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가 어때서'황혼에 시작한 도전
한글 배운 할머니 이야기 영화·책으로 제작
유튜브 등 SNS서 '실버 크리에이터'활약도

바야흐로 할머니의 전성시대다. 아니다. 그동안 외면받았던 할머니의 삶이 하나둘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어머니로 한평생 살았던 그녀들의 존재가 이제야 빛을 발하고 있다.

평생 까막눈으로 살다 뒤늦게 한글을 배워 한 자 한 자 적은 시와 일기들. 그리고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행동하는 할머니들의 새로운 도전은 큰 울림을 준다.

◇영화로 책으로

한글을 배워 인생을 다시 시작한 할머니들의 사연이 책과 영화로 속속 소개되고 있다.

창원 씨네아트 리좀에서 볼 수 있는 영화 <시인할매>(감독 이종은). 2016년 곡성의 시골 할머니들이 한글 교육을 받은 후 엮은 시집 <시집살이 詩(시)집살이>의 다큐멘터리 버전이다. 이들은 시골에서 태어나 얼굴 한 번 본 누군가와 결혼을 하고 자식을 키우고, 세월이 흘러 자식을 고향 밖으로 보내고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후 홀로 살아왔다. 그리고 글을 배우기 시작하며 자신의 마음을 세상에 꺼내놓았다. 영화는 그 시간을 견뎌온 할머니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홀로 집안에 앉아 밥을 물에 말아 먹는 모습을 영화화하지 말라고 했다는 그녀들의 당부에서 여전히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전해진다.

▲ 책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에서 볼 수 있는 할머니의 글.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에서 발췌
통영에 있는 출판사 남해의봄날은 최근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를 펴냈다. 2017년 순천시립그림책도서관에서 한글을 배우는 할머니 20명이 쓴 글과 그림을 엮은 책이다.

당시 순천시립그림책도서관은 한 해 동안의 결과물을 소장본으로 소량 만들었다. 그런데 할머니의 그림이 SNS를 통해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서울에서 전시를 열고 관객과 만나며 유명해졌다.

이에 남해의봄날은 올해에도 이어진 수업 결과를 더해 단행본을 냈다. 이 책은 한 온라인 서점의 편집장이 공개적으로 추천하고 좋은 책에 선정되면서 많은 이의 관심을 받고 있다.

남해의봄날은 지난 16일 순천에서 출판기념회를 열며 "우리는 문자로, 메신저로 쉽게 쓰는 문장을 할머니들이 직접 쓰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생각하면 코끝이 찡해진다"고 했다.

▲ 책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의 주인공 순천 할머니들의 자화상 일부.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에서 발췌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를 들여다보면 그녀들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결혼식 날 신랑 얼굴을 처음 본 안안심(79) 할머니, 왜놈에 쫓겨 글을 배우지 못했다는 양순례(87) 할머니, 중학생이었던 큰아들이 바쁜 엄마 대신 숙제를 잘해간 일이 기특해 지금껏 잊지 않고 글로 적은 권정자(84) 할머니 등 애달프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어떠한 소설보다 감동적이다.

◇성인문해교실마다 감동적!

이렇게 할머니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지역별로 진행하는 한글 교실 덕이다.

도내도 여러 기관에서 성인문해교실을 열고 있다.

경남도교육청은 '2019년 학력인정 성인문해교육 프로그램 설치·지정 운영 기관'은 16개 기관 32학급이라고 밝혔다.

의령 지정초등학교는 지난해 성인문해교실 문예 작품집 <작은 이야기>를 발간하고 자축 파티를 열었다. 할머니들의 그림, 시, 편지, 수학, 사회 학습지 등 그간의 교육 활동 전반에 대한 결과물이 책 한 권으로 완성됐다.

또 지난해 11월 김해 우암초등학교는 그녀들의 졸업식을 열고 시낭송회를 열기도 했다. 당시 황순덕(76) 할머니는 "손자들 자랄 때 동화책을 읽어 줄 수가 없어서 안타까웠는데 이렇게 우암 손자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니 소원을 이루었다"고 했다.

그동안 못 배운 한은 시가 되고 환한 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앞으로 이들의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다. 여성으로 태어나 굴곡진 긴 세월을 버텨낸 할머니들. 하지만 우리 사회를 일으켜 세운 세대에도 오늘날 노인 문제 측면에서도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힘이 세다.

지난해 김용택 시인이 할머니들이 쓴 시 100편을 엮어 펴낸 <엄마의 꽃시> 가운데 김춘남 할머니의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오늘은 문해학교 입학하는 날/엄마 생각이 많이 났어요//(중략)장하다 우리 딸! 학교를 가다니/하늘나라 계신 엄마 오늘도 많이 울었을 낀데//(중략)엄마가 살아 계셨더라면/서명도 못 하냐고 무시하던 택배 아저씨도/이름도 못 쓰냐고 눈 흘기던 은행 아가씨도/우리 엄마한테 혼났을 낀데//언젠가 하늘나라 입학하는 날/내가 쓴 일기장 펴놓고/동화책보다 재미있게 읽어드릴게요"('장하다 우리딸!' 중에서)

◇"1인 미디어도 거뜬해"

▲ 1인 미디어로 왕성한 활동을 보이는 박막례 할머니. /박막례 할머니 인스타그램
SNS 등에서는 이와 다른 형태로 할머니의 활약을 볼 수 있다.

'실버 크리에이터(silver creator·노인 창작자)'로 잘 알려진 박막례(72) 할머니. 손녀와 추억을 만들려고 제작한 영상이 화제가 되면서 여러 분야에서 영향력을 지니게 됐다. 그녀의 동영상 채널 구독자 수는 66만 명에 달한다.

여러 매체는 그녀의 일상을 70대 노인의 삶과 연결되어 사회문제 이슈로, 실버세대의 또 다른 희망으로 비추고 있다.

▲ 먹방 유튜버로 유명한 김영원 할머니. /김영원 할머니 인스타그램
먹방 유튜버로 유명한 김영원(80) 할머니도 자신만의 채널을 운영하며 팬을 확보하고 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SNS에서 그녀들은 새 날개를 달았다.

▲ 먹방 유튜버로 유명한 김영원 할머니. /김영원 할머니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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