여만 원을 사취한 일로 안치되었다고 한다. 그는 어학회의 김윤경이 라디오 국어강좌에 출연하여 일제 강점기 함흥에서 심한 고문을 받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 불안하여 일시 피신하기도 했다고 한다.

목숨을 걸고 지켜온 우리말이 드디어 사전으로 출간되었다. 주시경 선생이 처음 사전편찬 작업을 시작한 지 46년만인 1947년, <조선말 큰 사전> 1권이 만들어지고 이어서 1957년까지 전 6권이 출간되었다. 해방 후 감옥 동지들은 십일회(十一會)를 조직하고 1949년 10월 1일 제1회 총회를 하였다. 노산도 동지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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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후에 펴낸 조선말 큰사전. /전점석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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