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경남, 의열단의 중심이 되다

더욱 영악해진 일제-문화통치

3·1운동은 일제에게 큰 교훈을 주었다. 한민족은 덮어놓고 누른다고 해서 눌러지는 민족이 아니다. 서구열강이 차지한 식민지와 달리 한민족·한반도는 수천 년간 수준 높은 문명을 유지하고 있었고, 외침을 극복하면서 민족의식도 형성돼 있었다. 힘으로 누른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일제는 방향을 틀었다. 그들이 소위 문화통치라고 하는 방법이었다. 일단 원성을 높이 산 헌병경찰제를 폐지했다. 태형도 폐지했다. 그리고 '정상적'으로 경찰이 치안을 담당하고, 군대나 군인은 일반인의 시선에서 멀어졌다. 부분적이나마 언론과 출판의 자유도 인정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일간지와 <개벽>, <신생활>, <조선지광> 등 잡지도 발행됐다. 집회도 가능하도록 했다. 다만 경찰 입회하에 집회를 하도록 했으며, 집회 도중 발언 수위가 높으면 경찰이 주의를 주는 선에서 부분적으로 허용했다.

일제는 조선인 유지를 포섭하기 위해 지방기관의 '자문기관'으로 도평의회, 부협의회, 면협의회, 심지어 학교평의회도 조직했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도지사, 군수, 면장 등에게 지역 주민들의 여론을 전하고 자문하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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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항 모습.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이를 거꾸로 살펴보자. 일제는 헌병경찰제를 폐지하는 대신 경찰 숫자를 크게 늘렸다. 1918년 751개소였던 경찰서 및 주재소는 1921년 2960개로 급증했다. 경찰관의 숫자도 5402명에서 2만 750명으로 늘어났다. 이에 따라 경찰력 유지 예산도 1918년 800만 원가량에서 1920년에는 2394만 원으로 크게 늘었다. 1920년 4월 18일 자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당시 경찰예산은 교육과 산업 예산을 합친 금액보다 7.8배나 더 많았다. 또한 한반도 주둔 일본군도 꾸준히 늘었다.

언론을 일부 허용했지만 이는 일제에게도 도움이 되는 방향이었다. 일제 당국은 신문을 허용한 이유에 대해 "백성들의 추향을 주시하고 암류(항일운동)의 흐름을 미리 알아내기 위한 것"이라고 했으며, "민심의 사상 악화의 안전판"이라고도 했다. 신문을 통해 항일인사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여론을 미리 읽어 대응하겠다는 뜻이다.

도평의회를 비롯한 자문기관은 예산이나 정책에 대한 견제나 감시할 권한이 전혀 없었으며, 그저 '자문기구' 이상 역할을 하지 않았다. 또한 의회 의원이 될 자격요건을 갖춘 이는 1920년 당시 일본인 7650명, 조선인 6346명에 불과했다. 지역 유지 이외에는 의원이 될 수 없었다.

또한 조선교육령을 개악하여 '3면 1교 주의'를 내세웠다. 3개의 면마다 최소한 하나의 학교는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기존에 비해 정규학교에서 가르치는 한국사, 한국지리 시간을 대폭 줄이고 일본어, 일본사, 일본지리 시간을 늘렸다. 이렇게 일제가 학교를 대폭 보급한 것은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는 사립학교와 야학, 서당 등을 위축시키기 위해서다. 일제의 계산대로 1921년 사립학교와 서당은 2만 4193곳에서 1931년 9208곳으로 줄었고, 학생 숫자도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이 밖에도 일제는 여러 방법을 사용해 한민족을 분열시키는 데 주력했다. 3대, 5대 조선 총독을 지낸 사이코 마코토가 세운 '조선 민족운동에 대한 대책'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크게 7개의 영역에서 민족분열과 친일세력 양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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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토 마코토 총독.

1. 조선인 관리를 재조사·검토해서 양부(良否)를 가려내어 상벌을 분명히 하고 관청 기강을 숙정해서 일본에 절대 충성하는 자로서 관리를 굳힌다.

2. 조선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분명히 가려내기 위해 몸과 마을을 걸고 일할 핵심적 친일인사를 골라 귀족, 양반, 부호, 실업가, 교육가, 종교가 등에 침투시켜 얼마간의 편의와 원조를 주어 친일단체를 만든다.

3. 각종 종교단체도 중앙집권화해 그 최고지도자에 친일파를 앉히고, 일본인 고문을 붙인다.

4. 친일 민간인에게 편의와 원조를 주어 '수재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친일성향의 지식인을 장기적으로 육성한다.

5. 양반, 유생 가운데 직업이 없는 자에게 생활방책을 해결해 주는 대가로 이들을 선전과 민정 염탐에 이용한다.

6. 조선인 부호(대지주, 실업가, 유지)에게는 노동쟁의와 소작쟁의를 계급 간 대립으로 인식시키도록 하고, 일본 자본을 투입시켜 일본 쪽으로 끌어들인다.

7. 농민을 통제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유지가 이끄는 친일단체인 교풍회, 농촌진흥회 등을 두게 하고 이에 국유림의 일부를 불하해 주는 한편, 입회권(땔감이나 야채를 거두고 가축을 방목할 수 있는 권리)을 주어 회유한다.

이런 식으로 일제는 각계각층에 친일반민족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여기에 3·1운동 결과에 실망한 일부 지식인들도 일제에 포섭됨으로써 친일반민족세력이 광범위하게 뿌리내렸다. 그들은 초기에는 '조선민족을 개량시키고 실력을 키워 먼 훗날 일제로부터 독립하자'는 논리를 내세웠지만 오래지 않아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시키고 앞장서는 극렬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질돼 갔다.

밀양 사람들이 핵심에 선 의열단 투쟁과 부산 부두 노동자 총파업

앞서 언급했듯이 3·1운동의 결과 일부 지식인들은 "이렇게까지 해도 독립이 안 되는구나"고 실망하고 친일로 돌아선 이들도 있었지만, 반면 "우리 민중들은 혁명을 할 수 있는 역량과 용기가 있다"고 확신한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민중혁명을 촉발시키기 위해 의열투쟁을 방법으로 삼았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조직이 바로 의열단이다. 의열단은 하나의 조직이 아니라 지역마다 조직이 있었다. 이들은 조선 총독과 고관, 일본군부 수뇌, 대만총독, 친일파 거두, 일본의 밀정, 반민족적 지역 토호,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 경찰서, 기타 일제 주요기관을 타격 대상으로 삼았다.

초기 의열단원 가운데 직간접적으로 투쟁에 참여한 이들은 총 26명이다. 그 가운데 17명이 경남(당시엔 부산 포함) 사람이었다. 특히 밀양 출신이 김원봉 포함 14명이며, 밀양과 인접한 경북 달성, 경북 고령, 경북 청도 출신도 있었다. 핵심 단원은 김원봉(밀양), 황상규(밀양), 윤세주(밀양), 이종암(달성)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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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세주 의사.

왜 하필 밀양일까? 밀양은 부산, 인천 다음으로 일본인들이 가장 먼저 진출한 곳 중 하나다. 낙동강과 경부선 철도를 축으로 러일전쟁 이전부터 일본인들이 토지를 매입하고 있었고, 토지조사사업으로 빼앗은 토지를 일본 농민들에게 나눠줌으로써 대규모 일본인 이민자들이 생겨났다. 1920년대 초반 이미 밀양에 2500명이 넘는 일본인이 들어와 살고 있었다. 밀양역을 중심으로 한 가곡동에 일본인 시가지가 조성되고, 일본인들의 활동 범위는 밀양강을 넘어 밀양 읍내까지 확장됐다. 또한 밀양시장은 멀리 인천에서까지 물류가 모이는 거점이었기 때문에 이를 장악한 일본인들과 조선인 사이 갈등이 점점 높아졌다.

밀양지역 의열단원 14명 가운데 12명이 밀양군 부내면 내이동과 내일동 일대에서 어린 시절부터 죽마고우였다. 여기에 인근에 있는 동화학교는 민족의식이 강한 사립학교로 유명했다. 또한 김원봉의 정신적 지주였던 황상규는 고모부뻘이 되며, 윤세주와도 먼 친척이 된다. 이렇듯 지연, 학연, 혈연으로 뭉쳐진 밀양 청년들은 일찍부터 독립운동의 방법을 찾아 헤맸으며, 1919년 11월 9일 중국 길림성 파호문 밖 중국인 반씨 집에서 의열단을 결성했다. 한편 김원봉은 부산에도 별도의 의열단을 조직했으며, 경북, 서울, 중국과 일본에도 김원봉과 연계된 의열단 조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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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원봉.

그러나 의열단 투쟁은 쉽지 않았다. 1920년 6월, 제1차 암살파괴계획으로 외국에서 조립한 폭탄을 들여와 밀양과 진영에서 의거를 하려 했으나 일제에 발각됐다. 이때 윤세주, 황상규 등 단원 15명이 체포됐다. 김원봉은 '안방'인 밀양에서 거사는 미루고 별도로 조직한 부산지역 의열단원에게 거사를 지시했다.

1920년 9월 14일, 한반도 내 일제 최고 핵심 거점 중 한 곳인 부산경찰서에 폭탄이 떨어졌다. 박재혁은 하시모토 부산경찰서장이 고(古)서적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고서적을 소개하는 척하면서 단독으로 면담했다. 그리고 고서적을 꺼내는 척하다 폭탄을 던졌다. 폭발로 서장과 박재혁 모두 중상을 입었다. 그는 폭탄을 던지기 전 하시모토 서장에게 "나는 상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가 우리들에게 몹쓸 짓을 한 것은 다 알고 왔다"고 말하고 폭탄을 던졌다. 체포된 후 "왜놈의 손에서 욕보지 않고 차라리 내 손으로 죽겠다"며 중상을 입은 몸으로 단식하다 체포 9일 만에 순국했다. 하시모토 서장도 얼마 후 죽었다.

1920년 12월 27일 오전, 밀양경찰서장 이하 간부들이 조례를 하고 있을 때, 최수봉은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폭탄은 제대로 터지지 않았고, 최수봉은 검거돼 1921년 7월 8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의열단 활동은 이듬해에도 이어져 1921년 김익상이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졌고, 1922년 3월 상해서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 암살시도가 이어졌다. 1923년 1월 12일 김상옥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총독 암살을 위해 기회를 엿보던 중 1월 17일 종로에서 무려 1000명의 일제 군경 포위망에 맞서 싸우다 결국 순국했다. 이렇듯 초기 의열단 투쟁은 일부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1923년 3월, 영화 <밀정>의 모티브가 된 '황옥사건'이 터졌다. 국내로 폭탄을 들여오려던 의열단원 12명이 체포됐고, 의열단은 큰 타격을 입었다. 1923년 12월에는 김지섭이 일본 황궁 앞에서 폭탄을 던졌다. 1925년 3월에는 북경지역 밀정을 의열단원들이 암살했고, 1926년 12월 28일 나석주가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졌다. 이 과정에서 1924년 2월 28일 의열단원 6명이 일제에 검거됐으며, 1925년 11월에도 11명이 검거되는 등 의열단 투쟁은 계속해서 타격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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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 의열단원 거주지 지도.

이렇듯 의열단 활동은 192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한계가 명백해졌다. 폭탄 의거로 조선 민중이 봉기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여러 차례 활동으로 일제도 대강의 조직을 파악하고 있었다. 게다가 폭탄들도 하나 같이 위력이 약하거나 불발이 많아 기대했던 성과를 내지 못했다. 결국은 해외 무장독립운동을 통한 장기전을 꾀하게 됐다.

한편 1921년 9월 12일 일제도, 독립운동가들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1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은 경제공황에 빠져들게 된다. 1921년 1월, 부산지역 철도회사, 상선회사 등 부산항만 관련 기업들은 노동자들과 아무런 상의 없이 일제히 임금을 30%를 삭감했다. 당시 조선인 노동자일 급여는 일본 노동자 급여(1원 16전)의 절반인 58전에 불과했다. 게다가 노동시간도 일본인 노동자의 경우 10시간 미만 노동이 46.7%인데 반해 조선인 노동자 가운데 46.9%가 12시간 이상 노동했다. 시급으로 따지자면 일본인 노동자의 절반에도 훨씬 못 미치는 셈이다. 이런 차별에다 무차별 임금 삭감까지 이어지자 부산항 부두 노동자들은 1921년 9월 16~17일 총파업으로 맞섰다.

파업이 일어나자 경찰은 주도자를 체포하고 집회를 방해했으며, 기업들도 경찰을 믿고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자 9월 25일 다시 노동자 5000명이 결집해 파업했다. 파업이 장기화되자 부산항 화물수송이 마비되고 산업에 큰 타격을 입었다. 결국 기업들은 임금을 10~15% 인상하는 조건으로 노동자들과 타협하기에 이른다. 비록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지만 부산항 부두 노동자들의 총파업은 항일세력, 특히 사회주의·공산주의자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다음 편 예고: 진주 형평운동

참고자료

박수현, 「1920~1930년대 초반 일제의 민족분열정책과 친일세력의 동향」

전성현, 「일제강점기 경남지역의 의열투쟁과 지역성-1920년대 초 의열단의 활동을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8집, 2011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사특강편찬위원회,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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